역게에선 아무도 안다룬사안으로 확인해보고
오늘은 조선물산장려회 운동과 조선어학회등에 큰 도움을 주신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정세권님에 대해 올려봅니다.
요즘 한창 프레시안에서 연재중인데 시간날때 한번쯤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현재까지 연재분은 프린트해서 보면 대략 100p좀 넘어갑니다.
이분은 서울북촌일대를 일본인 집단거주지로 할려는 일제시도에 맞서
엄청나게 많은 한옥들을 값싸게 대량으로 지어서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분양해서 쪽수로 조선인들이 북촌일대를 장악하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일본민간인들의 진출을 억제하는데 꽤 큰 역활을 하신분입니다.
그리고
조선물산장려회 재정을 절대적으로 후원하면서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를 열었고,
(본인의 건물 1층에는 조선물산장려회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을 개설했고,
별도 조직을 설립해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를 만들고 홍보하셨죠)
조선어학회 재정을 지원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문을 당하며
(조선어학회 건물을 본인 자비로 건설해 기증하고 지속해서 후원하셨습니다.
조선어학회는 말이 어학회지 어학회가 아니었죠
1940년대 일제 폭압 속에서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 목숨을 걸고 한 독립운동 단체랑 다름없어 관계자들에 대한 일제의 고문과 폭행은 장난아니었습니다. )
즉 조선물산장려회 운동과 조선어학회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다 끌려가서 일제에 개고생하셨던...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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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겪었던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 동지회' 단체 사진(1946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세권이다. ⓒ한글학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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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견제 "서울이 정세권 것이란 말이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건양사, 경성 건설 4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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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건양사가 어느 지역을 개발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신문의 분양 광고, 실생활 잡지에 나왔던 분양 광고와 건양사 회사 주소지 그리고 가족의 증언과 등본상 주소를 역추적하여 종합적으로 건양사의 개발 지역을 지도화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해당 지역 전체를 개발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경성 대부분의 지역을 책임지고 있다. 더군다나, 광고와 가족의 등본상 주소에 나와 있지 않은 개발 지역이 충분히 있다는 추정할 수 있기에,
정세권의 개발지는 최소한 이 이상일 것이다.
▲ 그림 2, 건양사 개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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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1975년 항공 사진에서 보이는 동대문 북쪽 창신동 지역이다. 창신동 651번지는 앞서 설명한 거부 조병택의 아방궁을 매입하여 개발한 지역으로, 레빗타운과 스케일은 다르나 작은 규모에서 비슷한 모양새의 주택을 대량으로 건설된 흔적은 매우 흡사하다.
▲ 1972년 동대문 인근 창신동 한옥 집단 지구. ⓒgis.seoul.go.kr
하지만, 더 놀라운 곳은 돈암 지구(보문동 지역)의 한옥 집단 지구이다. 일제는 보문동 일대를 당시 경성 외곽의 뉴타운 개발 지역으로 꼽고 일본인들을 이주시키려 하였으나, 실제 개발은 조선인 디벨로퍼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개발 시기는 1937~1940년이다.(김영수, 동대문 밖 돈암지구 주거지의 형성과 변천, 서울학 연구, 2009)
아래 모습은 시기적으로 미국의 레빗타운 건설 이전, 조선에서(포디즘을 고려했건 안 했건) 이미 레빗타운에 필적할 만한 규모의 주택 개발 단지가 건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1980년도의 항공 사진이니, 1940년 당시에는 온 지역이 한옥으로 덮여 있었다. 보문동 지역에 정세권의 건양사가 개발한 부분이 있는지는 현재 아는 바가 없다.
▲ 1980년 보문동. ⓒgis.seoul.go.kr
따라서 그 규모가 다르다고는 할 수 있으나, 인구 폭증의 경성 1920~1930년대 우리나라에도 포디즘의 대량 생산에 비견되는 역할을 한 디벨로퍼, 건양사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의 개발이 시사하는 큰 의미는 디벨로퍼 정세권이
일제의 도시 계획에 정면으로 저항하면서 한옥 집단 지구를 개발하였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한 연재는 다음 회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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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9번 투옥한 독립운동가, 누가 그를 지웠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안재홍과 동지적 연대를 맺은 건축왕
1920년대 급격한 부를 축적한 정세권은 대(大)자본가로 성장하는 와중,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가 참여한 민족운동 관련 조직 중 공식적 기록으로 확인 된 것에는 조선물산장려회를 비롯한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이 있다. 아래는 국가보훈처의 공식 기록이다.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서울 지회를 설립했다. 1930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서울 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출되고, 1930년 5월에는 중앙회의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출되었으며, 1934년 중앙회 이사로 선출되어 회관건립‧강연회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 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 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에 서울 화동(花洞)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조선어학회 사무소용으로 기증하여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국립유공자 공훈록 6>(국립유공자공훈록편집위원회 엮음, 국가보훈처 펴냄, 1988년), 667~668쪽)
그가 맡은 직책은 대부분 경리와 재무이사로 조직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서슬퍼런 일본 강점기, 거대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 그것도 정부 인‧허가가 필요한 부동산 개발업의 자본가가 대놓고 여러 조직의 재무를 담당하면서 재정을 지원한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역할은 더욱 빛난다. 또한, 이러한 공식적 기록 이외에도 가족들은 그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 가족을 지원했던 사실을 증언한다.
"아버님은 또 만주동포구제회를 손수 설립하였다. 만주 땅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같은 동포 흉탄에 쓰러지신 김좌진 장군 유가족이 오셨다. 현지처이신 미망인과 명한, 철한이 남매와 그들의 이모, 나 선생이 함께 왔다."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교수이자 서울대학교 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최태영 박사(1900~2005년)의 회고다. (최태영 박사는 우리나라 상고사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1922년 조만식이 1차로 시작했던 물산장려운동이 일제 탄압으로 잦아든 뒤, 1929년 이를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경상도 사람 정세권이 내게 와서 이를 다시 일으켜 세워 보자고 했다. (정세권의 주장은)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 했는데, 일제가 주목하니 위험한 노릇이어서 법을 아는 내가 나서서 법망을 비켜가며 친일을 피하고 징역 안 갈만큼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최태영, '광산이야기와 제2차 물산장려운동', <대한민국학술원통신>, 제144호, 2005년 7월, 4~9쪽)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1924년 법학사를 마치고 조선에 들어와 1925년 한국인 최초로 법학 교수가 된 최태영 박사에게 정세권이 접근하여 조선물산장려운동 재개에 협력을 부탁했다. 최태영은 1929년 정세권과 함께 물산장려회 상무이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물산장려 정기대회', <중외일보>, 1930년 5월 19일)
그와 함께 한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 중, 특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인물은 민세 안재홍과 고루 이극로다. 이 두 인물은 납북과 월북으로 그 업적이 상대적으로 가려진 형편이나, 민세 안재홍은 1920년대 민족 언론의 사표였으며, 고루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최고역점사업 한글사전 편찬의 실질적인 기둥이었다.
특히 민세 안재홍은 기농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 양사원,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 모든 활동을 함께 한평생의 동지였다.
안재홍(1891~1965년)의 아호 민세(民世)의 의미는 '민중의 세상'인 만큼 그는 매우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였다. (<안재홍의 항일과 건국 사상>(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엮음, 백산서당 펴냄, 2010년), 9쪽)
또한,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이자 역사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일보> 주필 그리고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하면서 기록적인 수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사설 980여 편과 시평 470편 등 1450여 편에 이른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 시대편>(조선일보사 사료 연구실 엮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2004년), 97쪽)
<조선일보> 활동을 개시하기 전 이미 독립운동에 가담한 대가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그는, 언론인으로서 <조선일보> 재직 시 감옥을 제집 드나들 듯하였다. 일본의 비인도적 처우를 비판한 사설('보석(保釋) 지연(遲延)의 희생', <조선일보>, 1928년 1월 21일),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판한 사설('제남사변(濟南事變)의 벽상관(壁上觀)', <조선일보>, 1928년 5월 9일), 신간회 총무간사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 준비 발각 등으로 1928년 3차례에 걸쳐서 투옥되었다.
1920년대 조선일보는 경영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사주가 자주 바뀌었는데, 1924년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월남 이상재가 조선일보 4대 사장에 취임하였고, 이상재 선생의 사망으로 1927년 5대 사장에 신석우 그리고 1931년 6대 사장에 안재홍이 취임하게 된다. 안재홍은 조선일보의 경영이 어렵자 고향의 논밭을 팔아 신문사의 빚을 갚았고 직원들의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 시대편>(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엮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2004년), 101쪽)
건양사가 1929년과 1930년 <조선일보>에 광고를 집중적으로 게재한 것은 당시 조선일보의 경영 상황을 도와주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건양사는 <조선일보>에 총 37회에 걸쳐서 광고를 게재한 데 비해, <동아일보> 게재는 2차례에 그치기 때문이다. 또한, 이상재(신간회 초대회장 역임) 및 안재홍과 조선물산장려회와 신간회 활동을 함께한 동지적 인연 역시 크게 작용한 듯하다.
안재홍은 사장에 취임한 지 1년 후 1932년 일제의 강압 때문에 경영권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지속하는데, 1936년 임정과 연락을 취하였다는 죄목으로 2년간 옥고를 그리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기농 정세권과 민세 안재홍, 고루 이극로에게 심한 고초를 안긴 것이었다. 특히, 감옥에서 안재홍과 이극로가 겪은 고초는 상당하였다. 일제는 안재홍에게 이극로를 직접 문초하라고 지시하면서 이극로가 대답을 하지 않는 경우, 이극로의 뺨을 때리라고 강요하였다. 안재홍은 이를 단연코 거절하였고, 그 결과는 모진 고문이었다. (<다사리 공동체를 향하여 : 민세 안재홍 평전>(정윤재 지음, 한울 펴냄, 2002년), 71~72쪽)
조선물산장려회와 신간회, 조선어학회 등 여러 민족운동에 기농 정세권과 민세 안재홍이 함께 참여한 점은 의미하는 바가 상당하다. 1920년대 새롭게 성장한 신흥 자본가와 언론인이 함께 합작하여 주도한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정세권은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민족운동 조직의 재무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고 안재홍은 자신의 미디어역량을 활용하여 민족운동의 취지를 설파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민족 자본가과 민족 언론인 간의 협력을 통한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아래 조선어학회 사진은 정세권과 안재홍의 친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둘은 사진 속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아 있다.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생존자들을 찍은 1946년 사진.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정세권, 세 번째가 안재홍. ⓒ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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