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대학이란(특히 인문대생에게) 취업을 위한 곳이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는 곳(전문 용어로 대가리 키우는 곳)이었다. 지금은 꿈만 같은 이야기겠지만, 2학기가 시작될 쯤이면 취업 정보실에는 원서들이 넘쳐났다. 학생회관에는 삼성, 현대 등 대기업에서, 특히 비주력 계열사와 파견 나온 선배들이 후배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꼬시고 있었다.
참 찌질해 보이던 선배들도 그때쯤이면 양복 입고 학교에 나타나 그동안 수거한 면접비로 후배들에게 거나하게 술을 샀다.
졸업예정자들은 술에 심각하게 취해 돈 많이 주는 곳을 갈까, 장래성이 좋은 곳을 갈까, 후배들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가끔 당시 최고 인기가 좋았던 \’제일기획\’에서 자기 같은 인재를 몰라 본다고 비분강개 하기는 했다. 인문대생 주제에 금융권 면접 떨어졌다고 짜증내기는 했다. 개개인마다 당연히 처지는 달랐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취직을 못한다는 것을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물론 그 중에, 나름 위기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스펙 관리 하던 사람도 있었다. 남들보다 영어나 제2 외국어를 미리 공부한다든가 컴퓨터를 따로 배운다든가 아니면 자격증을 따든가. 솔직히 그런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무시 당했다.
취직할 때 차이가 있다면, 스펙 관리한 친구는 특채로 일찍 취직하고 안 한 친구는 공채로 들어가고. 스펙 관리한 친구는 연봉 많이 주는 곳에 골라가고, 관리 안 한 친구는 마음 졸이다가 겨우 들어가고. 뭐, 그런 정도.
관성이란 무섭다. 졸업까지 시간 좀 남아 있어, 그냥 버텼다. 솔직히 무엇을 해야할 지 알 수도 없었다. 영어가 중요하다고 하니까, 영어 공부 좀 한 것이 다였다. 내 주변은 대부분 그랬다. 적당히 대학 졸업하면 취직하니까. \’어차피 취직하면 죽도록 일해야 하는데, 대학 때나 놀아야지.\’ 다들 그랬다.
마침 시간이 지나니 다시 취직하기 쉬워졌다. 몇몇 기업들은 예전처럼 잔여 학기 전액 장학금을 미끼로 재학생을 꼬셨다. C학점에 영어 점수도 없는 동기가 모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문이 결정적이었다. 다들 안심하고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다. 쓸데없이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하고, 전공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을 놀이처럼 하기도 했다. 어떤 놈은 논리를 배워야 한다고 수학과 수업을 듣기도 했다. 물론, 그전처럼 거의 매일 술 먹고 당구치고 사소한 일로 싸웠다.
그런데, 세상이 갑자기 변했다.
예측했어야 했는데
나보다 한 학기 먼저 졸업하는 애들이 이상하다고 했다. 서류 전형이 통과가 안 된다고 했다. 대기업이 아니다. 일반 중견 기업도 서류조차 통과가 안 된다고 했다. 나중에 알아 보니, 인터넷으로만 접수한 사람은 전부 탈락하고, 수고스럽게 취업정보실에서 나눠주는 원서 제출한 사람은 면접까지는 봤다고 한다. 게으른 놈 탈락, 부지런한 놈 합격.
난 배째라고 버텼다. 아, 씨바, 뭐 그리 원하는 게 많은지. 어떤 회사는 부모 재산까지 적으라고 하지 않나, 어떤 회사는 초등학교 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쓰라고 하지 않나. 이력서에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적으니 더 이상 쓸 말이 없다. 자격증란엔 친절하게 운전면허는 적지 말라고 써 있더라.
뭐, 어쩌라구? 내가 공대생도 아니고,그렇다고 경영학과도 아니고, 평범한 문과생이 타인에 비해 ‘객관적’으로 뛰어난 점을 어떻게 증명하냐?
영어 점수? 내가 아르바이트로 타과 전공 서적 여러 권 번역했다. 출판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벌 번역이라고 칭찬 받았다. 근데, 토익 900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 안 들려.
해외라고는 제주도도 못 가 봤다. 그리고 면접에서 왜 영어로 자기소개 하라고 하냐? 자기소개, 한국말로도 어렵다.
솔직히 괜찮은 대학 졸업했다. 면접 가보니, 입학 합격 점수가 우리 학교보다 낮은 곳이 없더라. 처음으로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친 듯이 공부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식이지… 떨어지는 낙엽.
뭐, 결과는 전부 탈락.
보다 못한 한 놈이, 일단 아무 데나 들어가라고 하더라.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학부만 겨우 졸업한 나보다 2년 먼저 졸업한 여자 동기였다. 당시 모두가 선망하는 앵벌이계의 최고봉, 모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학생보다는 업계에 있는 게 정보도 얻기 쉽고 자기 능력을 보여주기 쉽다고 한다. 맞는 말 같아서 아무도 모르고 심지어 업계에서도 전혀 유명하지 않은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초봉 월 100만 원 남짓. 참고로 당시 대기업 제조업이 초봉 180만 원 정도 할 때다. 상여금 제외 하고.
거기서 만 5년을 버텼다. 죽도록 일했다. 정말 이러다가 죽는구나 하는 순간까지 버텼다. 다 대학교 때 놀던 업보라고 생각했다. 그 5년 동안 업무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주말에도 일하고, 평일에는 밤새고, 휴가 가도 전화로 일하고. 핸드폰 배터리가 6개월을 못 버텼다.
매년 회사 최고 연봉 인상률 갱신했다. 4년 차 연봉이 대충 대기업 다니는 동기만큼 되더라. 근데 사람이 바보가 됐다. 어느 날, 집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더라. 친구 이름이 기억이 안 나고, 같은 회사 직원 이름이 헷갈리더라. 나는 분명 \’선영씨\’를 불렀는데 입은 \’영선씨\’라고 소리 내더라. 더 버티면 죽을 거 같아서, 사장에게 제발 아무 것도 안 하고 일주일만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사장이 봉투 하나 주더라. 좀 더 버텨달라고. 그래서 그만 뒀다.
살려줘
정확히 한 달 놀고, 지금 있는 회사로 옮겼다. 리얼 계약직.
돈은 제법 많이 준다. 근데 불안하다. 심플하다. 회사에서 \’너 나가\’ 하면 나오면 된다. 퇴직금 그런 거 없다. 주말도 없고, 휴가도 없고, 개인 생활도 거의 없다. 핸드폰은 24시간 대기. 이런 생활, 벌써 10년이 넘었다. 나도 쉬고 싶다.
하지만 불안하다. 위기감. 제자리에 있는 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퇴보다. 무엇인가 늘 해야 한다. 씨바, 아무리 내가 대학 때 일주일에 3-4일만 수업 들어가고 놀았지만,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 웃긴 것은, 내 친구 중, 내 처지가 매우 좋은 편에 속한다는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 열심히 한 건 무슨 큰 뜻이 있었던 때문이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대학 때 놀다가 적당한 회사 들어가서, 정년까지 월급쟁이 노릇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남들처럼 20대 후반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집 사고 애들 키워 학교 보내고. 우리 아버지는 못 그러셨지만, 늘 행복해 보이는 옆집 아저씨처럼,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난 이 꿈이 아주 소박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어렵더라. 주변에서 적당히 일하다가 도태되는 사람을 많이 본다. 난 아직까지는 살아 남았다.
곧 마흔이다. 그 이후에 솔직히 자신 없다. 왜 이러고 살아야 되나 생각하지만 통장에 찍히는 돈을 생각하면, 정확히 그 돈이 안 들어 온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될 지를 모르겠다. 나 혼자면, 노숙을 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데 (사실 매우 익숙하다) 애들을 생각하면, 그냥 담배 한 대 피우고 만다.
지금 내가 하는 일, 원래 3~4명이 해야 할 일이다. 그 업무를 나 혼자 하고 연봉은 대충 2인분을 받는다. 회사는 1~2명 분의 인건비를 줄여서 이익이고, 나는 연봉을 두 배 받아서 이익이다. 그리고 나 때문에 직장을 잃은 2~3명은 손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일을 그만둔다고 그 2~3명이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다른 사람이 1.5인분만 받고 일할 수도 있다.
안다. 회사가 내게 월급을 주는 것은 내가 효용가치가 있을 때까지만이다.
계약서에 졸라 친절하게 써있다. 직원이 사고나 재해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만큼 물리적인 장애를 당했을 경우 회사는 아무 책임 없이 해고 할 수 있다. 대신 나는 보험회사에서 보상금을 받겠지. 그래서 매달 보험금을 꼬박꼬박 낸다. (내가 돈을 많이 벌면, 제일 먼저 종신 보험 해지할 거다)
찬성!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효율성\’이다. 경제학 시간에 교수가 말했다. 경제학에서 \’효율\’이란, 가장 많은 재화를 생산하도록 자원을 배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예를 들어 A와 B 둘 중에서 A 혼자 모든 자원을 가졌을 때 생산량이 가장 많다면, A 혼자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럼 B는? 효율성을 저해하는 \’불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나는 아직 A라고, 그래서 살아 있다고 자위한다. 솔직히 공정한 지점은 A와 B 중 어느 한 곳, A\’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내가 A\’를 선택할 가능성은 없다. 왜? A\’는 없다.
A 다음에는 B다.
내가 A\’를 선택한 순간, 다른 누군가가 내 자리로 들어오고 난 비효율적인 사람이 될 뿐이다. 극단적인가? 그렇지만 우리 동네 규칙이 그렇다. 졸라 미국적이고 자유로운, 그리고 효율적인.
이게 잉여들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나 때문에 2~3명의 잉여가 생겼다. 그렇게 쌓인 잉여들 때문에 비정규직이 늘어나 누적이 된다. 또 시간이 지나면, 나 같은 사람들이 잉여로 합류한다. 내 친구 중, 일찍부터 잉여로운 삶을 사는 놈이있다. 제일 행복해 보인다. 물론 그 놈은 아예 결혼할 생각을 안 한다. 한 놈은 30대 중반에 합류했다. 결혼해 애까지 있다. 다행히 집이 부자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라고
10여 년 전, 모 기업면접관이 내게 물었다. 언제 가장 행복한지. 날씨 좋은 봄날 야외에서, 오후 2~3시 경 혼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을 때라고 대답했다.
졸라 비웃더라. 면접관뿐만 아니라 같이 면접 보러 들어간 지원자들도 가소롭다는 듯 처다보더라. 한 번은, 나만 할 수 있는 거 한 가지만 말해 보라고 하더라. 내가 대답했다. 한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틸 수 있다고. 물론 먹고 자고 싸는 것은 제외하고. 이거 솔직히 엄청 대단한 능력인데, 무시하더라. 씨바. 니들도 한 번 해봐라.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자칭 잉여라고 딴지에 출몰하는 아저씨들, 뭐 해줄 말이 없다. 정신 없이 휩쓸리며 살다 이렇게 흘러왔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 아까 위에서 말한 부자집 잉여가 어느 날 술 먹다 말하더라.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제법 좋은 회사도 다니다가 호기로 때려치기도 했는데,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2년 계약직 직원이 되어 있고, 계약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잉여가 됐다고. 아무도 자기를 다그치지도 않았고 일 못한다고 욕하지도 않았는데, 계약 마지막 날 다음 날 회사 나오라는 말이 없어 자연스럽게 잉여가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