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제가 세상을 떠나고 100일간, 서태후는 북경 내에서 결혼식과 오락 행사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동안 다음 후계자를 물색해야 했습니다.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동치제의 뒤를 이을 사람은 직계가 아닌 방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굉장히 복잡하였습니다.
많은 고심 끝에 차기 황제로 뽑힌 자는 순친왕의 아들이었던 애신각라 재첨愛新覺羅载湉.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었습니다.
그리고 새 황제의 연호는 광서光緖로 정해졌습니다.
<순친왕부>
광서제는 1871년 8월 14일 순친왕부에서 태어났습니다. 5년전에 요절한 맏아들 제한을 잃은 후 순친왕과 그의 부인 대복진은 이 아이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거의 맹목적이어서, 아들은 별 어려움 없이 자랐습니다. 다만 아이가 과식할까 봐 항상 적게 먹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광서제는 커서도 마르고 허약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서태후가 '황제는 정말 병약하고 마른 아이여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순친왕 부부는 아들에게 음식 먹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라고 회고할까요. 아무튼 서태후의 명에 따라, 이 '병약한 아이' 는 자금성에 입궁하게 됩니다. 황제의 신분으로 말이지요.
아들이 황제가 된다는 소식을 듣자 순친왕은 눈물을 흘리며 서태후에게 명을 거두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태후마마, 제 아들은 어리고 덕이 없어 황제가 되기에 부족하나이다."
하지만 서태후는 이를 무시했고, 재첨이 차기 황제가 되는 것으로 결정나버립니다. 결국 순친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합니다.
1875년 12월, 재첨은 포대기에 둘러쌓인 채 가마를 타고 자금성으로 들어갑니다. 서태후는 그를 품에 안고는 '대통을 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순친왕은 크게 슬퍼하며 며칠간 넋빠진 사람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그는 구석에 누어 멍하니 있었고, 그 모습은 아주 비참하고 울적한 광경이었습니다. 순친왕은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된 것은 아들에게 불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 어렴풋이 예상하였고, 그 예상은 어느정도 맞아떨어졌습니다.
<순친왕>
새 황제는 이제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두 태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린 후 학습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의 스승은 옹동화로, -함풍 6년에 장원을 할 정도의-높은 학식으로 이름난 학자였으며, 뛰어난 서예가였고, 전황제 동치제의 스승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린 황제는 스승 앞에서 때를 쓰고 울기도 하였으나 금방 적응하여 학습에 매진하게 됩니다. 커가며 점점 호학하는 면모를 보이던 황제는 어느새 스승으로부터는 '명민한 학생' 이라는 칭찬을, 태후로부터는 '앉으나 서나 공부한다' 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이때가 7살이 되었을 무렵입니다.
광서제는 옹동화에게 깊은 신뢰를 느꼈습니다. 친아버지 순친왕과는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데다 만나도 군신관계로서만 만났으며 항상 어색하였던 반면 하루의 반을 얼굴을 맏대고 보낸 스승은, 황제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친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황제가 6살 때 옹동화는 집안 묘지를 보수하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떠났던 적이 있는데, 이때 광서제는 옹동화가 내려준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고 놀기 바빳습니다. 옹동화가 돌아온 날 광서제는 그의 품에 안겨 소리칩니다. "오랬동안 스승님을 뵙지 못해 정말 그리웠습니다!" 이후 황제는 스승이 내준 숙제를 모두 이행합니다.
<옹동화>
광서제의 유년시절을 말하자면 그렇게 행복했을 듯하지는 않아보입니다. 친어머니도 자주 만나지 못하였고, 양모인 서태후는 엄격하였습니다. 그나마 친절하게 대해주던 동태후는 그가 열한 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나버렸으며 이로 인해 서태후와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집니다. 매일 태후에게 가 문안인사를 드렸고, 태후는 한번 만나면 매섭게 질책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벌로 오랫동안 무릎을 꿇어야만 하였습니다. 태감 구연재의 회고처럼, 황제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 기에 소년황제는 점점 의기소침해지고 수줍음을 많이 타게 됩니다.
소년황제가 과식하다 탈이 나면 야단이 나기 때문에 태감들은 될수 있는 한 적게 먹이려 애썻습니다. 그러다 보니 황제는 항상 배고팟고, 때때로 태감 방에 몰래 들어가 찐빵을 들고 달아나기도 했습니다. 태감들이 쫒아가 황제의 손에 들고있던 찐빵을 뺏었을 때에는 이미 절반이 뱃속으로 들어가버린 상태였습니다.
광서제는 숫기가 없고 문약한 편이었으며, 활동적인 놀이보다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만주 귀족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활쏘기나 말타기 소질이 황제에게는 없었습니다. 승마 연습을 할때는 진짜 말이 아닌 모형 말을 가져다 놓고 그 위에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오락마저도 기피해 자신의 생일 날 연극을 공연할때면 예의상 잠시 모습을 보였다가 금세 빠져나가버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건 진짜말입니다.)
때때로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 대부분은 주로 애민愛民과 관련된 주제였습니다.
萬戶凜寒飛
惟有深宮里
金爐獸炭紅
서북은 쌓인 눈으로 밝은데
백성들은 추위에 떠는구나
오직 궁중 안에서
육포를 굽는 황금난로의 재만 붉구나
이 시는 황제가 열다섯 살 때 썻던 시입니다. 또한 호남에 가뭄이 들었을 때 신하들 앞에서 '비가 오기를 간절히 원한다' 고 말하기도 했지요. 광서제는 유교의 교리에 따라 백성이 근본이며 가장 중요한 존재라 생각하였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백성을 위해서라면 권력을 잃어도 무방하다' 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능력과는 별개로 애민군주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1889년, 황제의 혼례가 거행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마는, 정확성은 보증하지 못하지만 재미있어서 소개합니다.
혼례 상대를 결정하기 위해 양갓집 아가씨 세 명, 황제 그리고 태후가 모였습니다. 황제는 서태후에게 어머니의 뜻을 따르겟다며 앙보했지만, 서태후는 황제가 직접 결정하라며 거절하고, 이 과정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황후를 결정하는 옥을 들고 세명 중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다가갔으나, 뒤에 있던 서태후가 별안간 '황상!' 이라고 소리치며 황제의 사촌인 융유隆裕를 가리켰고, 결국 황제는 자신의 사촌을 아내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무튼 간에 융유는 21살로, 황제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광서제는 혼례 날 융유를 보고도 모른 척했고, 그 이후에도 항상 그녀를 백안시합니다.
<융유황후>
황제는 평범한 생김새의 사촌 황후 대신 열세 살의 진비珍妃 타타랍씨를 총애하게 됩니다. 그녀는 발랄하고 생기넘쳤으며, 남장하기를 좋아했고, 얼굴이 단정하고 흠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황제의 마음을 이해해주었기에 광서제는 진비를 첩이 아닌 친구로 대했습니다. 다만 둘 다 장난기가 있어서 융유황후의 침대에 죽은 고양이 가죽을 던져놓기도 했습니다. 정말 철이 없었지요.
<오른쪽이 진비. 사진은 합성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광서제는 허약한 편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결핵을 앓기도 하였고, 이는 커서도 고질병으로 자리잡고 맙니다. 몸에 조금만 자극이 와도 감기에 걸리고 관절염이 생겼으며, 두통과 구토기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이런 건강상의 문제가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는지 광서제는 약간 괴팍한 편이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버럭하여 환관들을 모질게 매질하기도 하고, 혼례 때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자 창문 유리를 박살내버리기도 합니다. 이후 영대에 유폐되었을 때 전등을 설치하라는 명령이 이루어지지 않자 전등위원들에게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못할 경우 '따귀를 때릴 것이다' 라고 협박하기도 하지요.
으어 오늘은 여기까지 벌써 11시네요. 2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