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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해의 지배자, 해적왕 정지룡(1) ─ 마카오 세계
게시물ID : history_250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1
조회수 : 1764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16/01/19 18: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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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xinga_and_Zheng_Zhilong.jpg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1603년에 시작합니다. 복건성, 그리고 하문 인근에 있는 남안(南安)이라는 작은 마을, 지방 정부 말단 관리인 정소조(郑紹調) 로부터 정지룡(郑芝龙)이 태어난 것입니다. 정소조의 꿈은 자식들을 출세 시켜 집안의 명예를 높이고 명가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런 정소조의 부인이자 정지룡의 어머니인 황씨(네덜란드 쪽 기록에선 Theyma)는 상인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황씨 집안은 "공개된 거래" 뿐만 아니라 "비합적인 거래" 도 종종 해내던 집안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보자면 정지룡은 아버지보단 어머니 가문의 기질을 많이 타고났습니다.

 

 

 

명나라의 복건은 학구열이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과거 급제자도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배출했습니다. 본래 어느정도 재력이 있던 정소조는 자식들을 교육시켜서 어떻게든 성공을 보려고 했지만, 그 자식들은 정소조의 기대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훗날 정씨 집안의 아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소조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맙니다.

 

 

 

정지룡의 이름은 여러가지인데, 집안에서는 一官, 즉 첫째 아들로 불렸고, 훗날 서양 세력들이 정지룡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이콴"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정지룡은 자신의 이름을 용에서 따왔고,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동물에서 이름을 따 둘째는 지호, (셋째는 일찍 죽어버렸습니다.)넷째는 지봉, 다섯째는 지표로 불렸고 다른 동생들은 지봉, 지관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그는 훗날 세례를 받아 니콜라스라는 이름을 얻었고, 니콜라스 이콴으로도 불렸습니다.

 

 

 

정지룡의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대만외지(臺灣外誌)라는 자료에 실려 있는것이 대부분인데, 시작 부분은 중국사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늘쌍 그렇듯이 정지룡이 소년 시절부터 범상치 않았으며 7살때 이미 글을 깨우치고 춤과 다른 재주에도 통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뻔하고 뻔한 기록을 넘어가면, 7살의 정지룡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 그가 동생 정지표와 놀다가, 지방 관리 채선계(蔡善繼)의 집 담 너머에 있는 여지나무 열매를 떨어뜨리기 위해 돌을 던졌는데, 정말 재수없게도 그 돌은 나무를 빗겨나서 정원 안으로 떨어졌고, 마침 정원에 있던 채선계의 머리통을 강타했다는 것입니다. 채선계는 당연히 정지룡과 그의 아버지를 잡아들였지만, 정지룡의 얼굴을 보고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너의 앞으로 창창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건 아니건, 정지룡은 집안에선 정실이 아닌 첩의 자식이었고, 그 밑의 동생은 최소한 남자만 6명이 있었습니다. 정지룡은 사사건건 아버지의 말을 반대하고 또한 무시하면서 빗나갔습니다. 그는 기록에 따르면 "천성적으로 배울 의지가 없고 게을렀으며, 무술과 격투를 좋아" 하여 아버지의 의사와 대립했고, 급기야 그는 자신의 계모와 같이 정사를 나누기까지 하는데, 정소조는 이 경악스런 일에 어이없어 하며 정지룡을 쫒아내었습니다. 정지룡이 향한곳은 마카오였습니다. 그 당시 중국인들의 눈에 마카오는 온갖 범죄자와 수상쩍은 외국인들이 모이던 곳이라, 정소조는 정지룡이 그곳에서 악의 구렁텅이 생활로 빠질것이 뻔하다고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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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의 위치

 

 

이때 정지룡의 나이는 18살. 본인 뿐만 아니라 같은 망나니 동생인 정지표, 정지호가 함께 마카오에 있던 외조부의 집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황씨 부인은 정소조의 총애를 잃고 정지룡 문제로 자주 다투던 중이라, 이곳에 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황씨 가문은 무역 상인 집안이었습니다.

 

 

 

마카오는 혼란이란 이름의 질서가 지배하는 도시였습니다. 포르투갈 인들이 명나라 정부의 묵인 아래 머물고 있긴 했으나, 이것은 "허가" 라기 보다는 "못 본 채"에 가까운 것으로서, 그곳에 머문다고 해도 자유롭게 무역을 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마카오에는 해금이 좀 완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모인 서양 상인들과, 이곳에 머물면서 포교를 하려고 하는 예수회 선교사 들에 현지 중국인들이 어지롭게 얽혀 있었습니다.

 

 

 

확실히 이 시점에서는, 중국인들의 동아시아 - 동남아시아 진출은 활발하던 참이었습니다. 그것은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일이었는데, 해안을 따라 강 하구가 수없이 나 있고 또한 항구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덕분에 민간 무역업자들은 세금 감시관의 눈을 쉽게 따돌릴 수 있었습니다. 복건의 선원들은 해안을 따라 고기잡이를 떠나는 척 하다가, 해안선이 보이지 않으면 곧바로 이틀거리인 대만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보급을 한뒤 일본의 히라도(平戶島)나 나가사키(長崎)로 가거나, 에스파냐 령 필리핀, 혹은 동남해까지 내려가 현지의 네덜란드 인들과 교역을 하는등 끝없는 자유가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남중국해의 대항해시대였습니다.

 

 

 

중국 정부 ─ 곧 명나라는 해금을 선포했고, 간혹 매우 강화되거나 느슨해지거나 차이는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외국과는 조공 무역외에 무역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십년에 걸친 "불법" 무역의 효과는 사방에 증명이 되어있었는데, 이를테면 현대 중국의 요리에 빠지지 않는 재료이자 ─ 음식이라고는 안 가리는 마오쩌둥이 이것만 있으면 너무나 좋아했다는 ─ 고추는 16세기까지 중국에 없었으나, 이때 필리핀에서 전파되면서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담배도 있습니다. 에스파냐 사람들의 손에 전래된 담배는 1600년대 복건을 중심으로 퍼져, 1650년의 기록에까지 가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고 까지 말해질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그러나 가장 천지개벽을 일으킨 물건은 바로 고구마로, 이 물건을 중국내로 전파한 인물은 진진룡(陳桭龍)이라는 복건 사람입니다. 그는 필리핀에서 1593년 음력 5월 고구마를 중국으로 들여왔고, 마침 기근이 닥치자 지방관을 배알한 진진룡은 고구마의 좋은 점을 역설, 기근 지역에 이 물건을 풀고 재배하게 되었습니다. 그 효과로 복건 지역 사람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기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명망 깊은 역사가이자 동림당 지도자가 좌천된것에 항의한 일로 복건으로 쫒겨났던 인물인 하교원(何看遠) 역시 고구마로 굶주림을 때웠고, 그 좋은 점을 시로 쓰기까지 했습니다.

 

 

 

중국산 비단은 전세계에서 인기가 있었고, 일본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그 가격은 10배 이상으로 뛰었습니다. 또한 중국인들이 나가사키에 들어서면, 그들을 일본인들과 구분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비공식적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마찬가지로 비법률적인 일로 한탕을 해내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배에 무장을 잔뜩 채운 후에 지나가는 상선을 약탈해서 한탕을 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교역을 하는 쪽도 무장을 강화하면서 남중국해의 바다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곧 교역하는 자들과, 해적들과, 교역하면서 해적질을 하는자들이 활개를 치게 된 것입니다.

 

 

 

네덜란드나 영국, 포르투갈 인들도 이런 전투와 상선들에 달린 대포등의 무장을 보면서, 그들을 노예로 만들면서 이곳을 동남해나 인도양, 아프리카처럼 착취와 채찍질로 쥐어짜려고 하는 행위는 자살 행위라는것을 깨닫고 ─ 그러나 이들이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볼일 없는' 개인적인 편지에서는 중국인을  "역겹고 배신 잘하는 놈들" 일본인은 "천하고 무례한놈들" 이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우월주의를 여과없이 드러내기도 합니다 - 상당히 정중하게 대하면서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교역, 전투, 해적, 약탈, 외교 이것이 바로 17세기의 마카오였고, 정지룡은 바로 그런 세계에 떨어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전혀 새로운 세계에 놀랄만한 적응력을 보이면서 많은 돈을 벌이며 승승 장구 했습니다. 또한 그는 서양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한 포르투칼인은 정지룡의 대부(代父)가 되어주기까지 하며, 사망하면서 자신의 돈을 유산으로 넘겨주기까지 합니다. 정지룡은 선교사들과도 친분을 맺었고, 그들에게서 니콜라스 가스파라드 이콴(Nicholas Gspard Iquan)이라는 세례명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곤 해도, 정지룡은 가톨릭 신자라고 할순 없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일을 벌인것은 순전히 서양인들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서 였을뿐, 종교인 다운 행동은 전혀 보인적이 없었다고 당시 외국인들은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풋내기 시절을 벗어나 마카오 사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적응해가고 있던 정지룡에게 일생 일대의 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단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출처 http://cafe.daum.net/shogun/MqaT/15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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