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땅 욕심이 없어서 대동강 이남까지만 선 그은 건 아니죠.
상당히 후대인 경덕왕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평양 이남에 도달하더군요.
신라로서는 백제고토의 안정화가 최우선과제였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애초에는 고구려부흥군을 지원하여 이들이 적당히 방패막이만 해 주면 그만이라 생각했던 듯 싶더군요.
아마도 고구려부흥군이 신라의 지원하에 당군을 격파하고 부흥하는데 성공했다면 그걸로 만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라로서는 백제의 장악이 제1의 과제이고
고구려는 적대적이지 않은 완충국가 수립이 목표였던 거죠.
신라가 압록강을 넘어 출병했던 것은 사실 당의 주의를 고구려 방면에 집중시켜 백제의 방어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던 거죠.
그 전략은 100% 성공했습니다.
초반의 패전으로 당은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이고 상당한 전력을 여기에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백제를 지키기 위한 증원군을 보낼 여유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고구려 부흥군은 초전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당의 역공에 연전연패하고 말았죠. 계속 패해 밀려 밀려 남으로 쫓겨나기만 합니다. 결국 거의 괴멸위기에 몰린 고구려부흥군측은 항전파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신라에 투신하게 되고야 만 거죠.
이로써 신라는 북에서 내려오는 당군과 직접 맞서야만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힘겨운 나당대전이 시작되는 거죠.
이 대전에서 신라는 만주로 진출하고 말고 할 여유가 없습니다. 가장 방어에 유리한 선에 방어선을 치고 어떻게든 당의 반격을 막아내야만 했죠. 석문벌회전에서 신라는 초반의 승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치명적 타격을 입습니다. 이에 당에 화친을 요구하는 협상을 하기에 이른 거죠.
하지만 화친협상과 동시에 신라는 더욱더 임진강 방어선을 공고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죠.
당의 공세는 이 강화된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해내지 못하고 끝내 돈좌되고야 만 거죠.
임진강 방어선의 몇개 요새는 공파하는데 성공하지만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실패하죠. 매초성 전투에서 결정적 타격을 입은 후
당은 아예 전진기지를 요동까지 후퇴시켜 버리고 말죠.
아마 군사적 성과만 가지고 본다면 신라가 만주로 진출 못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만... 문제는 그걸 어떻게 유지하느냐입니다.
이건 무리인 겁니다.
신라가 당에 공순해서 북으로 올라가지 않은 게 아닌 거죠.
헌데도 왜 현대인들은 신라에게 그 드 넓은 고구려땅을 도모하지 않느냐고 매도합니다.
영토의 획득이 백지도에 줄 긋고 색칠하는 식으로 되는 줄 아는 어리석은 인간들인 거죠.
신라의 백제영토 안정화는 신문왕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할 수 있겠고, 신라로 내투한 고구려 유민에 대한 안정화는 보덕국을 완전히 소멸시킨 이후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신라는 임진강 이북으로 쉽사리 올라가지 못합니다. 일단 당의 내침에 대비하여 임진강 방어선을 공고화하는 게 제일 순위가 되는 일이고 설령 그 문제가 사라진다 해도 이북지역에 사민하고 행정력을 확보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