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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게시물ID : history_2501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전쟁사매니아
추천 : 10
조회수 : 76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6/01/18 08:03:20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뒤처졌던 신라, 어떻게 살아남았나
신라어떻게.jpg

신라, 마지막까지 살아남다
4세기 말 백제는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392년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압박했다. 이에 맞서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며 병력과 말을 대규모로 징발했다. 그러나 잇따른 군역軍役을 고통스럽게 여긴 다수의 백제 백성들은 신라로 이주해버렸다.
399년,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왜·가야와 동맹을 맺은 백제가 삼국 연합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했다. 대규모 공격에 수도 경주까지 포위당하고 말았다. 신라 내물왕은 급히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듬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5만 명의 군사를 보냈고, 경주의 포위를 풀어주었다. 고구려군은 더 남하하여 가야 지역까지 밀어붙였다. 당시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하던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까지 진출한 것이다.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 대가는 혹독했다. 내물왕은 아들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신라 영토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자기 영토에 침입한 외적을 막지 못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야만 했던 나라, 그 외국 군대가 자기 나라에 주둔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나라. 비참했다. 하지만 힘이 없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꼭 276년이 흘렀다. 자신을 공격했던 백제와 가야, 자신을 구원했던 고구려는 모두 지도에서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가장 약한 신라였다.
 

최후의 승자가 된 신라의 이야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기였다.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했다. 백제는 활발한 대외교역과 높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열등했다. 군사, 경제, 외교, 교역,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뒤처졌다.
신라가 뒤처진 데에는 지리적인 환경도 큰 몫을 했다.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방어는 쉬웠지만 외부로 진출하기는 어려웠다.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도 항상 늦었다. 넓은 평야지대를 가지고 있지 않아 생산력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다.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는 고구려와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신라의 이야기다. 《전략전술의 한국사》(2014), 《나당전쟁 연구》(2012) 등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동안 전쟁사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 이상훈(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연구교수)은 이 책에서 ‘신라는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례를 정리한다.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략전술, 시대 배경과 정치 상황, 위기 대처와 극복 방법, 전투와 전쟁 방식 등을 살피면서 신라의 힘을 찾는다.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현대인들 역시 매일매일 삶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저자의 바람처럼 이 책이 전쟁 같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삼국을 통일하고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의 힘

모든 면에서 군사적 관점이 우세한 국가를 병영국가兵營國家라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이 명명한 개념이다. 신라 또한 일종의 병영국가였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주로 전쟁사 중심으로 신라사회를 살폈다.

지도자의 리더십
병력이 적은 약자가 병력이 많은 강자와 대결할 경우 정면으로 붙어서는 안 된다. 승리는커녕 제곱의 비율로 패배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약자는 강자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강자의 힘을 분산시켜야 한다. 여기에 지도자의 리더십과 전략전술이 가미되면 약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의 일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이 약속한 합류 날짜를 어겼다면서 신라 장수의 목을 베겠다고 했다. 이에 김유신은 부당한 처우라며 반발했고, 부하를 살리기 위해 연합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대장군(소정방)이 황산에서의 싸움은 보지도 않고 단지 기일에 늦은 것만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이 욕됨을 받을 수 없소이다. 반드시 먼저 당군과 싸운 후에 백제를 쳐부수겠소.” 김유신의 강력한 반응에 결국 소정방은 신라 장수의 죄를 없던 것으로 했다.
662년 1월, 소정방이 고구려 평양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식량이 떨어지자 당군은 연합국인 신라에 군량을 요청했다. 신라로서는 적지인 고구려를 가로질러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김유신이 나섰다. 고구려와의 국경인 임진강에 도달했으나 병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배에 오르지 못했다. 김유신은 “제군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여기에 왔는가?”라 말하며 스스로 먼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이를 본 병사들도 김유신을 따라 강을 건너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고, 결국 당군에 군량을 성공적으로 전했다.
유능한 장수는 불리한 전황을 바꾸고 약한 전력이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김유신은 유능한 장수였다. 솔선수범으로 병사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부하를 살리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냄으로써 충성을 유도해냈다. 김유신이라는 지도자의 존재는 신라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시의적절한 전략전술 운용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기본적인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전략상 중요한 곳에는 중앙군을 집중하여 공격하고,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곳은 그대로 방치했다. 당군과의 전면전을 회피함으로써 신라의 군사력이 한번에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다가 당군의 허점이 보일 경우에는 과감하게 공격에 나섰다. 당군에 비해 부족한 병력을 집중해서 운용하는 한편, 당군에게는 지방 성들을 하나하나 공략하도록 유도하여 병력의 분산을 강요했던 것이다.
나당전쟁이 교착상태에 있던 675년 9월, 신라는 설인귀의 상륙선단을 저지하고 매소성에 주둔해 있던 이근행 부대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당군은 서쪽의 토번吐蕃(현 티베트)이 세력을 확장하자 이를 문제 삼아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신라 지도부의 유연한 대처방식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군율의 탄력적 적용
군사조직을 운용하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은 군령과 군율軍律이다. 군령은 실질적인 군대의 운용 및 통솔과 직결되는 지휘, 명령, 감독권 등을 말한다. 군율은 이러한 군령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신상필벌을 가하는 것이다.
662년, 당군의 요청으로 군량 수송을 위해 평양행 길에 나섰던 김유신은 무사히 평양 인근에 도달했다. 하지만 평양 주변으로 고구려군이 적지 않게 배치되어 있었다. 당군과 연락을 취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군량을 수송해 온 상황을 당군에게 알리고, 군량을 전달할 시점과 장소를 협의해야만 했다. 김유신은 보기감 열기를 불렀다. 열기의 관직인 보기감은 신라의 17관등 중 11등 나마에서 13등 사지에 해당하는 낮은 관등이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열기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 때문일까. 열기는 구근과 함께 10여 명을 거느리고 무사히 당군의 진영에 도착해 신라군의 상황을 알렸고, 열기 덕분에 신라군은 무사히 당군에 군량을 전달할 수 있었다.
신라로의 귀환 후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보고하면서 열기와 구근에게 8등 관등인 사찬의 직위를 주기를 청했다. 김유신과 신라군의 공로를 잘 알고 있는 문무왕조차 주저할 정도로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럼에도 김유신은 자신을 숙여 간절히 청했고, 문무왕은 허락해주었다. 공 세운 병사에게 확실하게 보상함으로써 충성을 유도한 것이다.
672년 8월, 신라군은 황해도 석문에서 당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김유신은 살아 돌아온 자신의 아들 원술을 처벌하고자 했다. 김유신은 국왕에게 아뢰었다. “원술이 왕명王命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가훈家訓까지 져버렸으니 참斬해야 마땅합니다.” 이에 문무왕은 “원술은 비장裨將인데, 혼자에게 중한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답했다.
석문전투는 신라의 장수 7명이 사망하고 공격적이던 전술 자체가 방어로 전환될 만큼 큰 패전이었다. 그럼에도 참전한 장수들이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당시 신라는 장수의 처벌보다는 당군의 공격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장수들에게 참수나 제명 같은 중형을 가할 수 없었다. 한두 차례의 결정적 전투가 아니라 장기간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질 경우, 병력과 지휘관 부족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어쩔 수 없이 장수들의 처벌 수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라는 정상을 참작하여 규율 적용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기도 했다.

신라에 대한 왜곡,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나당동맹은 생존을 위한 신라의 선택

김춘추는 백제가 압박을 가해오자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642년 고구려, 647년 왜, 648년 당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고구려와 왜는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김춘추는 당으로 향했다. 서로 입장 차이를 좁히면서 신라와 당이 한반도 문제에 서로 힘을 합치기로 했다. 다음으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이 지원하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가 후원하는 방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다.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의 상황까지 논의되었다. 대동강을 기준으로 이북은 당이 차지하고, 이남은 신라가 영유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각각 백제와 고구려라는 상대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마침내 나당동맹이 성사되었다. 648년의 일이다.
이를 두고 신라가 한반도 문제에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결과적으로 만주의 고구려 영토를 잃어버리게 한 원인 제공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현재적 관점이다.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백제, 당, 왜 모두 외세였다. 삼국이 언어적·문화적·종족적 친연성이 중국에 비해 더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과 같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아직 성립하지 않았다. 김춘추는 신라의 목을 죄여오는 백제의 공세를 막기 위해 적국이었던 고구려로 목숨을 걸고 들어갔다. 이후 전통적으로 백제와 친밀했던 왜에도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하지만 고구려와 왜는 모두 신라를 외면했다. 마지막으로 당을 설득해 나당동맹을 이끌어냈다.
결국 신라는 당과 동맹을 체결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흡수해나가면서 당과의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지켜냈다. 이런 점에서 나당동맹은 고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동아시아 각국의 외교사절로 파견된 김춘추의 대담함과 절실함에 초점을 맞춰 평가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신라의 나당전쟁 승리에 대한 식민사관의 왜곡에서 벗어나야
20세기 초 일본과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를 식민사관에 입각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은 스스로 존재하기 힘들었고, 남의 힘을 빌려 살아야 했다. 항상 강대국의 눈치를 보고 큰 나라를 섬기며 국가를 유지해왔다. 한국사는 중국세력의 남진南進과 일본세력의 북진北進 속에서 부수적으로 존재한 역사다. 이러한 논리가 바로 식민사관의 본질이다.
일본과 중국학계는 나당전쟁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당이 신라 원정을 그만두게 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결국 그 이유로 토번의 성장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의 서쪽에서 토번이 성장했기 때문에 당은 병력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켰을 뿐이다. 나당전쟁은 신라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당이 한반도를 방기放棄했기 때문에 끝날 수 있었다. 이것이 중일학계의 논리다. 여기에서 신라의 역할은 아무 것도 없다. 신라는 당의 심기를 건드려 정벌을 당했고, 토번 때문에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신라는 압록강을 건너 당을 선제공격했고, 8년간 당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국가를 유지했다. 당은 20만 명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했지만, 결국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강력한 고구려는 멸망시켰지만, 약해빠진 신라는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다. 나당전쟁에 대한 인식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맞닿아 있다. 신라의 나당전쟁 승리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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