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기를 끊은 지 열흘째. 외부와 접촉을 꺼린 김학철옹이 무엇인지 결심한 듯 카메라 앞에 앉았다. 조선의용군의 살아 있는 역사요, 옌볜 조선족의 표상인 김옹을 찾아 한마디라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언론인과 학자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집까지 찾아온 기자들마저 며칠씩 기다리다 지쳐 그냥 돌아가게 하던 김옹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서 있는 상황에서, 서울에서부터 그를 따라다닌 비디오 저널리스트 조천현씨의 카메라 앞에서 마침내 무장 해제했다.
85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는 그의 마지막 인터뷰는 인터뷰라기보다 유언처럼 들렸다. 게다가 그는 이미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극심한 호흡 곤란 증세를 겪고 있었다. 한마디 던지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어렵게 또 한마디를 남기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조 : 오늘로 단식 열흘째시라면서요?
김 : 병원이니 주사니 하는 것 다 시시해. (휴-) 자기 한명(限命)을 아는 게 영웅이야, 영웅이라고. 깨끗이 죽는 게 낫지, 지저분하게 사는 것보다야. 자기 한명을 알아야지, 이걸 모르고 얼마나 더 살겠다고…, 난 그런 것 싫어. 노인네가 병들어 누워 텔레비전 보면서 ‘이 약 사와라, 저 약 사와라’ 하는 것, 그게 뭐 철없는 짓이야.
조 :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데요.
김 : 그거 다 속인들이야. 자기 한명을 알면 그대로 깨끗하게 승복하고 가는 거야. (휴-). 게다가 나는 85세야. 부족한 게 뭐가 있어. 우리 집사람하고 55년을 살았어.
조 : 선생님의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김 : 내 생활신조에서 나오는 거지. 병원에 가 7∼8년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해 봤자 결국 죽는 거야. 난 내 장례식에 나랑 가장 친한 사람들로 딱 12명만 모았어. 며느리도 그날 학교 가는 날이면 출근하라고 했어, 학교가!(그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며느리 염리나씨는 옌지 하남소학교 음악교사임).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사필귀정이야. 자기 가족만 생각하지 말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지. 나라가 망했는데 가만있을 수 있나. 싸워야지. 힘이 약하면 힘 닿는 데까지 싸우는 거야. 그러다가 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지(휴-). 그랬다가 남조선에서 진보 인사들을 탄압하니까 평양으로 쫓겨왔지. 거기서 4년 있으면서 김일성이의 온갖 더러운 독재 행태를 보았지. 나는 그동안 김일성을 존중해 왔는데…. 그래서 내가 ‘금슬을 누가 파괴하는갗라는 제목으로 노동신문에 썼지. 결국 신문사에서 쫓겨났고 그때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 거야. 중국으로 망명했어…. 그런데 모택동이의 대약진 때 3000명이 굶어 죽었어. 아무리 ‘모택동 만세’를 외쳐도 이건 말이 안 돼. 그러고서 또 10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왔지. 그 뒤로 계속 나는 반독재 투쟁을 해온 거야. 내 일생은 반독재로 끝나는 거야. 난 죽을 때까지 싸웠어. 죽을 때까지 싸운 거야. 서울 가서 석 달 입원하고…, 이제 죽는 거야.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웠어. 외로운 싸움을 했다고. 나는 굶으면 열이틀이면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며칠 더 가는 모양이야. 할 수 없지. 조용히 있다 죽는 거야. 원산 앞바다 고향 앞바다로 돌아갈 거야. …그런데 힘이 없어.
조 : 지인과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말씀만 해주시죠.
김 : 하려면 이야기가 긴데, 숨이 차 못하겠어. 어서 끝내줘.
조 : 건강하십시오.
김 : 고마워, 다시 만나자.
이것이 김옹과 세상의 마지막 접촉이었다. 다시 만나자던 김학철옹의 말이 이승의 것인지 저승의 것인지는 살아 있는 자들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짤막한 인터뷰가 끝난 뒤 정확히 열하루 만에 김옹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마직막 순간까지 내 할일을 …
집필이나 연구 등 한시라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김옹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커녕 못다한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심정으로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국에서 역사학자 염인호 교수(서울시립대)가 보내온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을 보고 전우의 이름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을 마친 것은 숨을 거두기 보름 전의 일이었다(아래 사진 참조).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작업은 그중 가장 중요한 것에 해당하는 모양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을 번쩍 들어 아들 해양씨가 책상에 옮겨놓자 말라 비틀어진 팔목을 들어 확대경을 들고는 빛바랜 한 장의 사진에서 옛 전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훑어가기 시작했다. 무려 63년이나 지난 사진이다. 그러나 육신이 촛불처럼 스러져가는 상황에서도 김옹의 기억력은 초인적인 것이었다. 90여 명의 조선의용대원 중 얼굴이 가려진 단 2명만 제외하고는 전 대원의 이름은 물론 별명까지 확인해냈던 것이다. 한쪽 다리가 없는 데다 기력이 소진되어 몸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면서 중심을 잡기 힘들었지만 그는 아픈 눈을 비비면서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일을 내가 안 하면 영원히 력사의 퀴즈(수수께끼)가 될 것이야.”
가까스로 작업을 끝낸 뒤 침대로 옮겨지면서 그가 가느다랗게 내뱉은 말이었다.
다시 조선의용군으로
정신적으로 죽음을 준비해 온 김학철옹은 이제 육신마저 죽음과 친구가 되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이발사를 불러 머리를 빡빡 깎아달라고 했다. “나는 이제 전우들이 모두 가 있는 조선의용대로 복귀한다”는 말과 함께. 지금부터 63년 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던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삭발했다. 면도까지 마치자 파랗게 깎인 그의 머리 위에 이제까지 자식들은 물론 아무도 보지 못했던 깊숙한 칼자국이 드러났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휘두른 쇠몽둥이에 맞아 찢어진 자국이었다. 김옹의 머리에 깊이 난 상처는 그 후 성성한 머리카락에 묻혀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훈장이 되었다. 그러나 비로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청년 김학철은 그날의 요동치던 역사로 돌아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간호사를 불러 관장을 해달라고 했다. 곡기를 입에 대지 않았으니 관장을 한들 나올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들 해양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심정으로 김옹의 육신을 정갈하게 비워냈다. 그러고 나서 아들 해양씨는 아버지를 깨끗이 목욕시키기 시작했다. 김옹은 한쪽 다리가 없다. 1941년 일본군과 싸우던 중 부상을 입고 나가사키 감옥에서 다리를 절단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 감옥에서는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상당한 다리를 일절 치료해 주지 않았다. 결국 상처난 다리를 3년6개월간 그대로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 3년 반 내내 다리에서 피고름이 흐르고 상처에서는 구더기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 김옹은 구더기를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내던 역사의 한모퉁이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잘린 다리는 일본 감옥에 묻혀 있어. 그러니 나는 이번에 죽으면 무덤이 두 개나 되는 셈이야,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