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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주민의 눈물…“고향에 가고 싶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과 같은 민간인 폭격이 실제로 일어났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은 인천광역시 월미도 마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집단 희생 되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지금껏 단한차례도 국가의 공식 기관에서 조사되었던 바 없었고, 2006년 피해자들의 신청으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2008년 진실규명하였다.
당시 미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에서는 상륙작전 일반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았으나 인천을 상륙작전의 대상지로 선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특히, 인천에 상륙할 경우 고려해야 할 많은 장애물 중 물리적, 군사적 장애물로 크게 대두된 것이 월미도였다.
즉, 이 작전을 수행할 경우 인민군이 월미도에서 상륙해안 전체를 감제하고 있으며 월미도가 강력히 요새화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남한을 점령한 인민군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예상하여 월미도의 서쪽 절반 월미산 언덕의 상하 좌우의 땅굴을 파고 참호를 만들고 화력을 배치하면서 요새화 하는 일을 서두르고 있었다.
통상 전시에 실행하는 상륙작전의 군사적 목표는 적의 배후를 기습함으로써 심리적 충격을 주는 데 주안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월미도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미군은 9월15일 단번에 기습적으로 인천에 상륙하기를 포기하고 월미도를 완전히 점령한 후에 인천에 상륙할 계획을 세웠다. 월미도 상륙부대 지휘관 시어스 대령의 회고를 보면, 당시 월미도는 미군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점령해야 할 목표지였다.
한편, 맥아더가 상륙장소를 인천으로 선택하자 미합동참모본부가 이에 대해 작전 실행 직전까지 계속 반대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미합동참모본부는 ‘작전 성공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반대했는데, 그 불확실성의 요인 중 하나가 월미도였다. 그렇다면 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이오지마(유황도)전투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상륙작전에서는 예상치 않은 복병에 의해 일시에 많은 병력의 손실이 초래될 수 있으므로 목표지에 주둔하고 있는 상대방의 군사력을 무력화하여 모든 불확실성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작전개념을 수립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미군은 월미도 전체에 걸쳐 인민군의 방어시설을 숨겨주는 은폐물도 없애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이같은 정황에 비추어 “결국 월미도 폭격은 인천의 전방에 위치한 월미도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인민군 방어시설의 무력화의 시도이자, 월미도상륙 준비 함포사격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모든 은폐물을 불태우는 사전작전으로 실행되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 작전에서 월미산 인민군 요새의 뒤쪽 함포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민간인 마을도 네이팜탄으로 불태우는 작전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민간인 희생 고려 않고 ‘집중폭격’
피해자들은 월미도 전체가 온통 폭격 당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네이팜탄이 처음으로 떨어진 지역은 마을의 한가운데인 정용구·노마의 집이라고 알고 있었다. 기총소사를 당한 지역은 주거지와 월미도 둑 부근
및 갯벌이라고 진술하였다. 한편, 미군의 항공공격보고서(Air Attack Reports)에는 폭격의 목적은 월미도 동쪽지역의 ‘전소’ 또는 철저한 ‘집중폭격’으로 모든 시설을 불태우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항공공격보고서에서 언급하는 집중폭격이란 “적이 있는 일정 지역을 목표로 설정하여 집중적으로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것”을 말한다. 그날을 기록한 미국 측의 문서에는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병항공기들은 95탱크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전체에 투하하였다. 그 다음날 항공사진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에서 있는 44개 건물 중 39개가 파괴되었고 거주지역은 완전히 파괴되고 섬의 북쪽은 건물 80%가 파괴되었다. 주기적으로 다음 2일간도 섬의 방어를 약화시키기 위해 같은 패턴의 항공공격이 실시됐다. 그리고 월미도에 상륙 전 폭격이 마지막으로 9월13일 7시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군이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는 집중폭격을 감행하기 전에 민간인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당시의 거주민들의 진술과 문헌자료를 토대로 미군이 피난경고 전단을 살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했다.
남녀노소 불문한 기총사격
폭격이전 월미도 민간인 마을에는 80-90가구가 살았는데 전쟁 직후 피난했던 사람들도 폭격 무렵에는 대부분 월미도로 되돌아와 있었다. 사건발생 이전에도 월미산 서쪽 인민군 요새와 인천지역에는 폭격이 있었지만, 월미산 동쪽 민간인 거주지를 모두 불태우는 폭격이 있은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당일 폭격이 있었던 동쪽 기슭의 인민군 본부와 민간인 거주지는 300M정도 떨어져 있었다. 비행기들은 네이팜탄을 떨어뜨린 후 기총소사를 했다. 폭격이 있으면서 이른 시간에 온 동네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으므로 마을사람들은 잠자다 속옷 바람으로 도피했고 미처 피난을 못 했던 사람은 불에 타 죽었다.
▲ 폭격 이후 월미도 항공사진 |
비행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기총사격을 했다. 주민들은 이 총격을 피하기 위해서 간조 상태의 갯벌로 달아나 개흙을 묻히고 숨었다. 외떨어진 집 몇 채만 남고 동네는 기둥 하나 없이 폭삭 완전히 무너졌다.
실제희생자 100여명 추산
이 집중폭격으로 동쪽지역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본 사건의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10명이다. 실종자 및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하여 진실화해위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 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 명까지로 추산된다.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월미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 하에서 발생했다. 당시 유엔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 했고 월미도는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천의 관문으로서 반드시 무력화시켜야 할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당시 미군은 월미도 동쪽에 민간인 밀집 주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미군은 상륙작전에서 인민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자국 군인에게 큰 피해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모든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작전개념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정부는 ‘모르쇠’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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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은 분명 의의있는 평가이지만서도 그 이면에는 적군과 민간인 구분없이 무리수 써서 폭격가해 민간인들이 폭격에 죽은 흑역사도 존재하죠.. 상륙작전 개시하기 이전에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한 미군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이러한 민간인 피해 역시 심했다는것도...(...)
이것도 한국현대사의 '금기'가운데 하나..
이러한 사례가 2차 세계대전때 유사한 예가 있었습니다.
D-Day 때, 연합군이 독일군의 발을 묶어놓기 위해서 캉(Caen)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습니다.
결과는 첫날 연합군 전사자에 필적하는 숫자인 2,000명의 프랑스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습지요.
한동안 금기시 되는 소재였다가 세월이 흘러 객관적으로 전역을 분석하면서
최근 들어 전사가들이 연합국 폭격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도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