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중국 검색엔진 바이두 수고구려 전쟁에서 강이식 장군님 존함이 나오네요
게시물ID : history_249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0
조회수 : 87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1/15 14:50:32
姜以式 장군이 나오네요...
姜以式 장군님은  진주 강씨의 시조로 고구려 영양왕 때의 장군으로 수문제가 

고구려에 무례한 국서를 보내자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
 병마원수(兵馬元帥)가 되어 5만의 정병을 이끌고 출전해서 임유관에서 30만의 대군을 격파한 전쟁영웅으로 나오는데 

묘소는 만주 심양현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다고 알려져있고

한국에는 경남 진주시 상봉동 885에 봉산사에 영정이 모셔져있어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사를 지내고있죠

진주 강씨의 족보 및 그에 근거한 후대 사료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신채호 선생님의 저서인 조선상고사에 올라와 있는 기록마저도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올라와 있는 기록을 참고하고 있어 

실존인물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암튼 중국 바이두에서 

한문존함을 뵈니 반갑네요

http://baike.baidu.com/link?url=Jrl4ETr6WNedSXQ77OQvNUP0mA6Wome3a93yk6YDRR8InY7X2ArQKabmUmzLCHHCtlqxnhAVRF2Hqsi2TePcNq

隋与高丽的战争

 编辑
隋与高句丽的战争(第二次战争规模:随的纯战斗兵力113万3800,不包括海军等。全部包括大约300万。于是随 VS 高句丽 = 约120万 VS 约35万)发生在598年614年高句丽多次成功抵御隋军攻击,隋军损失惨重。最後高句丽婴阳王请降并将逃到高句丽的斛斯政遣返,隋炀帝撤军,隋国内出现隋末民变后灭亡;在隋炀帝第三次征讨时,高句丽表面上表示臣服,但是却不按隋炀帝的命令入朝,还俘获大批隋人不放还。[1] 
名    称
隋与高句丽的战争
地    点
辽东半岛朝鲜半岛黄海
时    间
598年(第一次)、612年(第二次)、613年(第三次)、614年(第四次)
参战方
高句丽隋朝
结    果
隋炀帝接受了婴阳王的请降并撤军
参战方兵力
隋军113万3800,隋朝民夫两百多万(隋,第一次)[2]  
1百万(隋,第二次) 
100,000(隋,第三次、第四次)
主要指挥官
婴阳王杨广

战争背景编辑

平原王在位早期,高句丽与隋维持着紧张而和平的关系,继北朝之后,受隋文帝册封为“高丽王”。由于此时百济与新罗联盟的早已瓦解,高句丽南部相对平静。586年,平原王将都城由平壤城迁至长安城(即今朝鲜平壤市区),直至高句骊灭亡。历时83年。
隋文帝杨坚建立隋王朝后,北击突厥,南灭陈朝,统一华夏,结束了自西晋以来中国长期分裂的局面。隋文帝采取劝课农桑、轻徭薄赋等政策,促进了社会安定,使农民生产积极性大为提高,社会经济迅速发展,府库充实,国力大增,周边国家纷纷向隋朝称臣纳贡。唯独高句丽对此阳奉阴违,隋文帝遂把目光投向一直未臣服中原的高句丽高句丽且在隋灭陈作战时,高句丽王担心祸将临头,积极备武积粮,就已引起隋文帝极大不满。
西元589年,隋朝分裂突厥,灭南陈统一中原后,周边国家纷纷向隋朝称臣纳贡。唯独高句丽对此阳奉阴违。与隋朝的关系逐渐进入战争状态。590年,高句丽平原王“治兵积谷,为守拒之策”,随时准备迎战隋朝大军。高句丽曾多次小规模袭击隋北部边疆。对此隋文帝很不满并致书平原王高汤,“辽水之广,何如长江?高丽之人,多少陈国?朕若不存含育,责王前愆,命一将军,何待多力!”。平原王接到诏书后不久吓死,高句丽婴阳王继位后的596年,隋朝使者在突厥遇到高句丽在突厥的特使后,隋文帝传书高句丽要求高句丽终止与突厥的军事联盟,停止对隋朝边疆的连年的持续不断的侵袭并对隋朝表示臣服。高句丽婴阳王虽然表面上接受了隋文帝的最后通牒,但第二年,597年,平阳王居然联合靺鞨先发制人攻辽西军事驻地,被营州总管韦冲击退[3]  ,对此隋朝朝野震惊。
隋朝隋朝

第一次战争编辑

信息

日期:598年
地点:
结果:高句丽
指挥官:
(高句丽)婴阳王姜以式
兵力:
隋朝)300,000人
(高丽)约300,000人

过程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