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박춘금은 평생의 ‘동지’인 이기동을 만나게 되고, 이기동과 함께 ‘상구회’를 조직하게 된다. 상구회는 깡패들의 합숙소를 차리고, 한편으로는 사실상 병원 이용이 거의 불가능한 조선인을 대상으로 의료시설을 갖춤으로써 일본으로 건너온 직후 방황하는 조선인들을 장악해 나갔다.
박춘금과 이기동은 곧 일제가 주목하는 인물이 됐다. 그들의 친일 기질을 파악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경찰청장 격)을 지낸 마루야마 츠루키치가 후견인이 됐다. 1921년 상구회를 상애회로 재편하고 오사카, 나고야, 시즈오카, 교토, 도쿄 등 일본 각지에 지부를 설립했다. 박춘금은 상애회의 명목상 회장으로 이기동을 올리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상애회의 실권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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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춘금의 최대 후견인인 마루야마 츠루키치. 훗날 상애회가 재단법인으로 재편됐을 때 이사장을 지냈다./일본어 위키 백과 |
상애회는 출범부터 “민족적 차별 관념 철폐와 일선융화(조선의 일본화)의 철저함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특히 조선노동자를 위한 정신적 교화와 경제적 구제를 도모함을 중대한 사명으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활동은 그들이 선언한 것과는 정 반대로 흘러갔다.
1923년 9월 1일 오전, 일본 간토 지방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12만 가구가 파손되고, 사망·실종자가 4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일본의 피해는 극심했다. 일본 정부는 분노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서 피해가 커졌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흘렸다.
평소 조선인에 대해 민족적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일본인들은 이 유언비어를 믿었고, 경찰과 함께 자경단을 꾸려 조선인 학살에 나섰다. 그 결과 최근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불과 4~5일 사이 무려 2만 3058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학살의 규모가 예상보다 커지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 정부는 9월 5일부터 학살 수습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인들을 급조한 ‘수용소’에 격리시켜 일본 주민과 분리했으며, 시신 처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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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직후 학살당한 조선인들. |
이때 눈치 빠른 박춘금이 상애회원을 이끌고 나타났다. 박춘금은 상애회원 10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당국의 수습작업에 적극 동참했다. 일본으로서는 이처럼 반가운 일이 없었다. 상애회원들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대지진 이후 불거진 민족 간 갈등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일로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 모두 상애회의 활동에 적극 후원자로 나서게 됐다.
상애회는 승승장구를 거듭해 회원 수 10만 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이 됐다.
매년 일본측으로부터 수만 원에 이르는 거액의 후원금과 보조금·저리 융자금을 지원 받았다.
1924년 1월 상애회 본부를 옮길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4만 원의 후원금을 받았는데, 당시 1원이 금 0.5돈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지금으로 치면 30~40억 원에 달하는 정부 후원금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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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직후 학살된 조선인들. 여성은 일부러 하의를 벗겨 놓았다./연합뉴스 |
2. 상애회의 폭력활동
박춘금이 이끄는 상애회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선인 직업 소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사실 이는 상애회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들은 일본 사업가에게 적은 임금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소개시켜 주는 대가로 알선료를 받았고, 노동자에게도 임금의 일부를 받아 챙겼다. 특히 힘없는 여공들의 경우 여공들에게 돌아갈 급료를 전부 횡령하는 사건이 일본 전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당국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상애회에 힘없는 여공들이 대항할 수는 없었다. 일부 여공들이 상애회에 대항하면, 상애회는 여공을 폭행하고 사창가에 넘겼다.
“조선인 문제는 상애회에 맡겨라”
상애회는 각 사업장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역할도 맡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거나 조직이 만들어지면 상애회는 여지없이 개입해 조직을 파괴하고 사업자에게 소위 ‘중재료’ 명목으로 돈을 챙겼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22년~1923년 5월 까지 상애회의 중재 건수가 200건에 달했다. 일본인 사업가들 사이에서는 “조선인 문제는 상애회에 의뢰하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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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애회의 폭력활동은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1924년 하의도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일본인 농장주 도쿠다의 요청으로 박춘금은 상태도와 하의도 주민들을 모아 놓고 권총을 들이대고 무차별적인 폭행을 하면서 강제로 소작계약서에 날인하게 했다.
1928년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재발하자 박춘금은 상애회를 이끌고 주민을 습격해 농민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외에도 1920년대 소작쟁의 곳곳에 개입해 일본인 농장주 편에서 농민을 폭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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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 |
상애회가 숱한 폭력을 일삼고 반민족행위를 자행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도 일부 보도됐다. 1924년 3월, 일제는 일본 내 친일단체를 결집해 ‘반일사상 박멸’을 내건 각파유지연맹을 발족시켰고 상애회도 이에 가입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비판하는 사설을 썼다. 격분한 박춘금은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으로 불러 ‘우리 사업을 방해하는 놈은 죽여 버린다’며 폭행·감금했다. 감금된 두 사람은 ‘인신공격을 한 것은 온당하지 못했다’는 증서를 쓰고서 이틀 만에 풀려났다. 또한 같은 해 1~2월 박춘금은 상애회원을 이끌고 수 차례 <동아일보>를 찾아가 상애회 후원금을 내라며 행패를 부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해외동포 위문금을 모금하고 있었는데, 그 금액이 10만 원에 이르렀다. 박춘금은 그 돈을 노린 것이다.
1928년 하의도 농민회를 박춘금과 상애회원이 습격한 사실이 <조선일보>에 크게 실리자, 박춘금은 일본 경찰 출신 일본인 비서를 대동하고 <조선일보> 한기악 편집장을 감금한 채 권총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날뛰던 박춘금과 상애회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애회 활동에 유일하게 제동을 건 사람은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안희제였다. 박춘금은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조선인에게 도항증명서를 구입하도록 강요했다. 상애회가 발급한 도항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으면 배를 타고 내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에 안희제는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도항증명서의 부당함을 여론화 시키자, 일제 당국은 도항증명서를 폐지하게 했다.
3. 일본 국회의원 박춘금
박춘금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친일활동을 폭넓게 하면서 자신의 정치력을 키워나갔다. 1926년 8월 일제의 팽창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열린 ‘아시아민족대회’에 박춘금은 홍준표, 이기동과 함께 조선인 대표로 참가했다. 그리고 1930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우리의 국가 신일본>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머리말부터 노골적으로 친일적인 색깔을 드러낸다.
“일본인들 호의에 감사”
“우리 조선인이 대일본제국을 사랑함에 어떤 어색함이 있을 것인가. 이 대일본제국의 국부 지존에 대해 받들고 충성을 바치려고 하는 것은 원래 우리의 의무가 아니면 안 된다. 이는 실로 우리의 신조이고 또 감정의 외침이기도 하다. (...중략...) 황국의 은택을 받은 3천 년 충군애국의 지극한 정은 그 생존상 타 민족이 갖는 종교 이상의 약속인 것처럼 보이며, 천황의 은혜와 국가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는 일본 민족으로서는 병합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일선(일본-조선) 관계상 조선인은 진정으로 충군애국의 마음을 품을 수가 없고, 그렇게 부르짖는다 해도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국가 신일본> 머리말 중에서”
일본 내 조선인 차별에 대해서는 전혀 없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나는 조선인 모두가 나와 같지 않을까 한다. 나는 일본으로 온 지 20여 년이 지났고 일본 여자와 결혼하여 일본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굳건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제국 수도의 한가운데서 일하고 있는데 결코 불합리하게 학대(민족적 차별)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다.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무심코 한 행동이 만일에 나쁜 오해를 받을까 또 그 때문에 조선인 전체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세심히 주의하여 겸허한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일본인들이 나에게 주는 호의와 동정이 한층 깊어짐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국가 신일본> 제2장 ‘동화정책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어 이 책은 조선의 독립운동이나 자치운동, 반일의식에 대해 비판하고, 일제 당국이 조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나열했다. 이렇게 공개적인 친일활동을 펴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그는 1932년 3월 제18대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해 당선된다. 조선인 최초로 일본 국회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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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당선 당시 박춘금 모습. 오른쪽은 박춘금의 부인. |
박춘금은 임기 동안 조선에 일본군 사단을 증설할 것과 조선에 중의원 선거를 할 것, 조선에 지원병제도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1933년에는 광산개발에 뛰어들어 평안도, 충청도, 전라남도, 함경남도, 경상북도 등 전국 곳곳에 광산을 경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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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민관 모습. 박춘금과 친일파들은 이곳에서 친일선동연설을 자주 했다. |
“30만 명 학살 계획”
1945년 2월 ‘미영격멸(米英擊滅), 내선단결(內鮮團結), 성전필승(聖戰必勝)’을 구호로 내건 야마토동맹(大和同盟) 이사로 선임됐으며, 대의당을 만들고 당수가 됐다.
1945년 6월 25일 박춘금이 창당한 대의당에는 극렬 친일파들이 대거 가담했으며, 극단적인 내용을 당 강령으로 삼고 있다. 대의당 강령에 따르면 “오등(吾等)은 모든 비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하여는 단연 이를 분쇄하여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비결전적 사상’이란 일본, 한반도, 만주 지역에 반일세력이나 항일세력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들을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춘금은 일제 당국 협조하에 각 지역 반일·항일 인사 30만 명을 체포해 사살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45년 8월 8일부터 전국에서 반일·항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약 3000명이 전국 형무소에 구금됐고, 이들에 대한 총살처분이 논의됐다. 만약 총살처분이 결정나면 박춘금과 대의당원들이 이 일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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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박춘금을 지명수배하고 당시 일본을 통치하고 있던 미 군정 맥아더 사령관에게 박춘금 체포를 요구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얼마 후 해체됨에 따라 박춘금 체포는 이뤄지지 않았다. 박춘금은 이후 재일교포 사이에서 유지로 활동했다. 재일교포 조직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고문을 맡았으며 1957년에 일한문화협회 상임고문, 1962년 아세아상사 사장을 엮임하고 1973년 3월 31일 도쿄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82살이었다.
죽은 후 그의 시신은 경남 밀양시 교동 900번지 선산에 묻혔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1992년 일한문화협회가 박춘금 무덤 옆에 그의 송덕비를 세우면서 사람들에게 이 무덤이 알려졌다.
2002년 경남 밀양지역 시민단체들이 박춘금 송덕비를 깨뜨리자, 무덤에 대한 철거 논의가 일었다. 이때 밀양 동부순환도로에 박춘금 무덤 일대가 부지로 편입됐고, 밀양시는 박춘금의 딸에게 보상비를 지급하고 무덤 이전에 합의했다.
박춘금의 무덤은 2006년 밀양 동부순환도로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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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춘금 무덤 터. 대부분 밀양 동부순환도로(왼쪽)에 편입됐고, 일부 부지만(오른쪽) 남아 있다./임종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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