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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세기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
고대 백제인 들은 4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내해의 ‘난바’(難波) 나루터(難波津, 난파진, 지금의 오사카 난바)로 건너갔다.
그 무렵부터 난바(難波)는 백제인 들의 새로운 개척지가 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이 영국의 ‘요크’(york) 지방으로부터 대서양의 험한 파도를 넘어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새로운 항구를 개척하고 ‘뉴욕’(new york)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듯이, 백제인 들은 영국인들보다 이미 1400년 전에 현해탄의 험한 파도를 건너가 고대 일본 내해의 새로운 나루터를 글자 그대로 ‘난바’(難波, 난파)로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의 오사카 중심지 ‘난바’는 이미 고대 백제인 들의 터전 바로 그 자리다. 오늘의 오사카 중심 번화가다.
고대의 오사카 땅을 백제주(百濟洲, 구다라스)라고 불렀는데,
‘주’(洲)라는 글자는 대륙 또는 국가의 터전 등을 뜻하는 한자어다. 그렇다면 어째서 오사카 지역을 백제 나라로 불렀던가.
▲구다라 대교(백제대교)
오사카 시내에서 백제 즉 구다라(한자어의 百濟, 또는 久太郞) 지명들이 여기 저기 수없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 1,500년 전인 서기 4세기경부터의 일이다. 왜냐하면 4세기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수많은 백제인 들이 백제로부터 일본 규슈며 오사카 땅으로 건너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사카 시내 중심지 일대는 이미 7세기 중엽인 “서기 646년부터 구다라군 즉 백제군(百濟郡)이라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고 사학자 기무라 가매지로(木村龜次郞) 씨는 지적했다(田?百年のあゆみ, 1973).
그 뒤 다시 120년만인 서기 765년의 일본 왕실 문서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에도 백제군()이라는 기사가 나타났고, 일본 왕실 편찬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紀, 797년 일본 왕실에서 성립)에도 서기 791년 조에 백제군이 보인다.
속일본기에는 수많은 백제 왕족들이 백제인 간무왕(桓武, 781∼806 재위)에 의해 항상 조정의 고위 조신으로서 승진하는 기사들로 넘치고 있을 정도로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들에 대한 특대, 특전 사항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어 눈길을 모으기에 족하다.
그런 기사 가운데 간무왕이 “백제 왕족 난파공주(難波姬)에게 정6위상(正六位上)에서 종5위하(從五位下) 품계의 벼슬을 주었다”는 기사도 보인다(791년 1월 9일). 이 대목이야말로 그 당시 백제주의 난파가 전통적인 백제군이며 난파궁(難波宮)은 백제 왕족들의 왕궁이었음을 실감시킨다.
더구나 주목되는 사실은 현재의 일본 도치기 현(木)의 지사(知事)격인 당시의 시모쓰케 태수였던 백제 왕족 준철(俊哲)의 승진 내용이다. 즉 “시모쓰케수(下野守)인 백제 왕족 준철을 무쓰 진수장군(陸奧鎭守將軍)으로 겸임하여 임명했다”(791년 9월 22일)는 기사다.
여기서 ‘무쓰’는 일본 동북 지방(지금의 아오모리 현, 미야기 현 등 여섯 현이 속한 광대한 지역)이며, 그 당시 북해도 지방 등 북쪽의 아이누 족과 일본 선주민들이 결속하여 백제계의 간무왕 정권에 침략 위협을 가했기 때문에 군사적 방위는 매우 중대한 과제였다.
3. 갑자기 사라진 백제의 지명
그 뿐 아니라 간무왕이 백제 왕족들과 더불어 ‘백제음악’ 연주를 듣고, 백제 왕족들(乙叡, 玄風, 善貞, 淨子, 貞孫)에게 각기 벼슬을 올려주었다는 기사(791년 10월 12일)도 주목하기에 족하다고 본다.
그런데 그 후 9백 50년 정도가 지난16세기 말엽에 이르자, 백제주의 바탕인 백제군이라는 오사카의 행정 지명이 느닷없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백제 강으로 불렸던 히라노 강
누가 갑자기 백제군 지명을 없애 버렸는가. 범인은 1592년 4월에 우리나라 부산 땅을 침범하며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 침략을 저지른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라는 것이 추정된다. 왜냐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인 1617(元和 3)년의 고문서에도 백제군이 ‘결군’(缺郡) 되어 그 이름 자체가 행정 지명에서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행이랄까, 그 후에 백제군이라는 본래의 군 행정 지명은 다시 등장했다. 그 경위는 아직 역사 자료가 없어서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그러던 것이 일제의 군국주의 치하가 되면서 또 다시 1889년부터 백제군을 없애 버렸다.
그 후 백제군 지역에 새롭게 만들어진 행정 지명은 남 백제촌(南村) 지역과 북 백제촌(北村) 지역이 남과 북 양쪽으로 나뉘어 오사카 중심 지역에 등장하였다(井上正雄, 大阪府全志, 1922). 참으로 백제 지명은 그처럼 숨 가쁘면서도 끈질기게 오사카 땅에서 맥맥히 이어졌다.
그것이 백제인 들의 은근과 끈기의 강한 뚝심이 아닌가 한다.
물론 이와 같은 ‘백제’(구다라, 久太郞) 명칭들은 역대 일본 정부의 행정 지명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군국 치하에 이르자 우리나라 고대 백제에서 따왔던 ‘남 백제’와 ‘북 백제’라는 행정 지명도 드디어 하나하나씩 행정 지명 그 자체가 제거되기 시작했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백제’ 지명도 하나둘씩 사라지게 되었다.
남 백제와 북 백제 지역이라는 행정 지명이 일제에 의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여 이 고장 오사카 큰 터전의‘백제’(구다라)라고 하는 지명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대로부터 오사카 각 지역에 뿌리박혔던 백제는 오늘에도 끈질기게 그 자취가 살아있지 않은가.
공공기관으로서 대표적인 공립학교 명칭인 ‘남 백제 초등학교’는 오랜 일제 군국 치하를 거쳐 오늘에도 엄연하게 교명을 지키고 있는 게 어쩐지 자랑스럽게만 보인다.
▲‘남 백제’ 지역을 표시한 고대 지도
지금의 오사카 큰 지역은 본래부터 백제인 들의 구다라스(洲)였다고 하는 11세기 말(1098, 承德二年)의 ‘난바팔랑화도(難波八浪華)’를 찾아보면서 오사카 지역이 고대에는 백제 국으로 불렸다는 발자취를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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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seoulstory.kr/story/list/105/1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