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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 이어 <국가와 혁명과 나>를 살폈으면 한다. <국가와 혁명과 나>, 어떤 책인가.
서중석 : <국가와 혁명과 나>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용은 더 많이 된다. 1963년 8월 25일 인쇄라고 돼 있으니, 그해 10월 15일 치러진 대선을 앞두고 나온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경륜이라고 할까 이념을 정리해 대선용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구체적인 수치, 자료를 제시해가면서 5.16쿠데타를 합리화하고 군사 정권의 업적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많다. 그러면서도 이 책 역시 그 핵심에는 박정희 자신의 생각이 적절히 내포돼 있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
서장에는 '국가, 민족, 역사의 명제'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어 있다. 앞머리 쪽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단군 성조 국기를 세운 지 5000년, 이 민족은 겨우 3000리의 좁은 변강 속에서 세계 최후의 순혈 동포이면서도 혹은 분방(分邦) 혹은 상잔을 거듭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두터운 봉건 속에서 빈곤과 나락과 안일 무사주의의 악순환 속에서 분열, 파쟁만을 일삼아왔다."
5000년 역사가 이런 "빈곤과 나락과 안일 무사주의의 악순환 속에서 분열, 파쟁만을" 일삼은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도 식민 사관에서 익히 많이 들었던 얘기다. 그래서 "단 한 번 국가다운 국가를 세워보지 못하였음이 오늘까지 우리 역사이다." 이렇게까지 철저히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야기는 이광수에게서도 안 나온다.
일제 관학자 중에서도 특히 지독한 사람들이나 이런 주장을 했다. 박정희는 그것에 이어서 "생각하면 참으로 곤욕과 혈로에 점철된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면서 우리 역사를 서장부터 아주 부정적으로 봤다.
해방과 독립 운동에 대한 박정희의 편파적 시각
"참으로 한심…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 역사, 차라리 불살라버려야"
프레시안 :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했나.
서중석 : 박정희는 마지막에 가서 식민 사관을 또 거듭 이야기했다. 8장 제목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서장 제목처럼 거창하다고도 볼 수 있다. 1이 서장 첫머리와 같은 내용이다. "5000년의 역사는 개신되어야 한다." 워낙 잘못됐으니까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 할 것이다. 어느 한 시대에 변경을 넘어 타를 지배하였으며 그 어디에 해외 문물을 광구(廣求)하여 민족 사회의 개혁을 시도한 일이 있었으며 통일천하의 위세로써 민족 국가의 위세를 밖으로 과시한 적이 있고 특유한 산업과 문화로써 독자적인 자주성을 발양한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강대국에 밀리고 맹목적인 외래문화에 동화되거나 원시적인 산업의 범위 내에서 단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으며 기껏해야 동포 상잔에 영일이 없었을 뿐", 항상 동포 상잔만 하고 다녔다는 말이다, "고식, 태타, 안일, 무사주의로 표현되는 소아병적인 봉건 사회의 한 축도판에 불과했다."
우리 역사를 이렇게 보고 있다. "이 나라의 역사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이 외세의 강압과 정복의 반복 밑에 겨우 생활 아닌 생존을 연장하여왔다", 이렇게도 이야기했다. "스스로를 약자시하고 남을 강대시하는 비겁하고도 사대적인 사상", 이게 노예근성이라고 표현된 것일 텐데, "이 고질, 이 악유산을 거부하고 발본하지 않고서는 자주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파 상쟁에 관해 "이것은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당파에 대한 역사를 또 썼다. 그러고 나서 요약했다. "이상과 같이 우리 민족 역사를 고찰해보면 참으로 한심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버려야 옳은 것이다."
참 해도 너무한 주장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무리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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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의 경우 박정희가 좁은 시야를 가졌고 식견도 얕기는 했으나, 확고한 주견을 견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국민에게 꼭 알려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을 품고 쓴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갖게 한다. 조력자가 글을 많이 써줬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자신이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이 이 두 권의 책에 잘 표출돼 있다고 본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두 저서에서 일제 식민 사관을, 공공연한 수준을 넘어 자신의 역사관으로 당당하게 강조, 역설하면서 한국 민족을 꾸짖은 점이다.
2014년에 한 총리 후보자가 식민 사관을 피력한 사실이 드러나 단칼에 나가떨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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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그 당시 식민 사관을 지니고 있었던 건 박정희만의 특별한 현상은 아니었다. 역사학계도 초보적인 수준에서 식민 사관을 비판하고 있었을 뿐이고, 대부분의 지식인이 많든 적든 식민 사관에 감염돼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역사학계에서 식민 사관을 비판하고 있을 때에도 인접 사회과학 교수나 지식인 중 상당수가 식민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난 의아해한 적이 많았다. 사실 그런 현상이 굉장히 심했다. 서울대에서 그런 교수들을 보면서 '저 교수들은 왜 저러나' 하는 생각을 1960∼1970년대에 참 많이 했다.
그런 속에서 1950∼1960년대 술집 같은 데에서 '우리 민족성이 글러먹었다'느니 '조선놈은 노예근성을 가졌다'느니 하면서 떠드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저작 같은 걸 통해 공공연히 식민 사관을 적극적·긍정적으로 얘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으로 민족의 지도자를 자임한 사람 아니었나. 그런 박정희의 두 저서에서 일제 관학자들이 주장하고 조선총독부나 군국주의자들이 견지·선전·홍보했던 논리, 한국인을 열등시하면서 주장한 식민 사관이 얘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것을 박정희 자신의 역사관, 정치 이념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데 이 두 책의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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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2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