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쯤이면 전국의 학교들이 시험기간에 접어든다. 그건 우리 학교 또한 마찬기지였고 오늘, 즉 셋째날 시험이 끝난 뒤 나는 일찌감치 집으로 향했다.
다른 친구들은 나와 다르게 대부분이 PC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이면 시험이 끝나기도 할 뿐더러 보는 과목 자체가 다소 만만한 축에 속했기 때문
이다. 하굣길에 교복을 입은 사람이 나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되자 곧장 집으로 향하는 나야말로 특이한 놈이라는 걸 실감케 했다. 하지만 다른
애들과 같이 PC방에 가봤자 만년 동메달리스트인 난 애들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겨우 쌓아놨던 우정 마저 뭉개뜨릴 수 있는 폭탄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이번에 참가할 공모전 작품의 플롯과 방학을 맞이한 기념으로 곧 한달짜리 스트리밍을 결제할 애니플러스의 애니 목록을 되뇌이고 있었다.
"야!"
멀리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고민도 없이 부름의 대상이 어째서 나였는지 알 수 있었냐면 이 곳엔 지금 나밖에 없거니와
이 목소리의 소유주가 누군지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목소리의 출처가 시야에 들어오자 난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간만"
"올"
"뭐가 올임 ㅋ"
2년 전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꽤 친했던 친구가 나를 부른 것이었다. 현재는 고교평준화의 룰렛 덕분에 각기 다른 색깔의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게 안타까운 사실이었지만.
하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로 반가울 따름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카톡으로만 얘기를 나누던 상대를 직접 보게 되다니.
그나저나 인상이 많이 변했다. 2년 전에도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얼굴임에는 분명했으나 이젠 귀에 피어싱도 뚫고 머리도 염색한 것이
소위 말하는 일진을 연상케 했다. 이 녀석 성격상 남을 짓밟는 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여자애 한둘 울리는 것은
기본에 물건을 빌려가면 여러 이유를 대며 돌려주지 않다가 결국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양아치로 보일만 했다. 나도 처음엔 그런 의심을
안한 것은 아니었으나 5분 정도 길을 같이 걷다 보니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서로의 집 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5분 남짓 정도, 우리는 근처 슈퍼마켓에서 으리를 외치며 메로나 한 쌍을 산 뒤 각자의 방법으로 메로나를 먹으며
걷기 시작했다. 이 때 메로나를 어떻게 먹어야 하냐는 빨먹(빨아 먹기), 깨먹(깨물어 먹기)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엔 메로나가 아이스크림의 진리라는 것으로 합의를 보기로 했다.
그러던 와중에 이야기의 핵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니코니코니~"
순간 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가방을 메고 있었기 때문에 시원한 바람이 등에 닿을 리도 없었고 메로나는 다 먹은지 오래여서 그 단맛을 최대한
잊지 않기 위해 막대기를 빨아 먹는 노릇이었다. 내가 순간의 시원함을 느꼈던 이유는 녀석의 니코니코니 때문인 게 분명했다.
"ㅁ,뭐야 그게 ㅋㅋ"
반쯤 내려간 안경을 도로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세며 어조며 분명 러브 라이브의 그것이었다.
"너 페북 안하냐?"
이런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이 녀석이 깜짝 덕밍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한창 페북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니코니코니, 녀석은
유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페북 안해"
"뭔 재미로 사냐"
"퍼거슨이 한 말 못 들어봤냐"
어째서 남정네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유행을 따른 행동이었으므로 신경 쓰지 않는 척 했다. 그러면서도 진짜로 주위 사람이
이런 걸 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로 니코니코니가 유행하고 있기는 하구나라고 생각했다.
"니코니코니~"
"아, 그만 하라고 ㅋㅋ"
하지만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니코니코니를 연발했고 뱃속에 메로나 녹은 물만 들어있던 난 단맛이 나는 녹즙을 토해낼 뻔 했다.
녀석의 얼굴이 아무리 잘났다 해도 내가 여자가 아닌 이상 남자새X의 니코니코니를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녀석은 제풀에 지쳐 니코니코니를 그만 두었고 나는 들끓는 배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또..
"야, 너 은혼 보냐?"
"어?"
내가 애니를 보는 건 아는 녀석들에 딱 세명 밖에 없다. 그 세명 마저도 이 녀석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고 말이다. 헌데 이 녀석은 내가 덕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듯 애니 관련 질문들을 좔좔 내뱉었다.
"어..뭐.. 봤어"
그래도 은혼 정도라면 남자들이 한두번 쯤은 볼 수 있었던 애니라고 생각해 봤다고 대답했다. 예전 학원에 다녔을 때 잘나가던 아는 형의 가방에서
은혼 만화책을 무더기로 발견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거기서 ㅇㅇ편 재밌지 않았냐?"
내가 녀석의 말에 긍정하자 녀석은 한껏 신이 올라 은혼에 관련된 여러 얘기들을 꺼냈다. 어리둥절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애니 얘기를 해보는 것도 간만이었기 때문에 나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은혼 관련 지식들을 쏟아 놓았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 중 몇개는 녀석은 긴토키의 버릇 중 하나인 딸기우유 홀릭을 동경해 유유 중에서도 딸기우유만 마시고 있다는 점과 동란편에서 오키타 소고의 폭풍간지에 반해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 그래도 덕후는 아냐"
니코니코니(유행이라지만)에 이은 은혼은 녀석을 덕후로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난 스리슬쩍 녀석에게 덕후 아니냐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하지만 내 질문의 대답은 위와 같았다. 일코를 하는 녀석들 중 흔히 하는 대답이 바로 이 말이었으나 나 또한 일코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서로를 위해서 나는 질문을 여기서 끊었다. 하지만 녀석은 덕후가 아니라는 말과 달리 간접적으로 자신이 덕후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있었다.
"너, 데스노트는 봤냐?"
"너, 코드기어스는 봤냐?"
데스노트야 한때 열풍이 있었다 쳐도 코드기어스는 적당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이 녀석은 단순히 잘생긴 덕후였던 것이다.
난 데스노트는 긍정하고 코드기어스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의 일코를 지켜내었다.
"코드기어스 꼭 봐. 데스노트랑 비슷한 건데 주인공 머리 엄청 좋아"
녀석은 은혼 때와는 달리 데스노트에 관한 얘기 없이 단순히 코드기어스를 내게 추천할 뿐이었다. 마침 내용도 다 잊어 먹었는데
재탕이나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몇층 사냐?"
"15층"
"오.. 꽤 높네"
나와 녀석의 동행은 이렇게 끝나는듯 싶었다.
"야, 간만에 봤는데 우리집까지 같이 가자"
"내가 왜"
"별로 안걸려 바로 옆 단지야"
녀석은 내 팔을 잡아 끌며 같이 가기를 청했고 나는 몇분의 실랑이 끝에 녀석의 말에 따라주었다. 그 몇분의 실랑이 동안 걸어 갔으면 녀석은 벌써
집에 도착했을 테지만 어째선지 그러지 않았다. 애니 얘기가 통하는 사람이랑 만난 게 그렇게 기쁜가 싶었다.
녀석의 집에 거의 당도했을 즈음, 녀석은 예고도 하지 않고 하이라이트 포를 쏘았다.
"야, 너 클라나드 알아?"
클라나드, 보는 족족 눈물을 뽑아내고 인생이라는 수식어까지 붙는 그 애니를 녀석은 말하고 있었다. 아까 녀석이 했던 덕후가 아니라는 말은
완벽하게 그 의미를 상실했다.
"그게 뭔데"
"애니"
"또 그거냐?"
"야 이건 아까랑 말했던 거랑 클라스가 다르다. 진심 꼭 봐야 하는 건데.."
"뭔 내용인데"
난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 그니까...."
녀석은 클라나드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 불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애니플러스에 있는 애니들을 보면서 겸사겸사 명작이라는 클라나드를
보려고 했던 내 방학의 계획은 녀석의 스포일러로 얼룩져 버렸다. 스포를 당한 나는 마음 속으로 클라나드를 다본 사람 마냥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슬픈 내용이긴 하네. 근데 너 그거 보고 울었냐?"
클라나드를 본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는 게 전통이라고 하기에 녀석에게도 그런 류의 질문을 해보았다.
"아니, 울뻔 하긴 했는데 안울었어. 내가 워낙 감정이 메말라서.."
녀석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우시오가 죽는다고 말할 때의 녀석의 입가가 떨리는 걸 보았다. 하기사 일반인에게 애니 보고 울었다고 말하는 건
나라도 싫은 일이었다.
"쉬었다 갈래?"
"됐어. 잘 가"
"어"
2년 만에 만난 녀석과의 대화는 고작 10분이 조금 넘었지만 그보다도 강렬할 수가 없었다. 내 주위에도 덕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기도 했고
저 녀석 정도의 비쥬얼이면 덕후에 관한 선입견을 부숴버리는 좋은 예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녀석과 다시 한번 만나 일코를 벗어던진 채 이런 저런 애니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난 녀석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보며 후회 섞인 한마디를 읊조렸다.
"카우보이 비밥 추천해줄 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필력 향상 겸 써보는 얘기긴 한데 이거 오늘 제가 겪었던 진짜 겪었던 일이에요.
뭔가 상황이 비현실적이어서 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