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사관·동북공정 주장과 상통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공식 간행한 <중국역사지도집>에 만리장성을 표시해 놓은 지도가 실려 있다. 거기 표시된 현재의 만리장성 동쪽 끝은 알려진 대로 요동반도 건너편 발해만 연안 산해관이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의 굵은 점선, 곧 중국인들이 오늘날 주장하고 있는 옛 진나라 축조 만리장성 원형이라는 게 그려져 있다. 그 동쪽 끝은 요동 북부를 포함하고 압록강 하류를 지나 한반도 북부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다.
사마천의 <사기> 하본기는 “낙랑군 수성현에 는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는 ‘태강지리지’ 얘기를 전하는데, 그 낙랑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이라고 비정(比定)한 사람은 실증사학을 내건 이병도였고 그것이 한국 주류 사학계의 정설이 돼 있다. 그런데 그건 이병도의 독창적인 학설이 아니다. 그 전에 일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소속 일본인 연구자 이나바 이와기치가 <사학잡지>에 실은 ‘진장성동단고(진 만리장성 동쪽 끝에 대한 논고)’라는 글에서 그렇게 주장했고 이병도는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이병도는 나름대로 근거를 대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황해도 수안군 산천조의 “요동산. 고을 동북쪽 4리에 있는 진산”이라는 구절의 요동산을 별다른 근거없이 갈석산이라며, 그곳 석성이 바로 만리장성의 일부라 주장했다
. ‘재야’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이병도가 황해도 수안(遂安)을 낙랑군 수성(遂城)현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오직 “수(遂)자가 같다는 것뿐”이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한나라가 “패수(浿水)에 이르러 (고조선과) 경계를 삼았다”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 패수가 압록강이라고 한 사람은 일본고대사 연구의 제일인자요 일제 식민사학의 비조 쓰다 소키치(1873~1961)였다. 쓰다의 충실한 사도 이병도는 한술 더 떠 패수가 청천강이라고 했다.
이병도는 한나라가 고조선 멸망 뒤 설치한 군현, 곧 한4군 중 대방군이 한반도 황해도였다며 기상천외한 입증방법을 동원한다.
예컨대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 속현으로 기록된 ‘둔유(屯有)현’이 황해도 봉산군 대방군 북쪽에 있는 황주라 단정하면서, 그 근거로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조에 나오는 황주의 옛 고구려적 이름 동홀(冬忽), 또는 우동어홀(于冬於忽) 중 우동어홀의 중간 두 글자 ‘동어’와 ‘둔유’의 “음이 서로 근사”하다는 황당한 증거를 댔다.
이런 비정인지 억지인지로 횡재한 쪽은 중국이다.
그것은 결국 한4군이 오늘날 경기도 북부까지 포함하는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얘기고,
그것은 진의 만리장성이 한반도 내륙까지 뻗쳐 있었다는,
한반도 상당 부분이 옛 중국땅이었다는 그들의 주장, 동북공정 사관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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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5383
중국 갈석산에서 '조선(朝鮮)'을 찾아라
[중국발품취재 26] 창리 갈석산과 친황다오 해변▲ 갈석산 입구ⓒ 최종명▲ 갈석산 암석에 그린 서예들ⓒ 최종명
중국 역사학자들도 갈석산이 어디인지를 놓고 허베이[河北] 창리와 랴오닝[辽宁] 씽청[兴城]으로 의견이 갈리다가
1980년대 중반에 발견된 멍쟝먀오[孟姜苗]에서 나온 기록에 근거해 창리가 진정한 갈석산이라 결론이 났다고 한다.
멍쟝먀오에서 발견된 돌 비석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전국을 순행하는 도중 다녀갔다 하고 한 무제 역시 기원전 110년에 '태산부터 바다를 따라 동진하다가 갈석에 이르렀다(行自泰山, 复东巡海上, 至碣石)'고 한다. 서기 207년 위 무제인 조조(曹操)가 지금의 차오양[朝阳] 지방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갈석산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 또한 여러 번 갈석산 관창하이[观沧海]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 갈석ⓒ 최종명갈석산은 중원 땅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 역사에서 동북쪽 끝이고 경계를 상징하는 산이라 볼 수 있다. 많은 중국의 황제들이 갈석산에 올라 자신의 영토를 만끽하는 기분을 느끼던 그런 곳이라 보면 될 듯하다.
...............▲ 갈석산 정상에서 바라본 전망ⓒ 최종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