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견해로 봤을 때 이병도에 대해 그나마 객관적인 평가를 한 것 같아 퍼왔습니다.
두계 이병도와 실증주의 사관 - 박현배
한국 역사학계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인물이 이병도 선생이다. 일제 시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역사학계의 중심 인물로서 한국역사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 70년대 재야 사학의 주장 이후 많은 사람들은 역사학계를 불신하고 있는데,이것은 기존의 역사연구가 식민지 사학과 연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하지만 역사학계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병도 선생과 실증주의 사학에 대해서 정리 하고자 한다.1)
이병도 (李丙燾,斗溪,1896-1989)
그는 94세의 장수를 하면서 근 70년간 연구 활동을 보여 주었다. 조선 시대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우봉 이씨의 후예로서 그는 6세부터 훈장을 초빙하여 한학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12세에 집안이 서울로 이사하였는데,이 시기부터 그는 신 학문에 눈을 떠 보광 학교와 불교 고등학교를 다니고 보선 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졸업 후 가족들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와세다대학 예과를 거쳐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1916~1919) 2) 그는 요시다의 일한고사단에 자극을 받아 한국사를 전공으로 택했는데 그의 수업을 1년 동안 들으면서 "일본사람이 우리 역사를 이렇게 많이 아는데 한국인이 자기 역사를 몰라서야 되겠는가"하는 생각에 한국사를 전공으로 한 것이다.
이병도의 문헌 고증학은 스승의 영향이 컸다. 와세다 대학의 쯔다와 그의 소개로 알게 된 도쿄제대 이께노우찌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그는 일제 시대에 조선인 중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역사 연구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던 인물이다.
조선사 편수회와 진단학회
그는 1919년에 귀국하여 그의 와세다 대학 1년 선배이던 최두선이 교장으로 있던 중앙학교에서 7년간 역사를 가르쳤다.특히 이께노우찌의 권유와 추천으로 그는 1925년에 설치된 조선사 편수회에서 촉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해방 직전까지 20년간 이 일을 맡으면서 규장각의 도서를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이것은 그가 연구에 몰두 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조선사 편수회의 성격을 알고 있었더라면,촉탁을 거절 하는 것이 오히려 학자이며 지식인이던 그가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는 처음부터 역사를 순수 학문적 연구에서 시작하였기에, 더욱이 한국사의 선택은 일본인 학자와 학문적으로 경쟁한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조선사 편수회의 활동은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제 될 일은 아니지만 결국 이것이 해방 후 그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1934년에 진단학회가 창립되고 진단학보가 창간하였다. 이 시기에 이병도의 뒤를 이어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상기, 이상백, 손진태 등과 경성 제대 출신 등이 합류하여 진단학회가 출발하였다. 당시 사회경제주의 사학을 이끌던 백남운, 이청원 등의 사회경제주의 사학 및 민족주의 사학과 경쟁할 학회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또한 일본어로 작성하여 일본 학회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도 비판을 받을만한 소지가 있었기에 이병도는 진단학회를 설립한 것이다.
진(震)3) 이라는 고유의 국명과 단군의 단(檀)을 합해서 진단학회라고 이병도가 이름을 직접 지었다. 최초의 학술 전문지이던 진단학보는 '조선 및 인근 문화의 연구'를 표방하면서 '조선문화를 개척.발전.향상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30년대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벌인 문화운동과 궤도를 같이 하였는데 비슷한 계열의 언론사이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 환영을 받았으며 일제의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으며 1942년 자진 폐간할 때까지 14집의 학보를 발간하였다.4)
실증주의 사학이란?
실증주의 사학은 사료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벗어나 치밀한 문헌 고증을 통해 한국 역사를 복원하는데 주력하였다. 역사연구에서 사관과 이론을 배격하고 합리적인 사료 비판과 해석을 강조한 학풍으로,주로 일본에서 유학을 다녀온 출신들에 의해서 확립된 사학이다.
일제 시대에 등장한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 사학과 고증주의를 표방한 일본 역사학계의 관학 아카데미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병도는 실증주의 사학의 중심이었다.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 출신인 그는 일제 시대부터 진단학회의 대표를 맡는 등 많은 활동을 보여 주었으며 해방 후에는 남한 역사학계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실증주의 사학의 한계
이병도는 신채호,정인보 등 민족주의 사학 계열에 대해서 계몽기의 역사학으로 비판하였다.근대 역사학의 시작은 실증주의 사학 계열로 생각하여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역사학이 민중을 선도하고 계몽하는 차원이 아니라 순수학문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 정인보나 사회경제주의 사학자들은 이병도를 비판하였는데,이청원은 진단학보 4권에서
"그러나 그와 동시에 좋지 못한 결과도 산출하였다는 것을 조금도 숨겨서는 아니된다. " 사회적 운행을 초월한 순수사유’니 ‘순수한 개인의 자기사상’이니 하는 따위의 ‘늘 점진적으로’라는 기분좋은 선율(멜로틱)에 나아가는 관념적 사관으로 이 나라의 젊은 연구자들에게 소화불량의 결과를 주었다는 것이 즉 그것이다".5)
이청원은 실증주의 사학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즉,실증주의 사학의 한계는 사관의 부재에서 나왔던 것이다.더욱이 시대적 상황은 역사학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기였다.일제 시대에 역사를 통해서 조선 민중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깨달음을 주어야 할 시점에서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대부분 방관론자 입장이었다.
너무나 순수하게 역사를 봤다는 것이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이다.결국,실증주의 사학자들은 출발부터 명확히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비판과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 사학은 구체적 연구방법, 철저한 문헌 비판과 고증을 통해서 역사학을 학문으로 승화시켰다는 점,한국 역사의 상당 부문을 규명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후대 재야 사학에 의해서 식민지 사학의 아류라고 평가절하를 당하는 것도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이라고 볼 수 있다.당대 민족주의 사학이나 사회경제주의 사학 역시 현실과 일정 부문 괴리가 있었던 점을 인정할 때 실증주의 사학만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기자 조선과 한4군
기자 조선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병도가 그 허구성을 폭로하기까지 1000년간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13세기 후반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기자 조선을 언급하면서 20세기 초까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사람들은 받아들였다.오히려 조선 시대에는 일찍부터 고대 중국인이 조선에 와서 교화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대주의 사상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연구한 사람이 이병도였다.그는 중국과 한국의 사료들을 수집한 후 철저한 문헌 비판과 연구를 통해서 기자조선설을 검토하였다.그리고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기자 조선의 주체는 여러 모로 보아 기자와는 상관이 없는 우리 토착사회의 민족으로,아치 후에 말할 위만의 경우와 같이 지금의 요동방면에서 아사달로 침투하여 아사달 사회의 지배민족을 남쪽으로 몰아내고,대신 이 사회의 지배세력민족으로 등장한 것으로 해석한다..."6)
이병도가 기자조선의 허구성을 증명한 후,기자조선설은 우리 학계에서 사라져 버렸다.이러한 이병도의 노력은 당대 사회경제주의 학자들도 인정하였는데 사회경제주의 계열인 김태준은 <<진단학보>>에서
"...이병도의 <삼한고(三韓考)>는,조선후(朝鮮候) 준(準)을 그대로 한준(韓準)이라고까지 부를는지는 의문이라 할지라도,고조선의 해명,기자전설의 정체 폭로에 많은 공적을 끼친 논문일 것이다..."7)
" ...씨는 제 1권에 진국(辰國)과 삼한과의 관계를 논할 제 중국 문헌에 나타나 진국관계 기사를 검토하여 진국의 강역에 신탁견을 세워 종래의 관학(官學) 제공(諸公)의 왜곡시킨 주장을 일축하여 버린 것은 시원하다면 시원한 일이다..."8)
한 4군의 위치 비정은 지금도 논란이 많은 주장이다. 한 4군의 허구성부터 시작하여 요동설과 평양설 등 여러 주장이 있지만 이병도는 한반도로 비정하였다.9)
물론 한 4군 중에 낙랑.현도.임둔의 위치에 대한 고증은 조선 후기 남인 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하나 진번의 위치는 새롭게 비정하였다.즉,진번을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으로 비정한 것이다.
이병도는 이 외에 삼한론에 정열을 쏟는 등 한국고대사와 고려사 연구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물론 그의 한 4군과 삼한론은 후대 재야 사학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게 되지만 말이다.
이병도의 한4군 및 삼한도
독주 시대
해방 후 이병도의 활동은 위축되었다.특히 진단학회에서 친일파 제명운동 사건으로 이병도는 학회의 위원장을 맡지 못했다.하지만 6.25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6.25 전까지 역사학계는 실증주의 사학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사학,사회경제주의 사학이 함께 하였다.
이들은 각각의 시각 속에 서로를 비판하며 의견 수용을 통해서 발전하였다.하지만 6.25 이후 이러한 모습은 막을 내렸다.국가 정책으로 반공주의가 우선시되면서 사회경제주의 사학은 사라져 버렸으며 민족주의 사학 계열 역시 학맥이 끊어져 버렸다.
물론 사회경제주의 사학자들은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다.드디어 동 시대를 이끌던 세 학문 중에 실증주의 사학 하나만 남게 되었다.결국 살아남은 사학의 중심이던 이병도가 한국 역사학계를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하지만 그의 연구를 비판하고 의견을 교환할 학자가 없었다.불행이 시작되었다.
최고의 역작 '한국고대사 연구'
1975년 이병도는 그의 고대사 연구업적을 정리한 '한국고대사 연구' 저서를 출판하였다.모든 역량이 투입된 저서였기에 그는 연구 성과에 자신만만 했다.
"....各論文(각논문)의 대체적인 圖說(도설)에는 再考(재고)의 餘地(여지)가 없다고 自信(자신)하고 있다.간혹 世間(세간)에는 이러한 圖說(도설)에 대해서 反對(반대)를 試圖(시도)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나,反對(반대)를 하기 위한 反對(반대)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反論(반론).反駁(반대)에는 충분한 論據(논거)와 理論(이론)이 서야 한다..." 10)
총 8편으로 구성된 한국고대사 연구는 고조선.삼한.삼국시대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치밀한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된 역작이었다.물론,40년간 연구의 집약물이기에 이 저서는 이병도에게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저서일 것이다.
한편으로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그에게 이런 서두를 쓰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70년대에 등장한 재야사학은 기존의 역사학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당시 일부 재야사학의 주장은 비판 차원을 넘어서 실증주의 사학을 식민지 사학의 아류로 매도하였다.
여기에 민족주의 사학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기에 언론과 유신정부까지 가세하여 재야 사학은 큰 힘을 얻게 되었다.결국 이병도는 실증주의 사학을 더욱 옹호하는 입장을 유지했으며,계몽적 성격에 가까운 재야사학의 주장보다는 자신의 연구방법과 결과물이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결국 충분한 논거와 이론이 있는 반론이 있더라도, 이병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장과 달리 실증주의 사학의 독주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70년대 인류학이 한국의 역사학계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다양한 역사학의 방법론이 등장하였고 고고학의 연구 성과는 문헌사학이 주축이 된 역사학계 주류의 의견과 상충되는 부분이 발생한 것이다.
완벽한 연구성과는 없다?
그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였다.그의 유명한 삼한론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대체하기 때문이다.이미 삼한론에 대한 비판과 여러 의견은 많기에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대신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덧붙여 그의 주장을 피력한 풍납토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이병도는 '제 7편 백제사상의 제문제' 에 덧붙여 풍납토성이 백제의 초기 도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였다.그는 그 예로 조선식의 도성을 들었다.즉,고구려나 백제의 후기 도성, 신라 등을 들면서 풍납토성이 이원적 방어체제가 아니라는 점과 풍납토성은 평지이고 토성이며 산악의 배경이 없기에 불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그는 풍납토성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성으로 설정한 것이다.
여기에 그는 언어적 연구까지 덧붙여 지명의 변천으로 그의 주장을 증명하고자 하였다.결국 그는 풍납토성을 교통의 요지를 방어하는 하나의 중요한 백제의 진으로 보았다.한편으로 풍납토성을 백제도성으로 주장하는 이들에게 삼국사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했다고 주장하였다.
자신 역시 풍납토성에서 실지조사를 하였기에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고 못 박았다.하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은 2000년도에 들어와서 빗나간 주장이 되어 버렸다.풍납토성의 발굴 결과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었으며 이 곳이 백제 초기의 위례성일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그리고 풍납토성은 이원적 방어체제를 가진 도성이었다.
"...이들 고대 중국의 도성제도는 풍납토성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國內城)의 초축(初築)은 기원 전후에 흙으로 쌓았다고 한다. 백제 초기의 문물제도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풍납토성과 그 주변의 백제 유적들은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과 그 주변 유적과 좋은 비교가 된다. 백제도성을 중심으로 왕릉급에 해당하는 고분들이 흩어져 있고, 비상시 대피할 수 있는 몽촌산성(夢村山城)이 존재하고 있는 모습이 국내성 부근의 환도산성(丸都山城)의 경우와 거의 일치한다. 국내성 역시 강을 낀 평지성이다. 서울 백제 500년 수도를 사실(史實)로 인정하여 백제 역사가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라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역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11)
동일한 성터를 고고학자인 이형구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이것은 바로 문헌학자와 고고학자의 차이하다.당연히 이병도는 문헌학자로서 고고학 연구 부문에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병도의 연구와 실증주의 사학의 의의
이병도12)의 역사 연구와 실증주의 사학은 처음부터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혼돈의 시대 속에서도 그는 나름대로 역사연구에 매진하고 노력하였다.이병도의 연구 성과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역사학을 근대적 학문으로 끌어올리고 한국사에 기여한 이병도의 노력은 인정 되어야 한다.
역사 연구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한다면,이병도의 여러 주장은 인정 할 수 있다.그의 주장 위에 새로운 의견이 덧붙여 국사학은 발전하는 것이다. 요즈음 인터넷을 중심으로 국수주의적 요소가 강조되면서 기존의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폄하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이고 있다.
이들은 우리 것이 최고라는 배타적 생각 하에 ,사료에 대한 기본적인 해석 능력과 비판 등을 상실 한 채 팽창주의와 폭력주의에 열광하는 모습이다. 무분별하게 어린 학생들까지 동조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된다.후대의 연구가 항상 선대보다 앞선다는 보장이 없듯이 지금의 인터넷 모습을 보면서 이병도와 실증주의 사학은 우리에게 역사연구에 있어 다시 한번 생각할 점을 던져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