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한국의 현대 사학사상'으로 되어있는데 읽고 보니 6.25 이전의 얘기네요.
한국의 현대 사학사상〔槪說〕
한국의 역사학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에 의해서 근대 역사학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들이 보여준 역사 서술이나 역사의식은 우리 역사학의 소중한 성과였고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을 성립시키는 데 있어서 이들은 정신적 지주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의 근대 역사학이 1930년대와 40년대에 이르러서는 커다랗게 변모하고 또 다양해지게 된다. 이 무렵이 되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역사학도가 배출되고 급격하게 변동하는 사회사상 속에서 일정한 역사관을 지니고 등장하는 역사가를 볼 수 있게 된다. 역사학계는 이제 정통적인 역사학의 계승 위에서 새로운 역사학으로 성장한 바 있는 민족사학 이외에도 랑케류(流)의 실증사학의 사풍(史風)을 띤 실증주의 역사학과 일정한 역사관에 의해서 전역사를 체계적으로 계통지으려는 사회경제사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민족사학의 계통에는 신채호와는 그 입장을 다소 달리하여 한국 고전의 출판과 함께 계몽사학의 활약을 하다가, 일관된 사학정신을 상실한 뒤 실학시대의 백과전서파적인 박식으로 돌아가 버린 최남선을 들 수 있다. 한국의 문학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최남선의 업적은 그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란 논문 속에서 가장 뚜렷이 표명되어 있다.
그 외에도 민족사학의 계열에 서는 역사가는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중추적인 기능을 한 것은 정인보(鄭寅普)였다. 그가 본격적인 역사연구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1930년대의 일로서, 그 연구의 결정으로 <조선사연구>가 간행되었다. 정인보와 동학(同學)으로서 민족사학의 사풍(史風)의 또다른 일면을 개척하고 있었던 사람은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을 저술한 안재홍(安在鴻)이며, 정인보나 안재홍과 동시기에 문일평(文一平)은 민족사학의 또 다른 일면을 담당하고 나타났는데, 그의 <호암전집(湖岩全集)>은 민중의 계몽 및 역사의 대중화라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서술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들의 학문적인 계통을 계승하여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결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려 한 인물로서 1940년대에 활약하게 되는 손진태(孫晋泰)·이인영(李仁榮) 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학문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민족사학에 속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러한 인원으로서 짧은 기간에 그들이 거둔 성과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민족을 수호하고 민족정신을 고양(高揚)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고,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결하는 역사관을 확립하여 우리 역사를 굳건한 터전 위에 체계화하는 공적을 남겼다. 또한 그들의 역사의식은 일제 침략기의 역사가가 지닐 수 있었던 최선의 역사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역사 서술 또한 근대 역사학의 과학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민족사학자들이 40년대까지에 도달했던 역사서술이나 역사 인식의 수준은 높았고 그들이 지향하고 있던 역사연구의 방향은 오늘날에도 지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세계사와의 관련속에서 포착하였고, 세계사적인 역사 발전의 여러 단계에 입각하여 연구 작업을 하거나 그것을 우리 역사에 도입하여 적용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사회발전의 이론을 우리 역사의 체계 속에서 적용시키려고 한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그들은 요컨대 우리 역사의 주체성을 확립시키려 하였고, 나아가 세계사와 관련된 보편성과 개별성의 조화를 의식하고 있었다.
흔히 민족사학의 역사 서술을 비과학적이라든가 또는 치졸하다가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는 민족사학에 대한 본질적 평가가 아니고 부분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다. 그러나 민족사학의 긍정적인 면에는 아직도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사학이 그들의 식민정책을 이용하려 했던 정치성 이론이나 타율성이론을 과학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점과 한사군 문제에 대한 실증주의 역사학의 고증과 식민사학의 고증을 또한 극복하지 못한 점이다.
한편 이 시기에는 민족사학과는 달리 랑케사학의 방법을 배운 실증사학자들이 등장하여 문헌고증적인 학풍을 수립했다. 일제시대의 실증사학이라고 하면 곧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연상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진단학회가 조직된 것은 1934년의 일로, 이들과 사회경제사학 및 민족사학과의 관계를 분석하면 실증사학의 본질이 대개 드러날 수가 있다.
먼저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진단학회의 기관지인 <진단학보>를 일단의 발전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반면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즉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진단학회를 굳이 말을 만들어 붙인다면 순수사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질의 학문활동을 하는 학회로 보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실증사학을 한 마디로 사관(史觀)이 없는 연구단체로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진단학회는 사회경제사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용납할 수 있는 여지로 그러한 비판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면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 개재한 대립은 팽팽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민족사학과의 관계이다. 진단학회의 발기인 명단에는 문일평이 나타나는데, 그러나 이로써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할 수 없음은 정인보의 실증사학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곧 정인보는 현재의 문헌에 전하지 않는 민족사적 진실도 찾으려 했기에 일본 학자들을 추종하는 일본 유학 출신의 학자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런가 하면 실증사학자 또한 민족사가들의 역사학에 만족하려 들지 않았고 그 학문적 성과를 높이 평가(評價)하지도 않았다. 이상 실증사학과 민족사학·사회경제사학과의 관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실증사학은 기성사관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기피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들은 일정한 기성사관보다는 구체적인 역사 연구를 통해서 일반적인 것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적인 사실(史實)을 통한 일반화 작업이 한국사 내지는 역사 전체를 통관(通觀)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관이 없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실증사학은 또한 가정된 공식이나 법칙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역사 연구의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들은 반드시 세계의 모든 민족의 역사를 살펴야만 일반적인 법칙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일개인이나 한 민족에서도 일반성은 추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실증이 마치 실증사학의 전유물(專有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오이며, 그것은 역사적 일반의 기초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실증이 곧 역사학 자체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실증사가들은 개개의 사실 위에서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는 작업에는 별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실증이란 무수한 구슬은 꿰어지지 않은 채 굴러다니게 되었고, 이것이 저간(這間)의 한국 현대사를 혼미(混迷)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랑케류의 실증사학과 병행하여서 이 시기에는 사회경제사학이 또한 발달하였다. 사회경제사학이라고는 하지만 이에 속하는 모든 역사가들이 반드시 한결같은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의 후반기에서 30년대에 걸쳐서는 식민지 착취의 가중과 경제공황의 물결에 편승하여 사회주의 사상의 발달과 노동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조는 역사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회경제사학에서의 역사 서술의 특징의 하나는 개개의 역사사실에 관한 고증적 연구를 떠나서 전체 사회경제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의 형태를 취하는 점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백남운(白南雲)이었다. 백남운의 대표적인 저술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上>(1937)가 있다. 그는 원래 방대한 한국사회경제사를 완성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종래의 한국사 연구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그 중 근대사학에 대한 비판에서 그는 민족사학을 일제관학자들의 그것과 아울러서 특수사관으로서 비판 배척하였다. 그는 외관적(外觀的)인 특수성과 일원론적인 역사법칙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고, 역사의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일원론적인 역사법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 서야만 일제하의 위압적 특수성에 대해 절망을 모르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식민사관과 민족주의사관 즉 소위 그가 말하는 특수사관을 비판하고 그 대신으로 받아들인 일원론적 역사발전 법칙이란 곧 유물사관의 공식이었다. 그리고 이 공식을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사적인 발전과정에 비추어서 한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 세계사적인 발전법칙이냐 하는 데에 있다. 그가 주장한 세계사적인 발전법칙이란 유럽사(史)의 발전 법칙이 기준이 된 것이고, 이 점은 그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문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는 서구사회의 발전법칙과는 또다른 아시아 제국(諸國)을 염두에 두고 발설한 것 같으며, 이 점은 한국사에도 적용되어 한국에 있어서는 봉건사회의 특수성, 곧 아시아적 특수성을 말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곧 그의 소위 일원적 발전법칙과 정면으로 배반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상에서 그의 역사학적 체계는 구체적인 연구에 입각한 귀납적인 것이 아니라 법칙의 일방적인 적용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세계사적인 법칙이란 것은 좀더 다른 각도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법칙만이 역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다원적인 법칙들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양면을 가지고 포용되고 해석되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특수성이란 그 민족의 구체적인 사실(史實)에 입각해서 이해되고, 그런 이해가 그 민족의 역사인식의 종합적인 토대가 될 때 역사의 다양한 측면이 폭넓게 전개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