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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시절 잘나가던 친일 사학자들 신석호, 이병도...
게시물ID : history_247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3
조회수 : 1439회
댓글수 : 51개
등록시간 : 2016/01/06 13:4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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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박정희시절 유사역사가 어짜구 하는데

제가 볼땐 박정희시절엔 

누구나 인정하는 친일 사학자들인 

신석호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1930년 ~ 1937년)와 수사관(1938년 ~ 1940년)
고려대학교에서 20년간 교수로 일하다가 1966년에 정년퇴임한 후, 
1966년부터 1970년까지는 성균관대학교에서 문리대학장을, 
1971년에서 1974년까지는 영남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
국사관장(1946년 3월 23일 - 1949년 3월)을 역임
국사편찬위원회(1949년 3월 - 1965년 2월) 문교부 장관 겸직 위원장을 역임)

 이병도
(
 1925년 8월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修史官補)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 류)을 도와 수사관보로 일함
이후 조선사편수회에서 퇴사하고, 임시직인 촉탁으로 해방까지 일함
1945년 경성대학의 교수
1954년 5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1956년 김창룡의 묘비명 작성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959년에는 종신회원
1957년 5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Research Council of Havard Yenching Institute)의 이사,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장
1959년 3월에 학술원 종신회원,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
1960년 4월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
196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
1963년 6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에 재선 7월에 율곡기념사업회 이사장에 피선. 10월에 3.1문화상 심사위원장.
1964년 4월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피선 ,7월에 학술원 회장에 3선, 11월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4선
1965년 4월에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취임. 9월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원장
1968년 학술원 회장을 5선
1970년 2월에 민족문화추진회를 재단법인으로 개편 발족하면서 이사가 됨
1970년 4월에는 '삼국유사영역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이 되어 박준선, 성낙훈, 이팔범, 정인섭, 진인숙 등 위원과 함께 삼국유사 영역사업을 시작
1975년 10월 성균관대학교 이사에 취임
1976년 학술원 회장 8선~ 이후 1980년까지 회장
1977년 5월 11일 고전국역의 종합심의기구인 교열위원회 위원장
1981년 학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
1982년 2월 22일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1988년 4월 1일까지 재임하면서 고전국역자 양성과 고전국역 사업을 전개
1984년 다산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취임)

같은 분들이 제일 잘나간거 같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5.16쿠테타 이후 독립유공자 선정과 표창를 하면서 독립군출신들을 평가하지...주류사회의 온갖 좋은것들은 다 누리지...

거꾸로 흔히 말하는 민족사학계열에서 이정도로 활동했으면 주류와 비주류가 바뀌었을지도...라는 생각이..ㅋ.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40610120004531

"우리 친일 사학자들이 독립유공자를 심사하겠습니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41]친일파 신석호,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영화 누리다 .........

◈ 친일파 신석호, 이병도와 함께 독립유공자 심사에 나서다



↑ 친일사학자 신석호. 일제 때는 일본에, 해방 후에는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붙어 천수를 누린다.

< 장면 1 >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은 단 2명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승만이 쫓겨나고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인 1962년, 
군사정권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선정과 표창에 나섰다.


공적조사위원회에 참석한 김승학, 김학규, 김홍일, 오광선 등 평생을 조국 해방에 바친 독립운동가들은 깜짝 놀랐다.

천하가 다 아는 대표적인 친일 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떡하니 심사위원실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분노한 어느 독립운동가가 일갈했다.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뭐 암마?"

두 사람은 얼굴만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웃기는 것은 그 망신을 당하고도 두 사람은 계속 공적심사위원회에 기웃거렸다는 사실이다.

다음 해에는 신석호가, 1968년에는 두 사람 다 참석하고, 1980년에는 신석호가 끈질기게 끼어들었다.

1982년부터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 전해에 신석호는 사망하고, 이병도는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져서 불참했다고 한다.


...............

↑ 고려대학교 총학생회가 친일인사 10명의 명단을 발표하는 동안 학생들이 이름과 경력이 표기된 피켓을 들고 있다


...
2005년 3월 28일 고려대 총학생회 산하 일제청산위원회는 '민족 고대'를 더럽힌 학내 친일잔재 명단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기자회견에서 "일제에 편승해 매국 매족했던 이들이 해방 후에도 호의호식하며 기득권을 누려온 역사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보성전문학교 교장, 고려대 총장, 교우회장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배신한 자들의 면면을 찾았다. 앞으로 연구 조사를 통해 대학 내 (친일) 인적 잔재와 학문적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강조했다.

제자들이 민족의 혼을 좀먹은 스승들을 내치는 장면이다.

선정된 친일파에는 신석호와 이병도를 비롯해 고원훈, 김성수, 선우순, 유진오, 이각종, 장덕수, 조용만, 최재서가 선정됐다.

제자들이 발표한 스승 신석호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수사관 등으로 활약하며 일제의 역사왜곡, 식민사관 구축에 동참, 협력했음.

(특징) 해방 후에도 국사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




↑ 식민사관 확산에 광분했던 조선총독부 건물. 한민족의 맥을 끊기 위해 정문인 광화문을 앞으로 밀어내고 많은 궁궐의 건물을 허문 자리에 세웠다.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제공)

3.1운동 직후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이 중국에서 저술한 < 한국통사 > 와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가 국내에 유입되자 일본총독부는 당황했다.

이에 따라 부랴부랴 준비작업을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발족했다.
처음에는 일본인 학자들로만 출발한 조선사편수회에 경성제국대학을 갓 졸업한 식민사학자들이 한명씩 두명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5명,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홍희 등이 그들이다.



↑ 식민사학의 요람 경성제국대학의 전경. 조선사편수회의 손과 발 역할을 할 친일사학자를 꾸준히 공급했다.

↑ . 해방과 함께 고물상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우리 교과서로 스며든다


...........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 사학자들이 뿌린 식민사학의 망령은 아직도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다.
그들이 반민특위 해체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한국사를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신석호와 이병도를 사랑하는 제자로 여겼던 황국사학자 쓰다 소키치나 이케우치 히로시가 해방 후 그들의 활약상을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역시 "한민족의 민족성은 강자에는 굴종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그 반대이며, 거기서 노예적 근성이 보인다"고 흐뭇하게 웃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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