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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역사
게시물ID : history_247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fro
추천 : 2
조회수 : 64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1/05 23:5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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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보니 대학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서문부터 술술 읽혔고 흥미로웠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혁명(+쿠데타)의 시대를 지나온 이다.

학생 때는 4.19를 봤다고 한다.

그 후로도 교수로서 대학가에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맞아,

자연스레 대학이 무엇이고, 어때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더 잘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대학사 연구가 잘 이뤄지고 있는 옥스퍼드에서 1년 동안 연구했다.

그리고 뻔한 결론을 도출했다.

진리를 추구하고, 인간을 만들며, 전문가를 양성해내는 것.

내가 좋아하는 얘기이긴 하지만,

학생운동을 보면서 연구를 했다고 하길래,

학생운동 얘기가 많이 나올 줄 알았다.

나오긴 하지만 무지 적다.

애초에 할 얘기가 별로 없다.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항상 의식하고 있다는 티는 난다.

학생과 학교의 관계라든지, 학교와 교수의 관계를상술하고 있다.

 

전체적인 느낌을 말해보겠다. 일단 엄청나게 재밌는 책은 아니다.

‘대학(University)’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야 재밌을 책이다.

이 책은 고리타분해 보이는

중세 대학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래도 나에겐 상술된 내용 하나하나 새로운 것들이 많았다.

대학이 아랍으로부터 받은 영향,

전설의 CC,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

대학생들은 음악을 꼭 배웠다는 것, 기숙사의 역사,

옛날에도 술 먹고 주인장과 드잡이하던 일이 있었다는 사실 등등.

이런 사실을 중심으로 한 챕터, 한 챕터 요약하는 일도

꽤 유의미하면서, 분량이 꽤 될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대학사를 재밌게 쓰려고 노력한 기색이 역력하다.

대학교 탐방하고 느낀 것을 중간중간 곁들였다는 데서 그의 노력을 알 수 있다.

철학과가 아니라면 맨 뒤 결론도 한 번 읽어봄직하다.

철학도라면 꽤 시시한 내용일 수 있겠으나,

‘자유’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엿볼만하다.

저자는 ‘대학의 자유’를 끈질기게 논하지만,

자유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어쨌거나 나는 ‘대학의 자유’라든가, 구체적인 내용은 가능하면 빼고서 요약했다.

 

1. 대학 이거 언제 생긴겨?

중국의 학파들(유가, 도가 등)은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자기 스승의 나이를 계속 높게 잡으려 했다고 한다.

그들이 경전으로 여기는 책도 다른 학파의 경전보다 더 유서 깊다고 주장함으로써

모종의 권위를 내뿜으려 했다.

때문에 공자보다 노자가 늙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도 의심해 볼만하다.

이게 중국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보통 유수의 대학들은 자기들 역사가 천 몇 백 년쯤 되는 것으로 자부한다.

성균관대가 지들이 몇 백 년 됐다고 자부하듯이 말이다.
(성대생께 죄송.)

그러나 실증적으로 따져보면 그렇진 않단다.

대학이 꽤 오래된 교육제도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오래되진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대학들이 확실히 생긴 시점을 콕 집어 말하기엔 힘들다.

어느 대학이나 ‘형성’(이 표현에 담긴 의미는 아래에서 서술하겠다.)됐기 때문이다.

어느 단계를 대학이라고 규정할지도 애매하다.

저자는 나름대로 자율성을 확보한 순간부터라고 보긴 하지만.

이 기준에 근거해서 대학이 생긴 시점을 대충 12세기 말~13세기 초라고 어림잡는다.

이는 최초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볼로냐 대학이 생긴 시기이기도 하다.

 

2. 어쩌다 생긴겨?

볼로냐만 보면 University가 애초에 College에서 시작됐다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수도원도 뭣도 아니고 전문대에서 종합대가 나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근대에 등장한 민족 개념을 고대사에 적용하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듯,

전문대, 종합대의 구분법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구분법인데도 이렇게 말하는 것 역시 우스운 일이다.

그래도 나름 쉽게 이해하시라고 이렇게 써본다.)

전문대라고 그냥 전문대는 아니고 법학전문대, 로스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볼로냐라는 도시가 원래 법률가들이 많았던 도시라고 한다.

때문에 길드 같은 체계를 가진 법률가들끼리의 조합이 있었으며,

도제처럼 예비 법률가가 양성됐다고 한다.

그러다 여러 조합들이 차츰 하나로 묶였고 때문에 Universitas가 등장한 것이라고 한다.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는 대학에만 국한해 사용된 말이 아니며, 조합 일반을 가리키던 말이라고 한다.

즉, '대학이 보편적인 학문을 탐구하는 곳이라서 대학이다.'라는 주장은 역사적으로나 어원적으로

무의미할 수 있는 말이다.


이는 또한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비로소 앎을 가져다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대학이 수도원에서 나왔다는 게 편견이라면 편견이다.

물론 이 편견 역시 모르는 사람이 꽤 많지만.

파리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을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볼로냐의 사례를 보면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다.

요새도 우리는 가운을 입고 졸업식에 임한다.

이는 확실히 카톨릭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방대한 문헌을 참고한 저자는 볼로냐 대학을 다루며 수도원 얘기는 꺼내질 않는다.

 

더불어 대학이 형성될 때의 구체적인 상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대해 회의를 가진 사람들,

‘방랑하는 지식인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신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위험한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대학 형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을 거라고 보긴 힘들지만,

그런 사조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아둘만하다.

경제적 상황도 봐야 한다.

농업 생산력은 커져 인구를 증가시켰다.

상업도 발달해 도시를 출현시켰다.

도시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다.

유통이 용이한 도시로 많은 물자가 집결됐고,

일 안 해도 돈만 있으면 도시에서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그리고 도시 내에서 발달한 수공업자, 혹은 상인의 길드의 전통은

생각보다 더 사회적 영향력을 떨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도시 내에서 대학이 본 딸 수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길드가 유일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특히 볼로냐 대학의 형성과 관련해서

꼬뮌(파리 꼬뮌이 유명하지만 '꼬뮌'은 중세에도 있었던 자치 도시민을 지칭한다.)

대립하는 볼로냐 대학의 모습을 그려준다.

혹자는 위의 사실을 언급하며 대학이 원래 도시적 현상이라고 정의하는데,

볼로냐 대학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대학이 도시적이라는 말은

이렇게 보면 맞고, 저렇게 보면 또 틀리다.

볼로냐는 법률가의 도시이면서 또한 일찍부터 자치를 시작한 도시였다.

그 당시의 자치란 교권이나 속권 모두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어 일정한 지역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와 동시에 볼로냐 시는 그 지역 주민에게 시민권을 주었고,

그 지역에 들어오는 이방인과 다른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볼로냐 대학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일차적으로 이방인이었다.

꼬뮌 당국은 이들을 차별하며 프로불편러로 거듭나게 했다.

꼬뮌과 마찬가지로 대학도 자치의 이념을 고수하려는 집단이다.

더군다나 법을 주로 배워서 그런지 학생들은 지들의 권리를 확립하려 했다.

때문에 지들 조합을 만들었고, 이를 ‘동향단(同鄕團)’이라 한다.

비유하자면 한국의 ‘향우회’ 느낌일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단체였고, 교수들은 이로부터 배제됐다.

엉뚱하지만 살짝 ‘스즈란’이 생각나기도 했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겠지만 꽤 큰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총장인 ‘렉토르’도 동향단 가운데서, 학생 가운데서 선출됐다.

즉, 호남 향우회, 충청 향우회처럼 이들은 출신지역에 따라

볼로냐 시민과 차별받지 않기 위한 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꼬뮌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이 노력이

그들을 대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게끔 했다.

이렇게 대학의 자치를 강조하는 논지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건 그냥 법률만 공부하면 됐지,

왜 굳이 귀찮게 신학, 의학, 인문학까지 볼로냐가 다루게 됐냐는 질문에

답할 게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이나 파리 대학은

각각 수도원, 대주교 성당학교와 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대학이 수도원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주장을 상대하는 건

‘대학이 카톨릭과 생각보다 그리 큰 관련은 없다.

오히려 대학을 만든 것은 자율에의 의지다.’라고 주장하고 싶어서다.

때문에 저자는 카톨릭에 대학이 어떻게 저항하는지 보여준다.

수도원으로부터 나왔더라도 옥스퍼드는 이후에 교권과 척을 진다.

일차적으로 성공회의 창립이 직접적으로 보여주듯,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반교권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또한 일찍이 옥스퍼드가 ‘빨간 책’인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탐독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는 선총회, 흑색총회, 소총회 등의 회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며,

지금의 총장에 해당하는 챈설러라는 직위에 권력을 집중시킴으로써

교황뿐만 아니라, 왕과 관계하며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했다.

 

파리 대학은 일단 속권이 대학에게 우호적인 상황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프랑스 왕은 학문을 진흥하려는, 유별난 사명을 띠고 국가를 운영했다.

이 때문인지 파리 시민들도 볼로냐의 꼬뮌처럼 이방인들을 사납게 대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학생들에게 기본적으로 살가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센 강 주변에 우후죽순으로 여러 학교들이 생겨났고,

이 학교들 중에서 대주교 성당 학교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대주교, 그리고 그가 임명한 챈설러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학교들 사이에 체계가 형성됐다.

그러나 저자는 이 체계를 대학이라고 보지 않는다.

대주교가 챈설러를 조정하며 교수들의 교육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자

성이 난 교수들은 길드를 만들어 교권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대학은 진정 대학스러워졌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이후에는 명과 청 사이의 밀당을 이용했던 광해군처럼

파리 대학도 교권과 속권의 대립을 이용하며 메리트를 챙겼다.

 

결정적으로 수도원은 닫힌 공간이고, 대학은 애초에 열린 공간이라는 데서

수도원으로부터 발전했더라도 수도원과는 크게 다른 교육 기관이다.

물론 학생이 되기 위해서는 돈이 많아야 했지만.

그때의 교통비, 옷값 등의 비용은 농노 같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저자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대학의 모습을 부각시키지만

금수저만 들어갈 수 있었던 사실은 애써 숨기는 느낌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건,

수도원은 드나드는 데 엄격한 제한이 있는 공간이었으며,

그 안에서도 질문과 토론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세 시대를 싸잡아 암흑기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은 드나드는 데 금전적인 제한밖에 없었고,

자유로운 토론이 한바탕 벌어졌던, ‘상대적으로’ 열린 공간이었다.

 

한 가지 더 강조하자면 저자는 계속해서 중세 대학이

‘설립’됐다고 표현하지 않고, ‘형성’됐다고 표현한다.

이 말은 대학 외부의 주체,

예를 들어 교황, 영주, 왕 등이 일방적으로

대학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초기 대학인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에 있어서는 말이다.

외부 세력이 세운 대학마저도 초기의 형성된 대학을 참고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방랑하는 지식인들, 길드의 전통을 강조하며 그는

대학이 ‘형성’됐다고 표현함으로써 대학이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도 대학은 수도원과는 크게 구별되는 교육기관이다.

 

3. 그래서 대학이 뭐라고? 혹은 어때야 한다고?

어찌 보면 (중세에 대해 향수를 느낀다는 점에서)낭만주의적인 대학관에는

여전히 한 가지 장애물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학이 그저 엘리트 양성소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관점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대학을 졸업한다는 의미는 저학년 때 인문학을 배운 다음,

신학, 법학, 의학 중 하나의 학위를 따서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학생들 다수도 사제, 법률가, 의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들어왔다고 한다.

어쩌면 자유로운 토론도 그저 엘리트로 진출하기 위한 과정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대학사 연구자들도 이 질문을 중요하게 다루나 보다.

‘래시덜’이니, ‘카우프만’이니, ‘데니플레’니 하는 사람들은

일찍이 치열하게 대학이 뭔지에 대해 논했다.

클라센이라는 학자는 진리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수도원에서 잘 실현될 수 있었을 거라고 보며,

대학이 하필 도시에서 생긴 이유는 그 당시 사회적 수요 때문이라고 본다.

맑스주의 사학자들 역시

대학은 그저 지배계급의 끊임없는 재생산을 위한 기관일 뿐이라고 본다.

 

그룬트만이나 페루올로 같은 사람은 이런 주장에 반대한다.

그룬트만은 일단 법학도들이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배웠다는 데 주목한다.

이 법전은 그 당시 유효한 법전이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반문한다. 그딴 거 왜 배웠겠냐?

세속적 이해와 떨어져 ‘법’이 뭔지를 고찰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더군다나 수도원과 달리 대학은

진리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조금 더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꽤 많은 대학인들은 기성 질서에 저항했으며,

하필 배울 필요도 없고 배우는 데 위험도 따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탐구했다는 건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성찰하려고 했다고 말하게 한다.

 

저자는 이 논쟁이 쉽사리 종결될 수 없다고 본다.

두 주장에는 모두 허점도 있고, 강점도 있다.

저자는 대학에는 두 가지 면 모두가 있다고 주장한다.

교육 기관 주제에 천 년 가까이를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왜인가?

이는 사회적 수요를 지속적으로 충족하면서

지배층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했던 면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대학 졸업자가 지배층이 됨으로써 다방면으로 대학의 뒤를 봐줄 수도 있었으니

대학이 그토록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교권이 강할 때는 교회법을 탐구하는 법학도가 많았고,

속권이 강할 때는 로마법을 탐구하는 법학도가 많았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어찌 됐든 대학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이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 그들은 인문학 공부를 그토록 오랫동안 했을까?

뒤에 서술되지만 법학으로 가든, 신학으로 가든, 의학으로 가든

인문학부에서 4년 내지 6년을 있었다고 한다.

실용적인 필요 때문에 왔어도 그들은 인문학을 공부해야만 했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그들이 나아갈 길이

인문학적 소양 없이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나아갈 길 때문에라도 진리를 궁금해 해야만 했다.

나아가 그들의 정치적 노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자치를 향한 그들의 의지는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에서

각각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분명하다.

볼로냐에서는 학생들의 동향단을 통해, 파리에서는 교수 조합을 통해,

옥스퍼드에서는 챈설러를 통해 그들의 의지를 드러낸다.

강력한 교권, 역시 강력한 속권과의 끊임없는 갈등이 대학사에 점철되어 있다.

 

4. 내 생각

요새는 야스퍼스의 ‘대학의 이념’을 읽는 스터디를 시작했다.

그는 서문에 이렇게 쓴다.

“대학은 재단, 과거의 자산권, 국가 등에 의해서도 설립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설립되었든지 대학은 이제 하나의 독립된 자치단체이다. 

초기의 대학은 교황의 교서, 황제의 칙령 

또는 영방국가의 법령에 의거해서 공식적으로 인가되었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초기 대학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초기 대학은 출발부터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집단이었다.

만약 야스퍼스가 이를 알았다면 ‘설립’이나 ‘인가’에 주목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앞으로 펼칠 그의 논지를 위해서라도 그는 ‘형성’을 먼저 언급했을 수 있었다.

대학은 오래됐지만 대학사를 다루게 된 건 100년이 조금 넘었다고 한다.

대학을 바깥에서 바라보려는 것, 대학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두 텍스트 모두를 참고해봤을 때, 꽤나 참신한 것일 수 있겠다.

내가 적어도 졸업할 때까지 할 작업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스터디를 진행하던 시기에 나는 종교경제학이라는 분과학문에 흥미를 붙였다.

종교경제학은 경제 논리에 물든 종교가

어떤 식으로 사회와 상호작용하는지에 주목한다.

그런데 김항섭 교수는 ‘종교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종교경제학과는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관점을 통해 종교경제학에 깔려 있는

주류경제학적 관점, 혹은 속류경제학적 관점,

즉, 신자유주의적 관점을 경계한다.

물신 숭배(Fetishism)는 사회 현상 일반에

자유시장경제의 논리를 적용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물신 숭배에 관한 종교학,

종교경제학이 아닌 경제종교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주장을 상기하면, 우리는 종교경제학을 통해

확실히 교회의 기업화를 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경제종교학을 통해 기업의 성전화(Templization 혹은 Churchification)를 고찰할 수 있다.

취준생들은 성공의 복음을 찾아 대기업의 신입사원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취준생들은 어쩌면 대기업에서 구원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지리멸렬한 가난의 대물림으로부터 해탈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은 방대한 경전일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성공을 위해 하나하나 행동양식이 적혀 있고,

사람들은 이를 알아서 체화한다.

시무식, 종무식 등의 행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종교의례와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난폭하게 주장하면, 회식도 굉장히 빡센 종교의례일지도..?)

이건희는 박근혜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며,

심지어 신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렇게 교조, 교단, 교리, 의례를 모두 갖춘 체계가 종교라고 안 하면 뭐라 해야 할까?

나아가 살아 있는(어떤 분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리까리한 상황이지만)

교조를 중심으로 수직적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명(順命)’의 원칙을 지속적으로 내면화한다는 점에서,

이 집단을 카톨릭과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시 대학 얘기로 돌아가 보자.

왕권과 교황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대학의 모습이 중점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당시의 왕권은 오늘날 국가와 대응될 수 있겠다.

실제로 엘리아스 같은 학자는 성공적으로 폭력을 독점한 왕정으로부터

강력한 국가가 등장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면 교권에 대응되는 오늘날의 세력은 없는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대기업들이 하나하나의 교권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중세의 왕과 교황처럼 밀당을 극렬하게 하진 않지만,

어쩌다 한 번씩 국가가 기업 고위 간부들을 철창에 넣고,

동시에 떡값도 받아먹고, 기업이 조세포탈도하고,

국가가 공장부지 같은 것도 챙겨주고 하는 것 보면

밀당이 없는 것 같진 않다.

물론 그 밀당으로부터 대학이 뭔가를 얻어낼 수 있는 여지는 없어 보인다.

대학에 대해서는 국가와 기업이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기업은 산학협력이라는 미명 하에 대학에 직업 교육을 맡기고,

각종 신기술을 개발하게 하면서도 장학금도 주고 여러 가지 한다.

국가 또한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교수 강의권도 침해하지만,

장학금도 꽤 두둑이 챙겨주긴 한다.

그리고 국가와 기업의 간섭은 서로에 의해 지지받는다.

 

파리 대학을 다시 보면, 파리 대학이 얼마나 교묘한 외교를 펼쳤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외교가 가능했던 건 교권과 속권이 어느 정도 비등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필리프 4세)가 교황(클레멘스 5세)을 새로 앉힐 수 있는 힘까지 갖자,

대학은 선택지가 좁아졌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줄 타던 광해군의 노력도

청이 명을 완전히 압도하면 쓸모없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후로는 왕정이 하라는 대로, 더 이후에는 국가가 하라는 대로

학문을 하게 된다.

지금과는 약간 달라 보인다.

기업에게 국가가 완전히 먹혔다고 볼 수도 있지만,

꽤나 비등한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대학에 대해서는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세와 달리 현대 대한민국의 대학을 둘러싼 권력 지형은

대학과 관계하는 두 축 중 한 축이 사라짐으로써

대학이 탈탈 털리는 상황이 아니라,

두 축이 거의 한 축이 되어 대학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이 있다.

대학에 대한 국가의 간섭은 우리나라의 경우 유별나다.

http://heinrich0306.tistory.com/287

외국의 대학과 우리나라 대학의 총장 선거 방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김무성이 수원대에 자기 딸 교수로 꽂은 것만 봐도..)


그리고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일 텐데, 내가 보기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적극적이면서도 간접적인 간섭을 행하고 있다.

바로 의무교육을 통해서다.

중세에는 대학 가기 전에 국가가 딱히 교육을 책임지지 않았다.

그냥 금수저들이 집에서 알아서 교육받고 들어가는 곳이 대학이었다.

그러나 현대는 다르다.

의무교육은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교육권에 의해 보장되는 정책이지만

이는 양면성을 가진다.

시민들은 모두 어느 정도 똑똑해지지만 동시에

자신이 국가의 구성원임을 똑똑히 자각하는 사람으로 길러진다.

이제 진정한 교육을 위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가 교육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국가 이데올로기 교육을 얼마나 배제할 것인지가

교육의 질을 일차적으로 좌우할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의 교육은 토론을 배제하고 있다.

독서 교육, 고전 교육도 없다.

대학에서 질 좋은 교육을 하려고 해도 기본이 안 돼 있으니,

독서와 토론이라든가 학술적 글쓰기 같은 수업을 해야 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전공에 치중할 시간은 자연히 줄어들 뿐만 아니라,

뒤늦게 기본에 힘쓰다 보니 전공에 힘쓸 능력을 충분히 함양하지 못한다.

입시 교육, 주입식 교육의 횡포를 방치함으로써

국가는 가장 치명적으로, 한편으로는 간접적으로 대학에 간섭한다.

출처 참고문헌
이석우, 『대학의 역사』, 한길사, 1998.
김항섭, "'종교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 종교문화연구 11, 2008.12.
신정철·박환보, “대학에 대한 정부의 다양한 간섭 형태에 관한 연구”, 敎育行政學硏究, Vol.25 No.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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