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3월부터 1973년 5월 사이, 4년2개월 동안 미군이 중립국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불법 폭격해 30만~80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습니다.
그덕에 미약한 존재였던 크메르루주를 급속히 강화시켜 크메르루주에 입대하는 농민이 급증했고 결국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후 캄보디아서 보복과 경제 악화, 학살의 악순환이 시작되었죠
중립국 캄보디아 공습 결정을 내렸던 키신저나 당시 미국대통령들은 잊혀진....
요즘보면 미국과 수니파 이슬람이 키우고있는 IS가 제2의 크메르루주처럼 될지도...
1973년 폭격 거부로 체포당한 도널드 도슨
여기, 그 전쟁을 말해주는 두 군인이 있다.
"캄보디아 폭격 명령을 받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적 목표물이 없었다. 결국 그 타격 대상이 결혼식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더 이상 폭격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1973년 6월19일, 폭격 명령 거부죄로 체포당한 미 공군 B-52 전략폭격기 조종사 도널드 도슨 대위가 군사법정에서 했던 말이다.
1969년 3월부터 1973년 5월 사이, 4년2개월 동안 미군이 중립국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불법 폭격해 30만~80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던 베트남전쟁 시절 이야기다.
그 베트남전쟁은 인류사에서 최초로 국가의 이름 아래 정부가 저지른 전쟁을 시민이 반대하는 혁명적 반전운동을 낳았고, 바로 도슨 같은 군인들의 양심적인 저항이 든든한 뒷심이 되었다.
"진짜 전쟁이었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죄 없는 사람도 죽을 수 있었다. 나는 전쟁중이라도 생명을 존중해야 옳다고 여겼다. 더 이상 (폭격)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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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킬링 필드는 캄보디아 영토 안에서 벌어진 베트남전이다. 캄보디아 변경지역을 베트남 공산게릴라들의 배후기지로 간주한 미국은 캄보디아 폭격을 결심했다. 공산 게릴라 세력을 견제하려는 캄보디아 지배층은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1969년 3월 18일, 드디어 미군의 폭격이 개시돼 캄보디아 변경과 농촌 지역은 B-52 폭격으로 인한 참상이 벌어졌다.
미군 폭격과 독재정권은 미약한 존재였던 크메르루주를 급속히 강화시켰다. 크메르루주에 입대하는 농민이 급증했으며 이들은 도시를 고립시켰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는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켰으며, 보복과 경제 악화, 학살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산 베트남과의 충돌이 표면화되었다.
종속과 빈곤의 그림자
여기에는 끊임없이 적을 설정하려는 군사적 모험주의, 예로부터 이어져온 베트남과의 갈등, 중국과 소련의 세력 경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베트남은 크메르루주의 경솔한 국경 침범을 빌미로 1978년 크리스마스를 기해 캄보디아를 전면 침공했다. 베트남군은 이후 10년간 캄보디아에 주둔했으며, 철군 후에도 강력한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전쟁은 일단 벌어지면 쉽게 끝나지 않는 법이다. 캄보디아의 사탕야자 나무는 평화로운 듯 서있지만, 대량 학살의 기억과 종속과 빈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http://media.daum.net/zine/newsview?newsid=20070501080718263 |
1970년대 후반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군의 공포정치가 있기 앞서 캄보디아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1968년 초 미국의 베트남전 군사 개입이 한창일 때 미군 병력은 55만 명에 이르렀다. "베트남전을 끝내겠다"는 공약 아래 1969년 1월 미 대통령이 된 닉슨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오히려 전선을 캄보디아로 넓혀나갔다. 두 사람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찌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적대세력(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겨냥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다. 그에 따라 B-52기들이 캄보디아로 출격했다. 공습은 '메뉴'(Menu)라는 은어로 일컬어졌고, 공습작전 이름도 식사 시간과 관련됐다. 아침작전, 점심작전, 스낵작전, 저녁작전 그리고 후식작전 등이다.
미군의 북베트남 공습은 1973년 1월 파리 평화회담으로 그쳤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공습은 미 의회나 언론, 국민들에겐 비밀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1974년 8월)을 몰고 온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서야 비로소 캄보디아 공습 사실이 알려졌고, 그제야 공습도 멈췄다.
1973년 공습 마지막 6개월 동안에 집중적으로 25만t의 공습이 행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에 떨어뜨린 폭탄(16만t)보다 9만t이 많았다.
캄보디아 공습은 키신저의 바람과 달리 공산세력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캄보디아를 취재했던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쇼크로스는 "크메르루주 세력이 불어난 것은 미국의 군사 개입이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공습으로 가족과 생활 터전을 잃은 캄보디아 농민들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던 론 놀 장군의 친미 군사정권에 적개심을 품게 됐다. 그들은 반군세력인 크메르루주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들고 나섰다.
키신저는 왜 사과하지 않나
당시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 에모리 스원크는 미군 공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1973년 캄보디아 주재 미 대사직을 그만두면서 미국의 캄보디아 공습을 가리켜 '인도차이나의 가장 헛된 전쟁'이라 불렀다. 그 무렵 캄보디아를 방문했던 미 하원의원 페티 매클로스키는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문에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 미국이 저지른 악(evil)보다 더 큰 악을 캄보디아에서 저질렀다"(1975년 2월 미 상원 외무위원회에서의 증언)고 말했다.
캄보디아 농민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다가 폭격으로 죽고, 밤에는 집에서 자다 네이팜탄에 불타 죽었다. 5만∼15만 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이 논밭을 버리고 난민이 됐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 치하의 1970년대 후반이 아니라 이미 1960년대에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캄보디아 공습 결정을 내렸던 키신저는 지금껏 자신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1994년에 사망한 닉슨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미국 정치권에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키신저가 무덤 속의 닉슨과 함께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로 불려나와 준엄한 단죄를 받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까. '역사의 심판'이란 용어는 그들 사전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