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는 생전에 36명의 아들과 20명의 딸을 보았지만 그중 20명의 아들과 8명의 딸만이 성인으로 성장해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가장 처음에 본 아들은 그가 14살때 태어났으나 세 살이 채 못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아 성인까지 성장한 아들 중 가장 연장자는 윤시였고, 그 뒤 2년간 3명의 아들딸이 있었지만 적자는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674년 효성황후가 득남하니, 그가 강희제의 적장자 윤잉이었습니다.
효성황후는 윤잉을 낳은 뒤 얼마되지않아 산후병으로 사망합니다. 황후를 끔찍히 사랑했던 강희제는 그녀에게 베푼 사랑을 그녀의 아들에게 쏟아붇게 됩니다. 다른 수많은 아들들은 고위관료들이나 직책이 높은 비빈들이 양육했지만 윤잉만큼은 그의 손으로 직접 길렀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만주족 고유 전통에 따라 아들 중 가장 능력있는 자를 후계로 삼는데, 강희제는 윤잉에 대한 과도한 사랑 탓인지 한족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는지는 몰라도 그를 황태자로 삼아버립니다. 윤잉은 이 기대에 부흥하려는지 4살 때 천자문을, 7살때 사서오경을 외웁니다. 부황의 총애가 더해졌음은 굳이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남순으로 남경에 머무를 때 황태자가 사서 읽기를 끝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성인께선 당신의 집안 사람인 아들에게 시경과 예禮를 배우도록 하셨지. 나라는 집안과는 다르지만 배우는 것은 매한가지다...
나의 생각은 너를 떠난적이 없다. 일취월장하고 중단하지 말라.'
그러나 20대가 넘어가면서부터 태자는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10년넘게 황태자로 앉아있는 사람이 어디있냐"라며 대놓고 툴툴거리기도 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어나 활동하는 기괴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동성애까지 탐한다는 소문이 돕니다. 이를 역겹게 생각한 강희는 그의 요리사 3명과 시종들을 죽여버립니다. 황태자의 엽기 행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부황이 있는 방의 휘장에 구멍을 뚫고 그 안을 몰래 들여다보기까지 합니다. 강희는 점점 윤잉에게 염증을 느꼈고, 아들이 자신을 암살하지는 않을까 하는 결벽 증세까지 보이게 됩니다. 부자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습니다.
1708년, 황제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윤잉을 행궁 앞에 무릎꿇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짐은 태조와 태종, 세조의 대업을 계승하여 38년간 통치해 왔노라....짐이 살펴보니 윤잉은 조상의 덕을 본받지 아니하고 짐의 가르침도 따르지 않는다.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럽지만 그는 사악하고 뭇 사람을 학대하며 난폭하고 음란하였다...이제 나는 결심했다. 윤잉을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한다."
그날 황제는 침대에 몸을 던져 크게 울었습니다.
허나 1년만에, 윤잉은 태자로 복귀됩니다.
안타깝게도 태자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주색을 탐했고, 광폭했으며, 부황의 기대에 어긋나는 짓만 골라 했습니다. 강희는 이제 정말로 질려버립니다. 이제는 윤잉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마저 부정합니다. 천단에서 제사지낼 때, 신하들이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하늘은 신臣(자신을 가리킴)에게 저런 아들을 내려주셨습니까" 라고 호소하고요.(옆의 신하가 '황제로서 신하를 지칭하면 안된다' 고 간하자, 자신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라고 반박합니다.)
그렇게 강희 51년, 폐태자시킨지 3년만에, 그리고 복귀시킨지 2년 만에 또다시 서인으로 만들고 맙니다.
"나는 내가 밤에 독살당할지 아침에 죽임을 당할지 예측할 수 없었고, 마음의 평정도 유지하지 못했다. 그는 태어나면서 자신의 어미를 죽였으며, 낭비벽이 심할 뿐만 아니라 요구하는 것도 끊임이 없었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그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친어머니의 얼굴조차 못보고 자란 아들에게 '제 어미를 죽인 놈' 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은 강희제의 태도에 놀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조실록에 그대로 실려있는 내용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아들이라는 감정과 하나밖에 없는 귀한 적장자라는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상태에서 시작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미움만 남은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윤잉이 잘못했다한들 그의 잘못을 단정짓기에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동성애를 즐겼다거나 부황을 암살하고자 했던 것도 단지 '들려오는 소문' 이었을 뿐이지 확실한게 아닙니다. 강희제는 '돌아가신 효장태황태후(할머니)께서 꿈에 나와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고 하며 이 꿈을 윤잉이 자신을 암살하려했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너무나 억지스러운 행보가 아닙니까.
강희제 자신의 말대로, 그는 '더 사랑하는 자식이 있고 덜 사랑하는 자식이 있었' 습니다. 윤잉은 더 사랑하는 자식에 속했었고요. 그러나 최후에는, 그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황태자를 폐위시켜버립니다. 어쩌면 이 비극은 강희제 자신이 만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황태자를 지나치게 편애하였습니다. 그가 꾸짖고 싶어하는 자는 꾸짖어 주었고, 싫어하는 자는 싫어해주었고, 좋아하는 자는 좋아해주었습니다. 다만 죽이고 싶어하는 자만은 살려주었습니다. 그와 대등하게 '학문' 에도 희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부황의 지나친 기대감은 누적되어 그에게 부담으로 돌아왔고, 결국 지켜진 선을 이탈하고 맙니다. 유년기의 총명함을 잃은 황태자는 결국 총애 또한 잃고 말았습니다.
강희제는 성인이 된 아들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봄 여름에 바깥 뜰에서 놀아야 한다. 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윤잉은 그런 어린시절마저도 학업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랬기에 부황의 총애가 더해졌고 그 기대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종국에는 그 모든 것이 증오의 감정으로 변모하였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비극적인 가정사는 황제가 서거할 때까지 풀리지 않았습니다.
윤잉은 폐태자된 이후 냉궁에 갖힌 채 몇십 년을 살다 52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옹정제는 그를 복권시켜주고 이친왕理親王의 작위를 내렸습니다.
어쩌면 윤잉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외롭지 않았던 적이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