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화변 뒤 영조는 14년을 더 살았고, 세자의 아들 정조는 즉위한 바로 그 날 신하들에게 내린 윤음의 첫 머리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정조 즉위년(1776) 3월 10일)”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네이버 캐스트 인물한국사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한마디의 말에 주위는 일순간 조용해졌다. 자식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거론했을 뿐이지만, 그 자리에 모인 신하들은 공포에 두려움에 떨었고 궁전 내 분위기는 냉랭하게 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 중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관여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도세자의 아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화성의궤),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는 사실 이덕일의 편집과 픽션창작에 따른 결과로, 실제로는 완전 다른 맥락이였다.
정조는 그날 '내가 비록 사도세자의 아들이긴 하지만 영조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들어놓았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 ' 는 뜻으로 말 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신하들이 내 뜻을 빙자 하여 사도세자를 높이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률로 다스리겠다' 고 했다. 물론 정조 자신도 사도세자를 높이고 싶어서 본심이 있기는 했겠지만 그러면 영조의 결정을 뒤집는 것이 될테고 그러면 정국이 동요를 하게 될테니 정국을 위해서라도 함부로 그럴 수는 없는 건 당연 한것이다.
이덕일이 쓴 부분[31] 은 정조실록 1776년 3월 10일 조를 보고 쓴 걸로 추정된다. 실제로 거기에는 '정조는 즉위하는 당일 빈전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했다'고 나와있다. 하지만 해당 내용을 보면 실제 이덕일이 쓴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실제로 정조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화를 입었다.
나무위키
이렇게 나와 있는데 어느 쪽이 옳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조가 사도세자에 대해 중립적인 의견을 취했나요 아니면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