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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근현대사 - 을미사변
게시물ID : history_247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월급전쟁
추천 : 10
조회수 : 82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12/30 10: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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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乙未事變)


개요

서기 2015년 (을미년) 12월 28일 대한민국 외교부가 일본 외교부와 위안부 문제를 졸속 협상, 타결한 사건.



내용

당시 일본정부의 역사교과서 왜곡, 위안부 문제 부정 및 망언등으로 일 정부의 신뢰성이 의심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업을 행한다' 등의 모호한 보상만 약속하였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는 '비가역적인 조치'를 약속함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논의에 제약이 걸리게 되는 문제를 낳았다. 특히나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협상 후 '일본이 잃은것은 10억엔 뿐' 이라는 발언을 하고, 당시 일본 총리 아베의 부인이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한 것을 보면 일본 정부의 사과가 진실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협상의 배경에는 당시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부상을 들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 공조체제를 강화시키려 노력했는데, 이를 위해 한일관계의 걸림돌 중 하나인 위안부문제를 해결시키려 한 것이다. 당시 협상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이 적지 않았다고 많은 언론이 보도한 바 있다.

무엇보다 국민의 공분을 산 것은 이러한 협상과정에서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철저하게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협상 타결후 위안부 할머니들을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격노하였고, 이러한 감정은 당시 한국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전개

이러한 공분은 결국, 협상 타결 이틀 뒤인 12월 30일 수요일 정오에 개최된 1211차 수요집회에서 대규모 시위로 표출되었다. 정오가 되기 전부터 일본대사관이 위치하고 있는 안국역 6번출구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하였고, 수만명이 모인 시위는 세종로너머 외교부 건물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는 소녀상 이전을 전면 부정했으며, 이는 후에 위안부 문제 재협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같이보기

일본군 위안부
- 수요집회








다같이 오늘 수요집회 나가보자는 생각에 한번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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