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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게시물ID : history_246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12
조회수 : 2284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5/12/28 21: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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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이전에 독후감으로 저장했던건데, 한번 올려봅니다^^





정관 11년, 당 태종은 무사확의 딸 무미랑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14살이었고, 성미가 거칠었다. 태종은 무미랑의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재인에서 더 이상 급을 올려주지 않았다. 649년 태종 이세민이 세상을 떠나자 총애 한번 받지 못한 이 불쌍한 여인은 비구니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무미랑을 흠모하고 있던 이세민의 아들 당 고종은 그녀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타고난 미모 덕에 큰 총애를 누리고, 나중에는 황후, 나아가 황제가 되는 이 여성은 바로 무측천이다.

 


 태종이 죽기 전 밀회는 여러번 있었다.  고종 이치는 몰래 그녀를 만나며 사랑을 나누었고, 무미랑이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로 떠나자 이치는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때맞춰 무미랑은 구애 편지를 여러 차례 보내왔고, 고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불려들었다. 무 소의가 된 무미랑은 여섯 형제자매를 낳을 정도로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그녀가 고종의 후궁이 되었을 때의 나이는 28살, 남편보다 4년 더 연상이었다. 이치는 그가 열세 살때 죽었던 어머니 장손황후의 모성애 비슷한 것을 느꼈다. 무 소의는 그에게 애교보다는 위로를 해주었고, 심적 안정을 느끼게 했다. 황제는 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황후자리를 선물하고 싶어했지만, 당시 황후 왕씨는 살아있었고 고종의 총애를 받던 소 숙비도 있었다. 치열한 궁중암투 끝에 무미랑은 왕 황후와 소 숙비를 옥에 가둬버린다. 고종은 크게 후회하며 그녀들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소식을 들은 무미랑은 그녀들의 수족을 자르고 술 항아리에 던져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고종은 이에 대해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그리고, 무미랑은, 그렇게 원하던 황후의 자리에 앉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고종의 외숙부 장손무기는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무후의 손에 죽는다.

 


 당 고종의 치세 동안 당나라 신민들은 이례 없는 거대한 영토를 지닌 대제국의 백성이 되어있었다. 당의 국경은 북으로는 아무르 강, 서로는 지금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다다랐고 사방 나라들은 신하가 되었다. 이런 정복 전쟁을 펼치는 동안 백성들은 크게 지쳐버렸다. 전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무후는 황제에게 '건언십이조' 를 올려 전쟁을 그만두기를 청한다. 무측천이 아버지가 3년상을 하듯 어머니도 1년상이 아닌 3년상을 하도록 정한 것은 굉장히 유명한데, 그 내용도 이 조서에 담겨 있다.


 683년, 오랫동안 풍질로 인해 앓아누웠던 당 고종이 승하한다. 아들 중종-본래는 황태자가 궁녀 소생 장자였던 이충이었지만 무미랑이 황후가 되자 그녀의 아들 중종 이현이 황태자가 되었다.-은 너무 눈치가 없어 성질이 난폭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아내 위황후와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 했으나 무후 입장에서는 그 권력은 자신이 지녀야만 했다. 결국 중종은 퇴위당하고 예종이 즉위하지만 얼마 안 되 다시 폐위당한다. 그리고 공석이 된 황제자리는 무후 자신이 앉았고 국명을 주周로 바꾼다. 바야흐로 무측천 통치시대의 개막인 것이다.

 


 범문란은 당나라 때 업적이 가장 큰 군주를 비교하며 말했다. '태종은 겸허하고 근면한 군주이다. 현종은 초기 국가경영에 힘을 쏟았지만 만년에 교만하고 사치하였기에 세 군주 중 단점이 가장 많다. 그리고 무측천은 시종일관 권력을 쥐고 신하들에게 넘겨주지 않은 독재군주이다.' 이에 대해 무측천을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강한 권력을 누린 군주' 로 평한다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틀린 말이다. 무측천은 혹리를 통해 힘으로 신하들을 제압했지만 신하들의 충언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녀가 불공을 드리러 갈 때 적인걸이 '부처는 이적(夷狄)의 신이니 그에게 황제가 참배하는 것은 크나큰 치욕' 이라며 지적하였다. 무측천은 이를 받아들여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다. 인심을 얻기 위해 작위를 남발할 때 심전교가 '멍청한 존무사, 눈감은 성신황' 이라며 무측천을 비꼬았을 때도 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말년에 그녀가 남창을 취할 때 주경칙이'염치도 없고 예법에도 맞지 않는 행위' 라며 힐난했을때조차 화 한번 내지 않고 큰 상을 내렸다. 이를 보면 충언을 잘 받아들이고 단점을 고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성군을 모습이라 하겠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폭군도 하지 않을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초기 통치 시기에는 그녀를 반대하고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많았다. 결국 이것이 뭉쳐져 서경업의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무측천은 이에 경각심을 느끼고는 혹리를 통해 반대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때당시 유명한 혹리로는 내준신, 삭원례, 주흥, 내자순, 부유예, 곽패, 길욱, 후사지 등 굉장히 많지만 여기서는 세 명만 설명하도록 한다. 삭원례는 호인으로 여황제의 밀고정치에 가장 중심이 된 인물이다. 사서에는 그의 성품이 잔인했다고 기록된다. 주흥은 해박한 법률지식으로 젊어서 관리가 된 사람으로 상서성도사로 벼슬길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역모사건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되는데, 후배인 내준신에게 심문당하여 생긴 '청군입옹' 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명하다. 내준신은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혹리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많은 고문기구들을 발명해 냈는데, 그 중 돌지후突地吼-갑작스럽게 숨을 토해 내다,갑자기 울게 되다-는 죄수들을 괴롭혔다. 돌지후에 묶이면 끊임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위로 토하고 아래로 싸게 되어 실신하고 만다. 이 밖에도 머리에서 뇌수가 나오게 하는 철권롱두 등등을 개발하였는데, 이런 고문으로 죄인이 죽으면 '죄가 두려워 자살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 이런 내준신을 무측천은 굉장히 아꼈다. 이들은 황제의 반대파는 물론이고 죄가 없는 자들까지 무고하였다. 결국 수많은 범인凡人들이 범인犯人이 되었다. 무측천의 정치적 행보는 실로 변화무쌍했다.

 

 이러한 잔혹함과 '여성' 이라는 이유만으로 당대에 비판을 크게 받았을 법 하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북송의 사마광은 그녀를 평하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색출해 파면하였고 직접 정국을 살피며 올바르게 판단했기에 당시의 인재들은 그녀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고 기록한다. 무측천은 인심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봉록과 지위를 남발하였다. 그러나 무능한 관리에게는 가차없없기 때문에 관리들의 기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또한 과감하게 벼슬길을 열어 많은 일반지주, 심지어 하층빈민까지 관료로 발탁하였다. 당나라 재상 육지는 이렇게 평한다. '측천태후는 등극한 후 민심을 얻고자 인재발굴에 힘썼다. 권력을 위임하는 뜻을 알리고자 인재등용의 문을 열었다. 임용하면 의심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인재를 찾았다. 사람을 추천할 수도 있었고, 자천할 수도 있었다. 추천받은 사람은 반드시 임용했고, 자천하면 곧바로 시험을 봤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많은 인재와 명재상들이 등장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 누사덕과 적인걸을 짤막하게 소개해 본다.


 누사덕:침착하고 도량이 넙으며 군사관리에 뛰어났다. 당시 세력을 팽창하고 있던 토번을 제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좌금오대장군, 병부시랑을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황제에게 적인걸을 추천해 재상이 되도록 하였는데 적인걸은 그가 자신을 추천한 것을 몰랐다. 한번은 측천황제가 그에게 "사덕은 어진 사람인가?" 라고 묻자 "장수로서의 재능은 뛰어나지만 어진 것은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또 "사덕이 사람을 잘 보는 편인가?" 라고 묻자 여기서도 "그것 또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라며 박한 평가를 내렸다. 무측천은 그때서야 당신을 추천한 사람이 누사덕이라고 말한다. 적인걸은 탄복하고 만다.

적인걸:지략과 형세판단에 뛰어났다. 무측천은 그를 존경하여 늘 '국로國老라고 부르며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게 했다. 내준신에 의해 죽을뻔한 적도 있었으나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구호해 살 수 있었다. 한번은 적인걸이 모함을 당해 좌천되었던 적이 있었다, 후일 무측천이 그를 다시 불러들이며 말했다. "그대를 누가 모함했는지 알고 싶소?" "폐하께서 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여기신다면 신은 잘못을 고치겠습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잘못이 없음을 아신다면 이는 신의 복입니다. 신은 저를 해하고자 한 자의 이름을 알기 원치 않습니다." 이로인해 황제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적인걸이 세상을 떠나자 무측천은 울면서 말한다. "조당이 비었다"

 


699년 무황은 정치생활이 무료하게 느껴졌다. 이에 공학감이라는 기구를 세워 유흥을 즐겼다. 그곳에서 하는 일이라곤 시를 짓고 도박을 하거나 미남자들을 불러모아 연애를 즐기는 것이 다였다. 황제의 생활은 점점 사치스러워 졌다. 이때당시 천자의 행차 때 동원된 사람은 이만 명을 넘어섰다.


 나이 80이 될 쯤 여황제는 자신이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직감은 주위 사람들도 느끼고 있던 바이다. 이제 문제는 대주제국을 이씨와 무씨중 누구에게 물려주느냐 하는 것으로, 황제는 아들 이현에게 자리를 넘겨주려고 하면서도 조카 무승사를 고위직에 앉혀 조야의 불한함을 자아냈다. 재상 장간지는 선수를 치기로 결심하고는 이다조, 환언범, 이잠, 최현위 등을 포섭하여 쿠데타를 준비해나갔다. 장간지는 대장군 이다조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누가 지금의 부귀영화를 내리셨소?" "대제(고종)이지요." "대제의 아들이 곤경에 빠졌습니다. 그대는 대제의 은덕을 저버릴 겁니까?" "은덕에 보답해야지요. 그대의 지시를 따르겠소." 형세는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그들은 무후가 있는 장생전으로 쳐들어가 이현을 황제로 세우고 지금 황제는 퇴위하라고 '협박' 하였다. 무측천은 이잠과 최현위를 보고 외쳤다. "아니, 이잠도 있었느냐! 너와 너의 부친은 나의 은택을 받았다. 그리고 최현위, 내가 직접 그대를 발탁하였다. 정말 뜻밖이구나!" 최현위가 말했다. "지금 하는 일이 폐하의 은덕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퇴위된 무후는 상양궁으로 이주하였다. 화장을 좋아하던 그녀는 그곳에선 화장기 없는 초최한 모습으로 지냈다. 무후의 오래된 병은 그녀를 더더욱 초라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705년, 태상황은 유조를 남긴다. "제호(帝號)를 없애고 측천대성황후로 부를 것이며 고종의 건릉에 부장하라. 능묘에는 아무것도 쓰지 마라. 공과를 후인들에게 맏기겠다. 왕황후와 소숙비 두 집안과 화를 입은 사람들의 성씨와 관직을 복권하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이현은 2년 남짓 제위하다 아내 위황후에게 독살당한 뒤 예종이 제위에 오르고, 후에 그의 아들 이융기가 황제가 된다. 그가 개원성세를 이룬 당현종이다. 역사의 흐름은 그렇게 물줄기를 바꾸고 무심히 흘러갔다.


 여성으로서 유일무이하게 황제가 된 무측천은 동시대 남성들이 보기에도 훌륭한 정치수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통치 이래 당 제국은 또 한번의 부흥을 맞이하였고 내치는 안정되었다. 17년 간의 제위 동안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은 늘어났다. 만년의 실정을 덮을 수는 없지만 무측천을 높이 평가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임어당의 말대로,


"무측천의 바램은 당당하고 원대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관심을 보이고 흥미를 느낀 유일한 대상은 대당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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