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수탈과 노동자, 농민의 저항운동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군산은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강제로 개항되었다. 개항 당시 군산항은 지금의 군산의료원 뒷쪽에서 세관을 중심으로 한 넓지 않은 어촌이었다. 한가로운 해변마을이 호남 제일의 도시가 된 것이다. 군산은 옥구 부윤의 행정관할하에 있다가 개항과 함께 목포영사관 군산분관이 생겼고 일본 영사가 각국거류회의 회두를 겸하고 있어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어 군산이사청이 생길 때까지의 항만관리권은 그들의 소관이나 다름 없었다. 이후 실질적인 행정은 이사청이 주도하였다. 군산은 개항 이후 역사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표를 보면 개항과 군산 개발(?)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한말 일제 때 군산 인구와 호수
1899 150 511 20 77 170 588
1900 253 780 131 422 8 24 392 1,226
1901 320 921 171 472 19 56 562 1.449
1910 825 2,835 569 2,050 40 96 1,443 4,981
1913 1,278 5,197 1,242 4,765 26 82 2,546 10,044
1919 1,742 6,581 1,665 6,809 57 214 3,464 13,064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조선총독부의 설치로 군산이사청은 폐지되고 군산은 부로 승격, 군산부청이 설치되었다. 더욱이 1908년 전주-군산간 포장도로가 전국 최초로 만들어지고, 익산-김제-정읍보다 익산-군산간의 철도가 먼저 만들어져 호남 최대의 상업도시로 성장하였다. 1914년 치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간행한 '군산안내'를 보면 군산은 전국 12부 중 상업항구도시로서의 기능이 대단하여, 총수출량으로는 부산 다음으로 전국 2위를 기록하였고 총수입량으로는 전국 4위를 기록하였는데, 이 수출품은 주로 쌀이었다.
군산을 이처럼 급격히 항구도시로 성장시킨 배경은 호남, 충청의 농토를 빼앗아 일본의 것으로 만들어 가난한 일본 농민을 옮겨와 살게 하고, 역시 호남, 충청의 쌀을 일본으로 강제 수출시켜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하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전북 지역은 가장 많은 일본인 농장이 모여 있던 지역이 되었고 가장 높은 사회 지배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일본 식민정책의 중심이 되었다. 군산지방은 쌀 수출항구로서의 위치 때문에 특히 농장이 많이 모여 있었다.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전북 지역에는 이미 24개의 일본인 농장이 만들어졌다. 이후 1920년에 이르기까지 다시 18개의 농장이 더 만들어졌다.
1926년말 30 정보 이상의 규모를 가진 일본인 농장수를 보면 전북이 1위였다. 거대한 규모의 농장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소작농이 많았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 공산품이 군산항으로 계속 들어오고 일본 농장이 갈수록 늘어나자 농장을 잃은 농민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는 유랑농민이 되었다. 남아있는 농민 역시도 조선의 봉건지주보다 혹독한 수탈을 당했는데 소작료가 조선시대에 그 수확량의 1/2이었으나 더 많은 2/3에 가까워지고 흉년에도 소작료를 감해주지 않는 등 최악의 실정이었다.
쌀 수탈의 전진 기지가 된 군산항
1910년 한일합병 당시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에 일본인이 차지한 토지가 86,951정보였는데 그 중 전남북이 반이 되는 42,000여 정보였다. 그 중 20,251정보가 전북이었다. 전국적으로 소작이 40%인데 전북은 68%였고, 자작이 전국적으로 19%인데 전북은 5.8%에 불과하였다.일제의 식민정책은 한국을 식량 및 원료생산지로 또 일본 공업제품의 판매시장으로 만들고자 산미증산계획에 역점을 두었다. 정미소도 10여개가 밤낮 없이 가동되었다. 일본인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강제 징수로 빼앗긴 곡물은 모두 군산으로 집결되어 군산부두에는 쌀의 산이 만들어졌다.
군산 지역의 쌀 수탈에 대한 투쟁
1920년대 초에 와서 조선의 민중은 3.1운동 초기 지도자들이 보인 어려움을 이겨내고 국내외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운동을 새로운 방향으로 펼친다. 즉 노동자, 농민이 중심되어 '민중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군산에서도 여러 항쟁이 있었지만 쌀과 직접 관계가 있는 정미소·미선공의 항쟁과 이엽사농장 소작쟁의를 정리해본다.
정미소·미선공의 항쟁
1920년 4월 11일 조선노동공제회가 생긴 이래 전국에서 8번째로 군산의 노동운동가와 진보적 지식인들 그리고 노동자들은 군산부지회를 1920년 8월 23일 만들었다. 이어 1921년 9월에 군산미선조합을 개복동 뒷산에 사무실을 만들어 미선공의 야학교육에 힘썼고 1922년 12월 1일 군산정미노동조합을 만들었다.
1920년대 전국에 수천명의 정미소 직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동력기관을 돌리거나 기계를 보는 소수의 기술자, 가마니를 운반 정리하거나 동력이 없는 정미소에서 매를 가는 매갈이(인습)노동자가 가장 많고, 쌀에 있는 뉘를 고르는 미선 여공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매갈이와 미선공의 파업은 192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일어나는데 1923년엔 진남포·인천에서, 1924년엔 인천에서 수백명씩의 미선공들이 일본인 검사원의 몸수색 등 횡포한 행동에 저항을 했다.물론 이들의 뒤에는 노동운동이 있었다.
군산에는 연간 10∼25만 가마 이상의 현미를 생산할 수 있는 군산가등정미소, 군산낙합정미소, 조선정미소, 군산조일정미소, 육적정미소, 군산정미소 등 대규모 정미소가 속속 생겼다. 규모가 작은 정미소와 매갈이공장까지 더하면 20여개가 되었다. 전체 군산의 미선공은 2,000명이 되었는데 제일 큰 공장은 400명 남짓의 미선여공이 있었다. 군산에서 처음 시작한 군산낙합정미소의 파업 때인 1924년 군산 인구는 한국인 14,200명, 일본인 7,100명 외국인 200명이었는데, 2,000명의 여공이 있었으니 당시 성년인 생산 가능한 여성 대부분이 동원된 셈이다.
자세한 참여자 수와 활동을 당시 신문에 근거하여 표본 정리해 본다.
1924. 3. 16 군산낙합정미소 매갈이 직공 파업 정미소에서 임금을 80%로 내림→노조에서 단체교섭하고 동맹파업을 경고함→동맹파업→해고→노동자측에서 임금의 93%를 요구→대리로 들어온 다른 노동자들과 싸움→조합원 40명이 정미소 습격→경찰.정미소.조합이 타협→3.23 파업투쟁 일주일만에 완전 승리(임금 93%)
1926. 11. 16 군산정미공 1,000여명 동맹하여 파업 지지 조선정미소 100여명 임금 올려 달라고 11일 파업→육적정미소 동조 파업→전 군산 정미공이 동조 파업 결의→공장주.노조대표.경찰이 합의→인천과 같이 해주기로 약속함
1927. 6. 19 전군산 정미공 1,000여명이 동시 파업
1927. 6. 23 미선공 판결 승리
1927. 6. 24 여공 구타를 절절히 사과함
1930. 6. 21 군산조일정미소 미선공 파업
1934. 1. 16 가등정미소 미선공 100여명 파업
서수면 이엽사농장 소작쟁의
평안도 불이농장 투쟁, 신안군 암태도 투쟁과 어깨를 견주는 소작쟁의가 군산에도 있었다. 1927년 11월 옥구군 서수면에서 일어난 소작료 인하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1910년대 전북에 10여개이던 일본인 농장은 20년대 58개소가 되었고 1926년의 조사를 보면 50정보이상 일본인 지주가 군산에 1명, 옥구에 13명이 있었다. 1920년대 소작농이 81.6%였던 우리 농민의 항쟁은 당연 소작쟁의로 이어진다.
서수에서도 이를 위하여 옥구농민조합 아래 서수농민조합을 1927년 8월 4일 만들었다. 이어 8월 5일 서수청년회가 만들어지고 두 단체는 8월 19일 '농민문제'강연회를 하다가 경찰이 가로막자 '서수농민조합 만세', '서수청년회 만세', '세계 무산자 만세'를 외쳤다니 서수 이엽사 소작쟁의는 조직적 배려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이엽사농장은 전주.익산.옥구에 논 1,000정보·밭 200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농민 1,700명을 거느린 거대 농장이었고 본거지가 서수였다. 농장주인은 니이가다현 사람들이었고 주임은 사이토오였는데, 일본이 밝힌 전국 평균 소작료가 46.7∼42.4%였는데 75%의 소작료를 요구하는 악질 농장이었다. 이엽사농장의 소작쟁의를 요약 정리해본다.
1927. 11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가 농장 주임과 교섭 소작료를 45%로 할 것
포장은 비싼 가마니보다 섬으로 할 것
사이토오 주임 교섭에 2차까지 불응
소작료 불납 통고
농민조합 서수지부장인 장태성을 군산 경찰이 검거
주재소 가서 석방을 요구하자 농민 간부 36명 검거
500명 서수 농민들이 주재소 습격, 구속자 전원 석방
다시 찾아서 검거
석방을 요구한 농민들 80여명을 구속
51명 재판에 회부, 34명 기소(징역 1년∼4개월)
엽사 소작쟁의는 가인 김병로 변호사가 변론을 무료로 맡고, 조선농민총동맹.노동총동맹에서 조사단을 파견하고 위로하는 등 전국적 조선 인민의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적.조직적 지도가 약해서 1930년대까지 꾸준히 독립투쟁의 불길로 타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동아일보를 보면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전반까지 전북에서는 16여건의 소작쟁의가 있었고 군산에서는 이엽사 소작쟁의 이외에도 2건 이상의 큰 소작쟁의가 있었다.
지주에 대한 소작인의 불평과 불만은 가는 곳마다 없는 곳이 없다. …… 이전에는 지세도 지주 측에서 부담할 뿐만 아니라 소출을 반반씩 나누어 주는 반분작을 마다하고 도조로 주기를 희망할 만큼 후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 반분작을 바랄 수도 없다고 한다. 너야 굶어 죽든 말든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라는 셈으로, 한번 매겨 놓은 토지는 수확이 좋든 나쁘든 조금도 감해 주지 않고 그대로 받아가는데, 작년 같은 흉년에도 불벼락 같이 받아갈 것을 받아가고야 말았다. 원성의 표적이 되는 것은 대부분 일본인 지주들이다. 예전에는 비교적 후하다고 하던 조선인 지주들도 불과 몇 해 동안 돌변하여 소작인에게 가혹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도 일본인 지주가 생긴 후부터라고 한다.
- 동아일보(1925.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