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고
결국 맥아더 원수는 철수를 명령합니다
당시 제공권과 제해권을 어느정도 장악하고 있었던 미군은 해로를 이용한 철수를 결정
많은 항구들을 물색하였고 그러던 와중 가장 적임지로 흥남항이 선택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수없이 많은 피난민들은 흥남부두로 몰리죠
발딛을 틈조차 없는 와중 유엔군은 피난민들을 버리고 군수물자를 우선적으로 선적하기로 하고
10만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외면합니다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
레너드라루 선장의 회고록
이때 현봉학 미 10군단 소속 자문관과 김백일 국군 제1군단장은 3일에걸쳐
군사작전에 민간인을 포함시킬수 없다는철수작전 지휘관 에드워드 알몬드를
이대로 떠나면 저사람들은 모두다 죽는다며 눈물로 설득했고
결국 에드원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12월 23일 현재 흥남항에 남아있는 수송선 만이라도 군수물자 대신 피난민들을 실으라 명령합니다
현봉학 박사님 께서는 자신이 탑승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메러드 라루에게 최대한 많은 피난민을 실어달라 요청하죠
기나긴 알몬드 군단장에게 한 간곡한 설득을 모두 지켜보았던 라루 선장은
당시 배안에 있던 군수물자의 하역을 선원 들께 명령하지만
선원들은 반대합니다
원래는 상선이었다 징발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고작 60명인 데다가
현재 있는 47명의 선원을 제외 할떄 고작 13명밖에 더 태울수 없는 선박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라루선장은 모든 군수물자를 다 내린뒤 최대한 배의 구석구석까지 사람을 태우고
자그마치 1만 4000명의 피난민이 13명 밖에 더 탈수 없었던 배에 승선한뒤 23일 흥남항을 떠납니다
(피난민들로 가득히 매워진 메리더스 빅토리호의 갑판과 라루 선장)
그리고 불과 몇 시간뒤 흥만부두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등 다른 배들이 피난민들을 승선시키기위해 내려놓은 군수물자를 모두 폭파하고
또 그로부터 몇시간뒤 인민군 선발 1개 대대가 흥남항에 닿았습니다
당시 빅토리호 안에는 모든게 부족했다고 합니다
식량은 말할것도 없고
피난민들도 시민의식을 발휘해 집에서부터 주섬주섬 챙겨온 패물이나 옷가지등 피난짐들을 모두 버려 한명이라도 더 탈수 있도록 배려 했기에
추운 12월의 날씨에 그대로 노출 될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선원들은 반대했던 승선 전과 달리 자신의 식량과 옷가지들을 벗어주며 피난민들을 보호했고
(메리더스 빅토리 호의 갑판과 피난민들을 보호하는 선원)
12월 23일부터 28시간에 항해끝에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입항이 거절 당하자
50마일을 더 항해하여 12월 25일 아침 거제항에 피난민 1만 4000여명에 그사이 배에서 태어난 5명의 아이를 포함하여
단 한명의 사상자도 없이 무사히 거제항에 입항합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5명의 아이중 한명이신 이경필 원장님)
그후 라루선장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라루 선장님은 이뒤 미국으로 건너가 뉴저지주 뉴턴 시에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의 마리너스라는 세례명의 신부님이 되시고
평생 소외된 이웃에게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며 사십니다
라루 선장님은 87세의 나이로 영면하시기 이틀전 한국의 왜관수도원의 도움을 받으시고
현재는 왜관 수도원의 신부님들이 라루 신부님의 뜻을 이어 바오로 수도원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2004년 9월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세계 기네스북 등제위원회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구조를 행한 배로 등제 됩니다
오늘 제 글은 여기까지 입니다
여러분 모두 소중한 사람들과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출처 |
위키백과/구글 이미지/기적의 배(저자 빌 길버트, 역자 안재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