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어릴때 평안남도 평양 이주 후, 개신교계 사립학교인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했다.[2]
1904년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지만 을사늑약과 한일신협약 체결 뉴스를 듣고1907년 귀국, 마침 전국적으로 비밀리에 조직되고 있던 암살 조직 중 하나에 가입해,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주요 인사들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매국노들의 처단을 결의했다.[2]
1909년 12월 22일 종현천주교회당(鍾峴天主敎會堂, 현 서울 명동성당)에서 벨기에의 국왕레오폴 2세 추도식이 있었다. 이완용 참석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 의사는 인력거를 타고오는 이완용을 칼로 수차례 찔렀으나, 인력거꾼에게 가로막혀 미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급하게 인력거 인부를 칼로 찔러 자신에게서 떼어낸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순사의 군도에 넓적다리를 맞고 체포됐다.[2]그를 가로막은 인력거 인부의 이름은 박원문으로 곧 절명했으며, 이완용은 갈비뼈 사이로 폐를 찔리고 치명상을 입은 듯 했으나, 대한의원(현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으로 후송돼 일본인 의사들이 집도한 외과 수술로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3]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에 대한 살인 미수 및 박원문을 살해한 혐의로 곧 재판정에 섰으며, 공판에서 일본의 악행을 꾸짖고 이완용을 찌른 것이 의거이며 다만 박원문이 죽은 것은 우발적인 것이었음을 스스로 변호했다. 다음은 일본을 꾸짖은 내용이다.[4]
“ |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이 일에 찬성한 사람은 2000만 민족이다. 왜법(倭法)이 불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기는 하나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 ” |
1910년 갓 스무 살을 넘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순국했으며, 송병준, 이용구 등 다른 매국 인사들의 암살을 준비 중이던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1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됐다. 명동성당 입구 쪽에 의거터가 표석으로 표시돼 있다.
박상우의 장편소설 《칼》[5] 이 이재명과 그의 의거를 소재로 한 것이다.
명동성당 앞에 있는 의거비
우리에게는 그 악명높은 이완용을 대담무쌍하게 칼로 찌른 의사로 유명하다.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907년에 귀국하였다.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로 하였을 때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하지 못했다.
'백범일지'에 명동성당 의거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다. 김구가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을 때 이재명이란 자가 총을 쏘며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났는데 백범과 노백린[1]은 이재명이 단순히 자기 말을 안 듣는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의 총을 빼앗아 기차를 타고 가버렸는데 의거 이후 그것이 이완용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였음을 알고 크게 안타까워 했다 한다. 사실 말하자면 이재명이 자신이 이완용을 죽이겠다 하자 그의 아내는 만류하였고 이재명은 이 계집이 나라가 중한 것을 모른다고 화를 낸 것. 그리고 나서 나중에 이완용이 칼빵을 당하고도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후회했다는 말이 있다. 선생님 왜 그러셨어요? 원숭이 육혈포로 죽였어야죠! 아니 이완용 집안의 모든 인간들을 한놈도 남김없이 능지처참 시키셨어야죠!
그 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뒈지자 죽자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등 3마리의 버러지 쓰레기 천하의 개쌍놈들을 처단하기로 하였다(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이,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결정).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2] 이재명은 신문을 보고 이 정보를 입수한 뒤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11시 30분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의 허리,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를 막아섰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부상 당한 이완용은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병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게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1호이다.[3]
재판정에서 이재명은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라며 고함을 쳤다. 재판장이 다시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하고 묻자 "2천만이다!"라고 답하자 창밖에서 “옳소!"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한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라고도 했다.
1910년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란 말을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비록 이완용 암살은 실패했지만 그의 칼침은 유효해 결국 이완용을폐렴으로 괴롭히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죽게 만들었다 ! 올레! 외과술이 10년 더 일찍 들어온 덕분이다.
허나 이재명은 무고하게 말려들었던 박원문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반 사과나 유감을 표하지 않았다. 박노자 교수의 글에 의하면, 법정에서 이재명은 박원문을 살해한 데 대해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박원문에 대한 살해 의도가 없었음을 강변했다[4]. 박노자는 이에 대해서 공판 기록을 근거로 이재명이 반성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5] 그리고 그동안 이재명의 의거에 대한 기록에는 박원문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인력거꾼 박원문이 애국지사 이재명을 왜 제지하였는지 이유도 밝혀야 한다. 단순하게 승객인 이완용인줄 모르고 보호하려 했는지, 아니면 승객이 이완용인 것을 알고 보호하려 했는지 알아봐야 한다. 그러나 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베오베 이재명시장님 글 보다가
국사시간때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었던 이재명의사가 생각나서... 다시 찾아봤네여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E%AC%EB%AA%85_(1890%EB%85%84) https://namu.wiki/w/%EC%9D%B4%EC%9E%AC%EB%AA%85 위키백과 나무위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국가보훈처 블로그 http://mpva.tistory.com/25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