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2월 30일 03시
철통 같은 일제의 경계가 뜸할 즈음 폭풍 같은 기세로 말을 달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사내가 있었으니 이회영 선생이다.
이어 마차를 끄는 4필의 말에 의해 나뉘어진 식솔40명과 노비였던 자들 20명의 마차는 질풍처럼 압록강을 건너고, 삭풍은 마차로 스며들어 따스하게 입으려 몇 겹을 껴 입은 이은숙 여사의 옷을 헤치며 살을 파고든다.
현재가치로 400억이 든 주머니를 가슴에 품은 채 말을 달리는 우당은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강탈되자 두 갈래의 기로에 선다.
‘부일 반역하여 왜놈의 앞잡이로 평생을 살아 후손에 먹칠을 할 것인가?’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향할 것인가?’
일제는 당시의 귀족들을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게 강요하고, 우당은 조상 이항복을 떠올리며 5형제에게 뜻을 같이 할 것을 제의하며 6형제 모두는 이에 가산을 정리하여 40명의 식솔들과 우당에 의해 이미 해방되어 노비문서마저 태워진 노비들이 자의로 합류하여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두해 전 이미 답사한 류하현 삼원보의 추가가마을까지 600여 리를 걸어서 혹은 철도나 말을 타고 걸은 일행을 맞이한 것은 조선보다 매서운 바람과 추위였다.
2월 초순 낯선 이들의 방문은 받은 추씨성이 대부분인 중국인들은 소곤댄다.
“저들은 일제와 협력하여 우리를 치러 온 것이다.”
이방인의 눈은 낯선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아 만주의 추위와 함께 일행을 떨게 하고, 그 후 이어지는 배고픔은 쌀밥과 고깃국을 매일 먹던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아이들은 제사때나 지어지는 쌀밥을 ‘좋다밥’ 이라 이름 짓고 쌀밥먹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1].
천혜의 요새인 이곳엔 ‘경학사’가 세워지고, 이는 신흥무관학교[2]로 발전한다.
평생 글을 읽고 학문을 닦던 선비들은 손에 곡괭이와 삽을 들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꾼이 되고, 이를 몸소 지켜보는 해방된 노비들은 송구하여 어쩔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이제 자유인으로 자신의 옛 상전에 의해 존중받는다.
1911년 3월 뜰에 모인 독립영웅들
이상룡, 김동삼, 이동녕, 김창환, 여준, 주신수, 이상설, 유인식[3]선생등은 우당의 집에 모인다.
이들을 포근한 눈으로 감싸며 바라보던 우당의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고 압도한다.
“우리는 광무황제를 모셔와 열강으로부터 망명정부를 인정받고, 독립자금을 더욱 풍부하게 모아 후학을 양성하여 우리 힘으로 대한제국을 되찾아야 할것이오.”
좌중을 압도한 원대한 계획은 어른인 석주를 감동하게 하여 이내 지시가 이루어지고, 10살이나 형인 석주의 카리스마에 우당은 놀란다.
1915년 어느날[4]
“왜놈들이 5년동안 아름다운 이 나라의 백성을 마구 헤친다지.”
“그러게 말이오 우리 신한혁명당이 백성을 구해내야 할 것이요.”
“동지들 우리 광무황제를 모셔가는 것이 어떻겠소?” 이상설선생의 말이다.
“아니, 아니. 그런 기막힌 발상은 어찌된 것이요?”
“우당형의 생각이오.”
우당이 삼촌뻘인 몽양 여운형선생은 즉시 같이 대화를 하던 성낙형[5], 김주원[6] 선생을 국내로 잠입시켜 일을 도모하나 염덕신[7]선생이 체포되어 발각된다.
1918년 어느 조용한 새벽 덕수궁
옷을 잘 차려입은 한 중년의 사내가 마루로 깔금하게 정렬된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목적지인 편전으로 나아간다.
“폐하 이것이 중국의 지도입니다. 이곳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폐하를 모시어 열강에게 조선의 황제가 굳건함을 알려 그들의 후원을 얻으며 폐하가 구심점이 되시면 더 많은 자금이 흘러들어 우리 힘으로 나라를 더 빨리 되찾게 될 것입니다.
폐하 이미 동지들이 준비를 마친 상태이오니 폐하께서 용단을 내리시어 저희와 함께 하소서.
민족 대표 몇 인보단 폐하의 강건하심으로 대한제국을 알리소서.”
“이회영 공의 정신은 내 그동안 높이 평가하였소. 힘없는 짐이지만 만약 짐이 조선백성의 해방에 도움이 된다면 가시밭길이라도 걸을 것이오.
지금 일제가 나의 아들 영친왕을 일본 여자에게 장가들이려 하고 있소.
이 만행을 짐이 살아서 봐야하오.”
“감사하옵니다. 폐하. 조선의 해방만이 폐하의 모든 것을 평안케 할 것이옵니다.”
우당은 고종의 결정에 크게 기뻐하며 절을 올린다.
1918년 11월
풍악을 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식이 거행되기 전인데도 백성들은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며 농담을 한다.
“하하 저 청년은 첫날밤을 그리는지 입이 찢어지는구만.”
“난 말일세. 첫날밤 우리 부인을 몇 번을 까무라치게 만든 지 모른다오. 하하”
“어디서 거짓말을.” 그러면서 백성의 부인이 허리를 꼬집는다.
고종과 우당의 대화는 짧게 이어지고, 윤허를 받은 우당은 자신의 아들 이규학[8]과 고종의 조카 조계진을 결혼시켜 고종 조카의 시아버지 자격으로 고종과 자주 만날 기회를 노린다.
1918년 11월 어느날 밤
야산의 중턱에서 쌀쌀한 날씨에 두 명의 중년 남성이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윽고 청년 둘은 5만원이란 거금이 든 궤짝을 건네 받고는 상해의 이시영[9]선생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 받는다.
돈 궤짝을 준 것은 우당이고, 이를 제공한 것은 민영달[10]선생이다.
“폐하를 모실 거처를 마련할 자금까지 제 동생에게 갔으니 이제 폐하를 모시고 비밀리에 놈들의 감시를 피하는 것만이 남았군요.
“기쁩니다. 너무 기뻐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민영달선생은 크게 기뻐한다.
1919년 1월 21일
이른 아침 마당을 응시하며 망명계획을 짜던 우당에게 갑작스런 비보가 날라온다.
즉시 덕수궁으로 달려간 우당은 총독부가 파견한 군경들에 의해 사방이 우울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궁궐의 내부공기를 보곤 치를 떨고, “식혜를 드시다 돌아가시다니 말이 되는가? 이게 말이 된다 보는가?” 하며 분노의 일갈을 날린다.
조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바꾸어 내려는 한 영웅의 손은 분노로 바뀌어져 꽉 쥐어지고, 눈물로서 마감이 되려한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황제폐하가 건강하시단 건 온 백성이 아는 소린데 식혜에 돌아가셔?”
“그러게나 말일세. 필시 왜놈들 짓일거야.”
“어찌 조선이 이지경까지 흑~ 이럴게 아니오. 여러분 태극기를 들고 외칩시다. 만세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만세소리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전국적, 거족적 항쟁으로 이어지고, 이를 잔혹하게 진압한 일제는 천하에 둘도 없는 잔인한 자들이다.
필자는 이런 독립운동의 역사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거족적 항쟁으로 4월까지 모진 탄압에도 이어짐은 얼마나 백성들이 독립을 원했는가를 웅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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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당선생의 부인인 이은숙여사의 자서전적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2] 신흥무관학교는 모두 무료인 독립군 양성소로 문을 닫는 그날까지 우당, 석주선생의 자금을 소진하며 급기야 우당, 석주선생을 굶주림으로 몰아간 독립자원을 군인으로 만든 학교다.
[3]김동삼 선생을 소개한 후에 다른 선생들은 후에 설명한다. 일송 김동삼 선생은 우당선생처럼 가산을 정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경학사부터 참여하고, 정의부 참모장을 역임하며 무장투쟁의 길을 걷는다.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 고문 순국한다.
[4]출처: http://mpva.tistory.com/3193 보훈처 대표블로그
[5] 다른 분의 공훈에 이름만 거론될 뿐이다. 조명이 시급하다.
[6] 이 일에 옥고를 치른 일만 공훈에 있다. 조명이 시급하다.
[7] 이 일에 옥고를 치른 일만 공훈에 있다. 조명이 시급하다.
[8] 아버지를 도와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임정의 주요인사들을 도우며 1917년 일제의 고문에 의해 청각이 손실된다. 3.1혁명에 참여하고, 상해, 북경등지에서 끝까지 싸운다.
[9] 이시형선생은 우당선생의 동생이다. 임정에서 활동하고, 해방된 고국에서 정부에 참여하기도 한다. 여러분이 잘 아는 분들은 간략하게 소개한다.
[10] 일제의 은사금을 끝내 거절한 선생은 우당선생에게 독립자금 5만원을 건넨 통큰 분이고, 정간된 아직은 부일 행각을 안 보인 동아일보를 살려내려 동지들에게 자금을 갹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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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게에 계시고 글을 보시는 분들이라면 우당선생을 모를 분은 없을겁니다.
제가 독립영웅들을 묘사하면서 알리려는 노력으로 블로그에 써 놓은 글입니다.
잘 썼다 생각은 않지만 그냥 역사적 사실만 연표로 늘어놓으면 보기가 싫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제가 왜 모두가 알고 계시는 이야기를 별로 재미있지도 않게 묘사된 글을 구지피 올리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