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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1967년 대선..(질경우) 야당 후보 암살계획...
게시물ID : history_245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5
조회수 : 103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2/13 09:12:02
이런 것들을 보면 박정희때 선거는 구색용이었던듯...야당후보가 이기면 윤보선이든 김대중이든 죽일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으니...

그렇게 부정부패에 조작 선거를 자행하면서도 간신히 이긴것을 보면 진짜 제대로 했다면

진작에 윤보선이나 김대중에게 정권넘어갔을거라는 생각도 드네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681

박정희 측, 대선 지면 야당 후보 쏴 죽이려 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4> 유신 쿠데타, 스물일곱 번째 마당

.........

이때도 국회의장 이효상은 공화당 유세장에서 지역 차별 발언을 하고 다녔다. 고질적인 망국병이라고 하는 극심한 지역주의, 이건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던 1950년대나 1960년대 전반까지는 없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가 발전했는데, 그 발전이 경인 지방하고 경상도 쪽에서 주로 이뤄지면서 지역 차별 문제가 등장하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같은 것도 호남 쪽에서 봤을 때는 '우리 쪽에는 아스팔트 길 하나 제대로 내주지 않고 있지 않느냐'고 반발하며 경부고속도로를 고운 눈으로만 보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었다.

지역 차별이 어떠했는가를 인구 이동으로 보면 1960년 말 영남 인구는 819만4000명으로 돼 있다. 부산까지 포함한 수치다. 호남 인구는 594만8000명이었다. 5.16쿠데타가 나기 직전에 이랬는데, 1980년 말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이 붕괴한 다음 해에는 영남 인구가 1142만9000명으로 나온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포함한 20년 사이에 323만5000명이 증가한 것이다. 1980년 말 호남 쪽 인구는 606만5000명이었다. 20년 사이에 11만7000명밖에 증가하지 않은 것이다. 자연적인 인구 증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그러니까 호남 쪽에서는 사람이 계속 빠져나갔다고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공장도 별로 없고 살기도 어려우니 떠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호남선 복선화 문제에서도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선거일을 며칠 앞둔 4월 29일 호남선 복선화를 공약했다. 그런데 그게 완성된 건 김대중 정권이 끝난 그해(2003년)였다. 박정희가 공약한 지 36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이 국도 1번 지역이다. 서울에서 목포 사이의 길인데, 거기에 아스팔트가 다 깔리는 데 20년 정도 걸린 것으로 기억한다. 선거 때마다 조금씩 깔더라. 선거가 끝나면 중단했다가 다시 선거철이 오면 또 공사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국도 1번이라고 하는 데를 그렇게 하더라. 그러니까 호남 사람들로서는 '우리 쪽이 차별을 너무 심하게 받는다'는 생각을 경제가 발전하고 있던 1966∼1967년경부터 갖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 호남선 복선화 송정-무안 임성역 구간 개통식이 끝난 후 새마을호가 무안 일로역에 진입하는 모습(2001년 12월 17일).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공약한 호남선 복선화는 36년 후인 2003년에야 완공됐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1967년 대선 결과, 어떤 식으로 나타났나.


서중석 : 선거 결과 경상도 쪽에서 대대적으로 박정희 후보를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5월 3일 투표 결과 박정희 후보는 568만여 표, 윤보선 후보는 452만여 표로 116만여 표 차이가 났다. 그런데 이 선거는 동서 선거였다. 서쪽인 서울, 경기, 충남, 전북, 전남에서는 윤 후보 표가 많이 나오고 동쪽에서는 전부 박 후보가 표를 많이 얻었다. 추풍령을 경계로 선을 그은 형태로 딱 나뉜다고들 한다. 동서 선거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이 선거도 가만히 보면, 우선 경상남북도를 합치면 박 후보가 윤 후보보다 119만여 표를 더 얻었다. 두 사람의 전체 표차보다도 경상남북도에서 난 표차가 더 컸다. 거기에다가 부산까지 합쳐놓으면 그 차이는 136만여 표가 된다. 전체 표차보다 20만 표나 더 큰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선거에서도 결국 경상도에서 대대적으로 찍어주지 않았다면 박정희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겠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선거 과정에서 '야당이 이길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중앙정보부에서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윤보선이 당선되면 저격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나중에 밝혀진다.

"1963년에는 밀가루 대통령, 1967년에는 경상도 대통령"

프레시안 : 1967년 대선 당시 야당은 비실비실했고 후보도 다른 때에 비해 약체이지 않았나. 그런데 중앙정보부는 왜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인가.

서중석 : 민심은 여전히 박정희를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런 것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민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동서 선거 아닌가. 야당과 윤보선 후보가 그런 상태였는데도 서쪽에선 다 이겼다. 이게 뭘 말하는 것이겠나.

아무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1967년 대선 투표일을 앞두고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를 불렀다. 감찰실장은 중앙정보부의 주요 간부이자 높은 자리였다. 그런 위치에 있던 방준모한테 김형욱은 "만일 개표 결과가 윤보선 당선 쪽으로 기울어지면 저격해라. 총으로 쏘아 죽여라", 이렇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 대선에서 박정희의 재선 전망이 확실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나. 

그래서 방준모 감찰실장은 서울 안국동의 윤보선 집 안방이 내려다보이는 덕성여고 2층에 저격수를 1명 배치했다고 그런다. 

그런데 박정희가 당선돼 윤보선 저격 계획은 접은 것으로 돼 있다. 김충식의 책을 보면, 방준모가 그렇게 이야기한 걸로 나온다.

 (1963년 대선 때도 박정희 세력은 설령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개표 초기 박정희와 윤보선이 엎치락뒤치락하자, 5.16쿠데타 세력 중 일부는 개표 중단, 표 바꿔치기, 군대 출동 및 선거 무효 선언 등을 모의했다. 이는 그들이 국민과 야당에게 순순히 권력을 내놓을 생각 같은 건 손톱만큼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 1971년 대선에서 만약 개표 결과 김대중이 박정희를 앞섰을 경우 박정희 쪽에서 이를 인정했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의 오른팔이던 김상현과 박정희의 충복이던 윤필용의 대화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걸 시사해준다. 유신 쿠데타 후 김상현은 고문을 당하고 수감됐는데, 1973년 윤필용 사건이 터지며 몰락한 윤필용도 같은 교도소에 수감됐다. 김충식에 따르면, 거기서 김상현은 1971년 대선에서 만약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충복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느냐고 윤필용에게 물었다. 그러자 윤필용은 곧바로 뜨르륵 소리를 내며 기관총 쏘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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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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