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발해의 교체기에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문제에 엮여 있는 학설중 소고구려라는 나라에 대한 소수설이 존재한다. 현재까지 발해의 최대 영역에 요동지역이 포함되기는 하는데 그 시기가 과연 언제였는가가 의문시 되는데, 고구려가 망하고 잠시 당나라가 요동을 관할하다. 발해가 건국되었고, 그 사이에 당나라가 요동지역의 직접 통제력을 상실하였지만, 발해가 요동을 바로 점령하지 못했던 공백기를 소고구려라는 나라가 존재하여 요동을 잠시간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학설로 북한에서는 ‘소고구려(小高句麗)’라는 개념을 ‘고려후국(高麗侯國)’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독립성의 차이는 있지만, 뭔가 별개의 독자세력이 잠시간 요동을 지배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일치된 관점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학설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가 699년 안동도독부 안동도독에 임명된다.
(698년까지 도호부였으나 도독부로 격하되었다.)
2. 705년 유주도독과 겸임하는 형태로 안동 도호부가 부활하였으나, 714년 거란의 견제를 이유로 평주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요서 고군성으로 이전한다.
3. 당나라 ‘개원의 치(治)’ 말기에 접어들어 영향력이 감소하고, 이후 평로절도사 관할로 넘어갔으나, 758년 안사의 난으로 폐지되는데, 이는 762년을 기점으로 평로절도사의 요서지역과 요동지역에 대한 공제능력의 상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4. 더불어 737년부터 794년은 발해의 문왕 즉위시기이며, 818년부터 830년은 발해 선왕의 즉위기로 발해 최대의 전성기였다.
5. 발해의 국가시스템은 <신당서>와 <도리기>등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5경 15부 62주로 특히나 5경 제도는 문왕시기에 완비되었고, 최종적인 지방 시스템은 선왕시기에 완전히 정착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6. 여기에서 최소 무왕~문왕대까지 요동지역에 독자적인 ‘소고구려’라는 지방정권이 존립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7. 그 이유로 이 시기에 요동은 발해의 강역이 아니였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으나, 발해 무왕시기 장문휴의 수군을 이용한 당나라 산동지방의 ‘등주’를 공략함에 있어서 요동지방에서의 전투가 단 한차례도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을 들어 이 지역이 당나라와는 별개의 세력이 존립하였다고 추정된다.
(최소한 친당적 성향은 아니였고, 도리어 자신의 영역내에서 발해의 군사적 활동을 용인해줄 정도로 발해와 관련성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8. <통전>에는 당시 동북지역이 전부 ‘동이’의 영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통전’에서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의 대상을 달리하는데 동이는 고구려+신라+말갈을 통칭하며, 북적은 거란+해족+실위를 지칭하고 있다.)
9. 요동지역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발해의 강역에 속했다는 추론은 <구오대사> 야율아보기 항목에서 살펴볼수 있는데, 발해의 요동 토벌중 동경 정복 기록이나(이른바 ‘20년 전쟁’), <요동행부지>에서 요동은 대씨의 소유로 10여대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보면 언제인지는 불분명하나 요동이 발해의 강역에 포함되기는 하였다는 점이다.
북한에서는 무왕의 등주 공략시절 요동지역에서 별다른 저항이 없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왕족이 요동지역에서 계속적으로 독자적인 정권을 유지하다가 발해에 흡수되었다고 여기는 주장이 있고, 이러한 정권이 독립적인 국가로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서 발해의 제후국 형태로 존속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명확하지 않은 당시의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를 ‘소고구려’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편이다.
심심하군요...뭔가 잉여력을 발휘하고 싶은데...
발해의 요동지역 편입시기에 관한거나 살펴보러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