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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윤 공훈록
게시물ID : history_244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친일파박살
추천 : 2
조회수 : 758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5/12/09 15:54:45
 이범윤은 경기도 고양(高揚) 출신으로 이경하(李景夏)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말 국내의 농업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많은 조선 농민들이 간도(間島)로 이주하여 농경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81년에 이르러 청국은 간도 지방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농민을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간도의 영유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1883년에 어윤중(魚允中)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파견하였다. 

어윤중은 토문강(土門江)이 송화강의 상류인 도문강(圖們江)에 틀림없으므로 간도는 마땅히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여 이를 굽히지 않았다. 그후에도 조(朝)・청(淸)간에 간도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1900년에 이주 농민의 수가 6,7만명에 이르게 되었다. 

청국은 이들을 몹시 박대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를 두게 되었는데, 이때 이범윤이 그 직을 맡고 파견되었다. 1902년 6월 간도에 도착한 이범윤은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포대(私砲隊 일명 관리병(管理兵))를 조직하였다. 

그후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범윤은 노군측에 가담하여 한국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패전하자 간도에 대한 일본군의 간섭이 잦아지고 1907년에는 드디어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가 생겨 이곳에서의 구국운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는 항일투쟁을 전개할 뜻으로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연해주에서의 활동도 용이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외교경로를 통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견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도 국내 사회주의 혁명 세력을 탄압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건 하에서 이범윤은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국내 침공작전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이때 노령 연해주에 있어서의 한인들의 항일 무장 활동 기지는 연추(煙秋)였다. 

(하략) 국가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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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중과 이범윤 선생은 민족주의자 고토회복을 외치는 정신병자?

이런 뼈 아픈 사건이 있는데 오유 역게 수준이 왜 이리 됐는지.

오유 역게는 정말 건전한 사고와 비판정신이 있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일단의 사람들이 자꾸 현실과 환빠를 오도하여 비난을 하는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터전에서 쫓겨날 형편에 있어 역사전쟁을 한 

3천년 전의 아련한 역사가 아녀요. 동북공정은 현실입니다.

지금도 진행중이구요. 고구려 우리 역사 아닌가요? 이 정도면 자학입니다.

이범윤과 어윤중 같은 분들이 불과 130여년 전에 있었음을 상기하고

환빠라고 욕하는건 좋은데 싸잡아서 이런 민족주의, 이런 죽일놈

하는 자세부터 고치세요. 그래야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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