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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황제 영락제가 철령위를 조선에 주었다는 기록이있나요?????
게시물ID : history_244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0
조회수 : 174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2/09 09:51:43
철령이 식민학자들이라 그제자학자들이 주장하는것처럼

한반도내 함경도에있었다면 세종때면 한창 4군6진이다 뭐다 해서

점령하고있을때인데 그당시 명황제는 명최강의 황제 영락제...

그분이 목숨걸고 반란을 일으켜 얻은 명제국의 땅을 여진족에게 빼았겼거나 

속국조선에게 주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설사 명제국의 철령땅을 여진족에게 뻬았겼다 쳐도

당시 여자들을 조공으로 바치던 힘없는 속국 조선에게

철령위를 포함한 곳을 세종대왕당시의 조선에게 주었다는 애기도 없으니...ㅡ


그런게있었다면 조선역사에도 명황제에게 철령 땅을 하사받았다고 기록되어있었을건데 기록이 없죠

세종대왕 때 4군6진이 완성된이후 세조시절에도 계속 철령위 애기가 나온다면

결국 애초에 고려시대 영토였던 철령의 위치는 요동근처라는 반증아닐까요?

그러니 최영이 철령을빼았겼다는 애길 듣자마자 군대를 일으켜 요동으로 간게 이해가되는...

 

태조 1권 총서 81번째기사
명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요동 정벌을 논의하다
처음에 명(明)나라 황제가 말하기를,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
고 하였다. 최영이 백관(百官)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명나라에〉 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우왕은 최영과 비밀히 의논하여 요동(遼東)을 치려고 하매, 공산 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사제(私第)에 나아가서 옳지 못함을 힘써 말하니, 최영은 자송(子松)이 임견미(林堅味)에게 편당(偏黨)해 붙었다고 핑계하고는 곤장을 쳐서 전라도 내상(內廂)으로 유배시켰다가, 조금 후에 그를 죽였다. 우왕이 서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의
요동(遼東) 군사가 강계(江界)에 이르러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한다.”
는 보고를 받고 울면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나의 요동을 공격하려는 계책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였다. 명(明)나라에서 다시 요동 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어 철령위(鐵嶺衛)를 세움을 알렸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1장 A면
【영인본】 1책 11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군사-군정(軍政)


열람(왕대) > 세종실록 > 세종 23년(1441년) > 세종 23년 10월 > 세종 23년 10월 22일

“의정부의 장계(狀啓)에 의거하건대, 함길도 절제사 이세형(李世衡)이 피로(被虜)된 남자 1명을 잡아 보냈는데, 이상(李相)이 내력을 물은즉, 요동(遼東) () 군인에 속하였는데, 정통(正統) 2년 9월 일에 탈륜위(脫輪衛) 야인에게 포로가 되어, 여러 번 팔려서 종이 되었다가 변경에 이르러 왔는데 이번에 붙잡히게 되었다고 하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동방에 궁벽하게 있어서 말[語言]이 중국과 다르므로 반드시 통역을 의뢰하여야 명령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전에 원조(元朝)의 말기(末期)에 한남(漢南) 사람 한방(韓昉)·이원필(李原弼) 등의 무리가 피란해 나와서 생도들을 가르쳐 대국을 섬기는 임무를 삼가 갖추었더니, 그 뒤에 본인들이 잇따라 죽으매, 가르칠 사람이 없으므로, 한음(漢音)을 학습함에 있어서 점점 그릇됨이 있어, 혹 선유(宣諭)하는 성지(聖旨)를 밝게 이해하기 어려움이 있을까 두려우며, 조정의 사신이 본국에 이르러서 대화하는 말을 이해하는 자도 적사오매 대단히 불편하옵니다. 다행히 지금 이상은 글을 대강 알고 한음(漢音)이 순수하고 바르므로 머물러 두고 말을 전습(傳習)하기에 합당하오니, 신이 이에 의거하여 이상(李相)이 중국(中國)의 군정(軍丁)임을 참상(參詳)하고 주달(奏達)하여 머물러 두고 음훈(音訓)을 질정(質正)함이 마땅하옵기로 이를 삼가 갖추어서 아뢰옵니다.”






“1. 요동 진무(遼東鎭撫) 왕횡(王鐄)이 이르기를, ‘지금 북정 총병관(北征摠兵官) 한빈(韓贇)·참장(參將) 주준(周浚) 등이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9월 20일에 먼저 출발하여 통원보(通遠堡) 초하구(草河口)로 향하였고, 총병(摠兵) 배현(裴顯)·도치휘(都指揮) 하임(夏霖) 등이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22일에 출발하여 함장(醎場)으로 향하였고, 어사(御史) 이병(李秉)·태감(太監) 황순(黃順)·소감(小監) 장흠(張欽)·대총병관(大摠兵官) 조보(趙輔)가 중영(中營)이 되어 2만 6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24일에 출발하여 아홀관(牙笏關)으로 향하였고, 총병관(摠兵官) 왕영(王英)·참장(參將) 황단(黃端) 등이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무순소(撫順所)로 향하였고, 참장(參將) 손경(孫景)·부총병관(副摠兵官) 무충(武忠)·소감(小監) 위양(魏良) 등이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로 향하였는데, 각각 2개월 치의 양식을 가지고 갔다. 함장(醎場)·아홀관(牙笏關)은 통원보(通遠堡)와 무순소(撫順所)의 사이에 있다.’ 하고, 왕횡이 또 말하기를, ‘황제가 조선의 정벌에 나간 장졸(將卒)을 위로하고자 하여, 은(銀) 2백 냥을 요동(遼東)에 보내어 술 5백여 항아리, 소 40마리, 양(羊) 80마리, 돼지 1백 20마리, 닭 2천 마리, 거위 1천 마리를 준비시켜, 장차 회병(會兵)하는 곳에 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1. 신 등이 도사(都司)에 고(告)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오랑캐에게 피로(被擄)되었다가 도주하여 돌아온 사람 모근중(牟斤重)에게 의복과 양식을 급여하여 돌려보내 주니, 전하(殿下)께서 깊이 감사합니다. 다만 보내 온 자문(咨文)에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였다는 사연(辭緣)이 없었으므로, 즉시 사은(謝恩)하지 못하였는데, 사은(謝恩)하지 못하고 회자(回咨)하기도 또한 어려우니, 원컨대 대인(大人)의 지시를 듣고자 합니다.’ 하니, 유영(劉英)이 대답하기를, ‘당초에 취초(取招)할 때 조선(朝鮮) 사람인 줄 적실(的實)히 알았으므로, 도어사(都御史) 이병(李秉)이 단지 총병관(摠兵官)에게 이문(移文)하고 일찍이 주문(奏聞)하지 아니하고 해송(解送)하였으니, 사은(謝恩)을 없애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또 도어사(都御史) 장기(張岐)를 알현(謁見)하니, 장기가 말하기를, ‘건주(建州)의 적(賊)은 누차 변경(邊境)을 침범하였으나, 황제께서 어루만져 보호하고 다스리지 않은 채 내신(內臣)을 보내어 타이르셨으나, 저들이 마음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내신(內臣)이 거느린 취자(炊子)·동패(銅牌)를 빼앗고 횡포하고 방자하기가 더욱 심하므로 황제가 노하여 이러한 거병(擧兵)이 있게 된 것입니다. 조선(朝鮮)의 군사와 29일에 만나서 입공(入攻)하기로 약속하는데, 만약 힘을 다하여 정벌(征伐)해 공(功)이 있으면 황제께서 반드시 아름답게 여겨 상(賞)을 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큰 바람이 불고 비와 눈이 내리니, 장기가 말하기를, ‘어제 비와 눈이 내린 것은 하늘이 반드시 이 적(賊)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적(賊)이 비록 도망한다고 하더라도 천병(天兵)은 산을 둘러싸고 진군하고, 조선의 군사가 또 후문(後門)을 점거하면, 저들이 능히 올라가거나 땅에 들어가지 못하니, 얼어서 죽거나 또 없어질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왕횡(王鐄)이 와서 말하기를, ‘적(賊)의 길이 매우 험하니, 깊이 들어가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거병(擧兵)은 반드시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또 군사가 회군(回軍)하는 소식도 10월 안에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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