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유신 전기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전개
1. 유신직후의 정치상황과 반독재민주화투쟁(72년 10월~73년 전반기)
유신 직후의 정치적 상황 유신체제하에서 박정희는 모든 권력을 독점하였다. 국회와 사법부는 무력해졌다. 유신 선포 직후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가 대통령 취임에 맞춰 정치활동이 재개되었지만 정당과 국회는 제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유신 선포 이전부터 야당인 신민당은 당대표였던 유진산과 김대중을 비롯한 반진산파의 갈등이 심했다. 유진산의 당권파는 유신체제를 인정하였지만, 김대중, 김영삼 계열은 정권에 도전할 것을 요구했다. 유신 선포 후 첫 총선은 박정희 정권의 의도대로 진행되었고 신민당은 52명의 당선자를 내어 실제 득표율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후 전당대회를 통해 유진산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10월 유신은 유진산의 신민당 내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의 태동과 정권의 탄압 고려대의 『민우』『야생화』사건을 통해 간첩단과 국가전복단체가 조작되었고. 전남대의 반 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정권은 대규모 변란사건으로 만들었다.
남산부활절연합예배사건 73년 상반기까지 유신체제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의 움직임이 거의 없던 와중 73년 4월 22일에 있었던 부활절연합예배에서의 반 유신투쟁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날 뿌린 전단지가 관계 당국의 손에 들어갔고 유신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성직자와 학생들에게 내란 음모 혐의가 씌워졌다. 이날 목회자였던 박형규 목사는 유신반대투쟁의 전면에 나서며 이후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2. 대학가의 반유신 민주화시위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김대중납치사건 유신이 선포될 당시 일본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발히 반유신활동을 벌였다. 김대중의 이러한 활동은 그렇지 않아도 악화된 국제 여론에 압박을 받던 박정희 정권을 자극하였다. 귀국을 종용하였지만 안 되자, 김대중을 납치하여 자택 부근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납치 과정에서 정부가 관련되어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자 국내외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심각한 것은 국내 상황이었다. 이 전까지는 산발적으로 소규모로 일어났던, 오히려 공안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사건의 성격이 강했던 유신반대투쟁은 이후 대규모로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의 확대
서울대생 유신반대시위 공개적인 유신반대투쟁은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주도한 유신반대시위에서 촉발되었다. 불이 났다는 소리에 몰려나온 학생들을 주동자들은 4·19 기념탑 앞으로 인도하였고, 모여든 학생은 순식간에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법대와 상대에서도 유신반대시위가 일어났다. 유신정권은 서울대생 시위에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시위 관련 보도를 통제했지만 시위 소식은 금세 번졌고 여러 대학의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유신반대투쟁의 확산과 전국 대학의 동맹휴학 73년 11월부터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서울대생 이후 경북대생들이 유신반대시위를 시도하였다. 이 무렵 각 대학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하였다. 대학가의 동요가 심해지자 정부 당국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탄압하였지만 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은 오히려 계속되었다. 11월 말에는 참여 학교도 늘어나고 양상도 더욱 격렬해졌다. 학생운동이 활발하지 않던 대학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1학년들끼리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10월의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 시위에서도 여학생들이 활약하였지만 11월에는 여학생들의 투쟁이 더욱 두드러졌다. 시위가 격렬해지고 전국으로 확산되자 대학은 조기 방학을 하였지만 반정부시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12월에는 고등학교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사태가 이처럼 커지자 정부는 유화책을 내놓았다.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했고, 학생들은 학원 자주화 조치 및 정치현안과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여러 사항들을 요구하였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민청학련의 결성 계기가 되었다.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과 긴급조치1·2호 학생시위는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요구를 촉발시켰다.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에 나섰고 재야인사들도 시국선언을 통해 민주주의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원로 재야인사들로 구성된 시국간담회가 열렸다. 이 간담회 참석자들을 중심으로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구성하고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박정희정권은 헌법개정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경고하였다. 하지만 신민당을 비롯하여 각계에서 개헌청원서명운동에 참여하였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시켰다. 1호는 유신헌법 반대·비방 등의 일체 금지와 개정, 폐지 주장의 모든 행동을 금지하였다. 2호는 1호를 시행하기 위한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되자 기독교계를 필두로 항거가 시작되었고 대학생들도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속, 중형을 선고받았다.
3. 민청학련과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 조직과 투쟁 73년 말 대규모 유신반대 시위를 경험한 학생운동세력은 전국적으로 확대된 유신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움직임은 서울대 문리대에서부터였다. 하지만 70년대 전반 기독교 학생조직 말고는 체계적 전국단위의 대학생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비밀리에 준비하다보니 서울대 중심으로 그것도 문리대 복학생 중심의 인맥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학의 이념서클간의 교류를 통해 전국적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여기에 기독교 학생조직과 여타 종교세력 및 선배들의 사회세력을 참여시켰다. 이들은 조직 이름은 짓지 않고 비밀리에 논의하면서 투쟁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민청학련이 탄생하였다. 한신대에서의 첫 투쟁은 실패하였고 이후 서울에서는 서강대를 시작으로 4월 3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에서 시도하였지만 대부분의 시위는 성공하지 못하고 금방 해산되었으며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유신정권은 이날 오후 10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였다. 이후에도 투쟁 시도는 있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학생들은 구속 아니면 지명수배 되었다.
박정희는 이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였다. 민청학련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금하였고 위반하였을 경우 영장 없이 체포·구속 및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하였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었으며 전시를 방불케 하는 검문검색이 실시되었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보면, 재일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일본 공산당원 및 국내 좌파 세력이 그 배후였고, 추가 조사 결과에서는 인혁당을 재건하려던 이들이 민청학련을 조직하여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물론 이는 고문에 의한 날조였다.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는 '인혁당 재건위원회'의 존재는 더욱 근거 없는 것이었다. 인민혁명당은 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잠재우기위해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반국가단체였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재건위 관계자들에게 온갖 고문과, 수사관들 조차 반발할 정도의 날조로 수사결과가 만들어졌다. 공판도 공정하지 못했다. 74년 7월 8일 인혁당 피고인 21명 중 7명에가 사형 선고를, 다음날인 9일에는 민청학련 관련자 중 7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75년 4월 9일 대법원의 확정판결 다음날 새벽 7명의 인혁당 사형수와 민청학련 관련자 중 인혁당과 연결된 여정남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석방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또 많은 이들이 구속되었다.
74년 하반기~75년 유신반대투쟁 전개와 민주회복국민회의 긴급조치 1,4호는 국내의 민주화투쟁을 일시적으로 침묵시켰지만 오히려 해외에서는 더욱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의회도 박정희 정권을 압박하였다. 이렇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8월 23일 긴급조치 1, 4호를 해제하였다. 긴급조체 해제 이전에 광복절 기념식장에서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사회가 애도의 분위기가 사회를 뒤덮고 유신반대투쟁역시 소강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개강한 대학가에서는 구속자 석방 요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0월이 되자 전국 대학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문교부는 계고장을 보내 시위가 잦은 대학에 학사운영을 개입할 것이라는 협박까지 했다. 10월 말까지 전국 72개 대학 중 44개 대학이 휴강으로 문 닫았고, 13개 대학에 계고장이 발부되었으나 시위는 오히려 더 증가하였고 대학생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문교부에 의해 백낙청 교수가 파면되면서 학생들은 더욱 분노하였다. 또한 교수들도 학생들에게 지지를 표명하였고 정부를 비판하였다. 10월 말부터는 고등학생들도 반정부투쟁에 참여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 창립과 재야·정치권의 유신반대투쟁 정권의 계속되는 인권유린과 언론탄압은 오히려 종교계와 언론계의 유신반대투쟁을 강화시켰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발족하여 유신정권에 대한 가장 강력한 투쟁의 구심 중 하나가 되었다. 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발표에 자극받은 기자들은 연이어 '실천선언'에 나섰다. 문학인들도 유신반대투쟁에 나섰다. 재야의 활동도 더 활발해졌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의 창립이다. 재야인사의 참여로 만들어졌고 사무국을 설치하였으며 전국에 지부를 결성하였다. 정치인들도 참여하였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종교계와 언론인, 교수, 문인 등이 합류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외연이 커졌다. 국민회의가 확대되어가자 정부의 탄압도 커졌다. 정치권에서의 움직임 역시 활발했다. 김대중의 지지를 받아 총재가 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선명 야당을 표방하며 개헌을 주장했고 통일사회당과 민주통일당도 개헌 움직임에 적극적이었다.
1975년 전반기 유신반대투쟁과 긴급조치 7호 74년 말로 접어들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확산되었다. 해외 여론, 특히 미국의 언론과 의회 내 여론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 카드를 꺼내들었다. 유신헌법 찬반 및 대통령 신임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였다. 민주화운동세력들은 공정한 민주적 절차, 언론탄압 중지,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자유로운 찬반투표가 보장되지 않는 국민투표에 대하 전면 거부 의사를 밝혔고, 정치권과 여타 재야 세력들 역시 단식 및 여러 행동들을 하며 투표 거부에 나섰다. 75년 2월 12일에 강행된 국민투표는 79.8% 참여 73.1% 찬성이었다. 이전의 투표율과 찬성률에 비하면 훨씬 저조하였고 거기에 더해진 부정투표까지 감안한다면 정권에 대한 반감이 국민 다수에게 확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후 긴급조치 위반자 중 56명을ㄹ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하였다.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은 온갖 고문사실을 폭로하면서 유신반대투쟁을 시작하였다. 취조 과정에서 행해진 고문과 조작이 폭로되면서 진상규명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해 탄압으로 대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김지하의 경우였다. 석방 후 연재중이던 옥중수기에서 인혁당 사건이 고문·조작극임을 주장하였다가 다시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다. 며칠 뒤 중앙정보부는 김지하가 자필로 작성한 "나는 공산주의자"라는 진술서를 공개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 김지하는 자술서는 고문에 의한 강요와 조작이라는 양심선언문을 교도소 밖으로 내보냈다.
75년 봄 대학가는 석방된 교수·학생들의 복교·복직문제로 비롯되어 유신반대투쟁의 열기가 후끈하였다. 문교부는 이들의 복교·복직 시 총장, 이사장 승인 취소 및 폐교하겠다는 협박하였지만 유신반대투쟁을 막을 수 없었다. 시위는 4월 초에 절정에 달하였다. 4월 1일에는 연세대생의 "대학구국양심선언" 발표가 있었고, 3일에는 서울대생의 시위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투석전이 벌어졌다. 고려대생의 투쟁은 더욱 두드러졌다. 결국 고려대생을 대상으로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었다. 이날은 대법원에서 인혁당 관련자에 대한 사형이 확정된 날이다. 4월 유신반대투쟁의 정점에는 김상진이 있었다. 1975년 4월 서울대 농대학생들의 시국성토대회에서 4학년 김상진이 "양심선언" 낭독 중 할복하였고 이후 치료 중 사망하였다. 75년 4월의 대학가는 긴급조치 7호로 정면타격 받은 고려대 뿐 아니라 서울대 역시 많은 학생들이 제적과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5월 13일에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으며 5월 22일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최초로 유신반대집회가 열렸다. 서울대 학생들의 김상진 추모집회였다.
출처 | 내 노트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