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커뮤니티에도 올렸던 글입니다.
제가 예전에 민주화운동사(전 3권) 중에서 박정희 유신기를 담은 2권을 요약 정리한적이 있었는데
요즘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그 내용을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서 올렸었습니다.
다른 책 나눔 하려고 왔다가 여기에도 올리면 좋겠다 싶어서 올려봅니다.
책은 700여 페이지이고 정리한 건 A4 20페이지 가량인데
유신 시작부터 부마항쟁 부분까지 몇차례 나눠서 올려보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 계시면 찬찬히 읽어보세요.
짧게 요약한 글이라서 많이 생략되어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사건 개요나 인물, 연도 정도는 정리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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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유신체제의 성립과 유신 전기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전개
1장 유신체제의 성립과 억압구조
1. 유신체제의 수립 배경과 과정
1970년대 초 국내외 정세 변화 1960년대 초부터 미국은 주한미군과 한국군 감축을 심각하게 검토하였다.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의 귀환 시기에 맞춰 단계적으로 주한미군도 감축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1969년에 아시아 지역 방위는 아시아 당사국이 책임진다는 닉슨독트린을 선언하였다. 박정희의 반발에도 1970년 3월 주한미군 병력 감축 결정을 하였으며 대신 1971년~1975년까지 특별 군사원조를 통해 한국군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박정희의 반발에는 이유가 있었다. 베트남 주둔 한국군은 아직 철수하지 못한 상태였고 1960년대 후반의 심각한 안보위기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군의 철수는 1973년에야 완료되었다. 그러나 1968년 북한의 강경파 군부세력이 숙청되면서 대남 도발이 점차 줄었고, 북한은 서방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주한미군 감축은 실제로 안보위기를 불러일으킬 위험성을 안고 있었으나 당시의 국제질서는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킬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닉슨 행정부 출범 이후 동서 양 진영이 긴장완화를 시도하는 데탕트 및 미중관계 개선이 추진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데탕트 국면에서 소련과 중국은 미국과 우호적 관계 구축을 원하였고 행여 북한이 전쟁을 원한다 하더라도 여기에 호응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며 재집권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경제개발의 업적과 조직 및 자금 면에서 월등한 우위였던 박정희의 무난한 승리가 점쳐졌던 선거였으나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와 견제심리가 발목을 잡았다. 선거 사흘 전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고 공표하였다. 박정희는 94만여 표 차이로 승리했다. 하지만 노골적 관권선거, 금품살포 등을 감안하면 대단히 힘겨운 승리였다. 대선 직후 실시된 총선의 결과는 더욱 심각했다. 공화당이 과반을 얻긴 하였지만 개헌 의석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특히 대도시 선거는 참패였다. 결론적으로 1971년 선거 국면은 박정희가 헌정질서 내에서 재집권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남북대화의 시작과 국가비상사태 선언 1971년 닉슨의 방중 선언이후 미중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남북한 관계에서도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시작된 것이다. 남북회담 성사는 미중관계 개선이라는 대외적인 국제관계 변화가 큰 계기로 작용하였지만, 정권의 억압 속에서도 남북관계 개선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국회에서도 남북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있었다. 1966년 국회는 '국토통일연특별위원회' 구성 후 『통일백서』를 발행하며, 국토통일원을 창설하였지만 박정희는 남북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의 남북교류론이 큰 인기를 끌고, 국제 정세도 이를 부추기면서 마침내 남북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남북대화 시작 이후에도 박정희는 안보위기론을 고조시키며, 이를 자신의 재집권과 연결시켰다. 그의 의도는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명백해졌다.
1971년 대선 이후 일시적으로 야당과 학생운동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보였지만 10월부터 이 유화국면을 급반전시키는 행동에 착수하였다. 신민당은 장관 해임안을 제출해 표결에 부쳤고 놀랍게도 통과되었다. 여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내부 반란표가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학생들의 반정부시위에 대해 위수령으로 맞서 학생운동을 탄압하였다. 남북대화 역시 진행 중이었지만 북한위협론을 강조하면서 1971년 12월 6일 갑자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가보위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국내외적 변화에 합리적 대응이 아닌 위기감을 증폭시켜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극단적으로 강화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유신체제의 기획과 수립 1971년 9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남북회담이 시작되었지만 난항을 거듭하였다. 그러던 중 상호 비공식 대화채널 가동을 통해 중앙정보부장의 방북과 박성철의 남한 방문이 비밀리에 이뤄졌다. 이 성과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여전히 위기의식을 조장하였다. 유신체제 수립을 위한 개헌 작업은 남북대화 국면과 밀접히 연계되며 구체화되었다. 개헌작업은 정부 고위관리들도 배제된 채로 박정희와 이후락, 그리고 소수의 실무자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남북대화의 진전과 통일문제는 정권강화의 또 다른 명분을 주었다.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유신체제 수립이 정당화 된 것이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통령특별선언을 발표한다. ①국회해산 및 정치활동금지. ②헌법 일부 조항 효력 정지, 그 기능의 비상국무회의 대행. ③새 헌법개정안 공고 후 국민투표. ④개헌한 확정 후 헌정질서 정상화. 의 내용이었다. 미리 준비된 개헌안은 바로 공고되었고 이어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91.5%라는 찬성률로 통과되었다. 새 헌법의 주요 내용은 실질적으로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박정희는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유신체제라는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억압적인 정치체제가 수립되었으면서도 그 과정에서 큰 저항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운 찬성률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 그렇다면 일반 대중 다수가 유신체제 수립에 동의했다고 볼 수 있을까. 우선 당시 투표는 계엄령 하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계엄령 하에선 언론검열이 더욱 엄격해졌다. 오직 개헌안과 정치체제 개편을 찬양하고 정당성을 설파하는 글로 도배될 뿐이었다. 언론통제는 더 나아가 국민들의 의식과 행동까지 통제하고 압력을 가했다.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 이후 시작한 사상·문화적 통제력은 유신체제 확립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교육 현장에서 유신의 필요성과 정당성이 선전되었고, ‘4·19세대’를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들은 유신체제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10·17 선언에서 개헌에 찬성하지 않으면 계엄령 선포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더 비상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하면서 선택을 강요했으며, 체제 수립 과정 내내 정권이 내세운 온갖 흑백논리는 국민으로 하여금 순응하여 평온한 삶을 유지할 것인지 저항하여 위험에 처할 것인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투표 결과 역시 ‘일종의 순응훈련’이라고 미국대사관은 이야기 하였다.
2. 유신체제의 억압구조와 통치 이념
정치적 비민주성과 억압성 유신헌법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이었다. 기본권이 법률에 의해 제약되는 유보조항을 명시하였고 기본권을 제한한다고 해도 본질적 내용은 침해할 수 없다는 조항도 빠졌다. 위헌적 법률에 의해 기본권이 침해당한다 하더라도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봉쇄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부여하였지만 그것은 사법적 심사 대상도 아닌 절대적인 것이었다. 유신체제하의 통치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역시 사실상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켜 국회와 사법부 위에서 통치할 수 있도록 고안된 기구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통일정책을 심의·의결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 행사된 적은 없다 다만 두 차례에 걸친 박정희 대통령 선출과 박정희가 추천한 국회의원 후보들에 대한 찬반 투표에서 전원찬성을 던졌을 뿐이다. 당시 국회의원의 1/3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이 사실상 지명하였다. 이들은 따로 유신정우회(유정회)라는 별도 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3권 분립 원칙 역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우선, 국회의 권한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었지만 국회는 탄핵권이 없었다. 대통령은 개헌을 국회 동의 없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었지만 국회는 개헌하려면 국회 통과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통과되어야 했다. 또한, 유신헌법은 정기, 임시 국회 개원일에 제한을 뒀지만 대통령이 소집하는 경우는 회기일 제한을 받지 않았다. 유신헌법은 이처럼 국회와 정당정치에 심각한 훼손을 가져왔다. 사법부도 마찬가지였다. 유신 체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법부는 일정 부분 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그 이후에는 사실상 대통령과 행정부의 종속적 기구로 전락하였다. 유신체제 이후 국가폭력은 한층 심해졌다. 일부 야당 의원들은 체포·구금되어 고문을 당했으며 김대중은 철저히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1973년 서울대 법과대학 최종길 교수는 유학시절에 대한 근거 없는 제보로 고문을 받아 사망 후 자살로 위장되었다. 긴급조치 위반자 중 절반은 음주나 일상적 대화중 박정희와 유신헌법, 정치상황을 비판 풍자하다 적발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사회·문화적 통제와 동원 유신체제는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국가의 억압적 통제를 강화하였다. 새마을 운동도 통제 정책과 밀접했다. 농민 뿐 아니랄 각계각층으로 확대되어, 유신 이념을 보급하며, 국민을 유신체제에 동원하는 ‘실천 도량’이었다. 유신체제하에서는 노동에 대한 통제와 동원이 한층 강화되었다. 노동자들은 노동3권을 법적, 제도적 차원에서 누리지 못하였고 ‘민족중흥’,‘국가발전’이라는 명목하에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유신 이념을 주입하였다.
이 시기에는 국가권력이 언론통제 뿐 아니라 대중문화까지 직접적으로 통제하였다. 과거에는 아무 문제없던 내용의 노래가 ‘퇴폐풍조 조장’, ‘미풍양속 저해’ 등의 이유로 금지되었고, 사회고발적인 내용의 가사가 없더라도 뉘앙스만으로 금지되었다. 1975년 한 해 동안 225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종교 역시 통제되었다.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종교행사가 정치집회로 간주되어 탄압받았던 일도 많았다.
유신체제의 통치 이념 박정희 정권의 통치 이념은 이른바 ‘근대화’로 경제성장을 강조하고, 이를 목표로 국민을 동원하는 ‘조국근대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념적으로 반공주의를 더욱 확대·강화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제시한 통치 이념은 ‘한국적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는 중요하지만 서구적 민주주의가 한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고 하면서 유신체제를 한국적 특수성, 민족적 주체성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 하였다.
출처 | 내 노트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