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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흥망
게시물ID : history_243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10
조회수 : 222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12/02 1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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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황제는 얼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상하게 및을 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석처럼 광택이 없어졌다....코는 매부리코에 볼은 움푹 패어 있고 치아는 거의 없다. 델리의 왕좌에서 내가 본 이 늙은이가 티무르의 후손인 바하두르 샤였다.

 

아대륙 북부 지방에서 한바탕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작은 눈과 흰 피부를 가진 투르크족들은 단숨에 인더스-겐지즈 강 유역을 손에 넣어 가공할 위력을 남김없이 발산했다. 물론 인도인들에게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기원전 1600년경 인더스 문명이 멸망하면서부터 이민족들의 침입은 끈임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인도의 일부 지방만을 정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이 투르크 인들은 카슈미르에서 촐라까지 아대륙을 전부 집어삼킬 기세였다. 마우리아 왕조 이후로, 이런 대통합은 더 이상 보지 못했던 인도 원주민에게 거대한 제국을 선물하기 위해.

 

무굴 제국의 황제들은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의 자손들이다. 이들은 투르크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티무르의 모계가 몽골 황실과 이어져있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몽골 제국의 후계자를 자청하였다. 티무르가 누구인가. 한때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아우른 위대한 정복군주가 아닌가? 이 영광스런 피를 이어받은 자손들은 무굴 제국이 티무르 제국 만큼이나 위력을 발산하는 강대국이 되기를 바라였다. 이런 기대 속에서 열세 살짜리 소년이 군주 자리에 올랐으니, 이 아이가 바로 악바르 대제이다.


 바부르의 가업을 계승한 후마윤은 아들인 악바르를 전장에 대리고 다니며 엄격하게 길렀다. 하지만 엄격하게 기른다고 한들 열세 살짜리 소년이 아버지도 없이 제국을 이끌어가기 힘들지 않겠는가. 게다가 제국은 당시 델리 주변부만 다스리는 약체 국가였고, 국경에서 수르족이 침략해 오는 상황이었다. 초창기에는 후마윤의 절친한 친구인 바이람칸이 섭정하였다. 그는 군사 부문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는지 수르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단기간에 무굴의 영토를 넓힌다. 여기에서 멈춰야 했으나 그는 너무나 자만심에 빠져 안하무인이 된다. 조정은 모두 바이람 칸의 손에 넘어갔고, 황제는 이름뿐인 황제다. 그러나 악바르는 이런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할 총명함은 있었다. 1560년, 그는 바이람칸을 추방한다.


이제 열여덟이 된 소년 황제는 자신의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는 무굴 제국의 영광을 인더스 강을 넘어 데칸고원까지 퍼뜨리고 싶었다. 지금의 인도 서북쪽에 위치한 말와를 정복한 뒤 곧이어 구자라트, 벵골을 격파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더스 강 하류부터 아프가니스탄 남부까지 지배하게 된다. 이제 무굴은 북으로 카슈미르, 남으로 카슈미르, 서로 아프가니스탄, 동으로 미얀마에 이르는 대제국이다. 대제국이라는 말은  그만큼 거대한 강대국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섞여있다는 것을 뜻한다. 투르크인이며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황제는 아리아인이며 힌두교를 믿고 있는 기존 지배계층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다수이기 때문에.


 악바르는 지즈야-불신자들이 개종 대신 내는 세금-을 폐지하였고, 비무슬림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이에 힌두교도들도 무굴제국을 위해 충성하였다. 후일 자한기르의 말대로,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종교의 신학자들끼리 만나고 수니파와 시아파가 한 모스크 아래에서 만나며 프랑크인과 유대인이 한 교회 안에서 만나는" 제국을 만든 것이다. 황제는 크리스트교에도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었다. 그의 치하에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이가 몬세라테 신부. 그는 악바르 대제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의 평범한 얼굴은 인격의 숭고함이나 존엄성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무굴족처럼 중국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고 날카로운 눈은 섬세한 정신과 지성을 나타내주었다.

 

악바르 대제, 자한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지는 황위 계승도는 제국을 넓히는 데 크게 일조하여 그들이 정복자 티무르의 자랑스러운 후계라는 것을 주변국에 각인시켰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턴가 제국에는 균열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의 작은 문제로 보였고, 더더군다나 성세가 진행되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첫 번째 균열은 샤 자한 시기에 일어난다.


 샤 자한은 초창기에는 도덕적으로나 능력 면으로나 완벽한 군주였다. 아버지 자한기르와 달리 술을 멀리하였으며, 잇달은 라지푸트족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였고 건축 기술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당시 무굴의 예술작품은 우리의 상상을 능가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페르시아 화풍의 세밀화는 이때 최대의 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런 면모는 '초창기' 에만 보여주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불행은 그의 아내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숨을 거둔 것으로 인해 생겨났다. 현숙하고 충성스러우며 아름다웠던 부인이 죽자 샤 자한은 엄청난 슬픔에 빠진다. 근 20년간 얼굴을 맞대고 살던 사이다. 전쟁터에서까지 따라와 위로해주었던 여자이다. 어느 누가 이런 이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샤 자한은 아내를 위한 아름다운 무덤을 만드는 데 주력하게 된다. 이 무덤이 바로 타지마할이다.


 22년 동안, 이탈리아, 페르시아, 프랑스 등 외국 기슬자들이, 그리고 기능공 2만 명이, 터키, 이집트, 티벳, 중국, 그리고 외국 각지에서 수입한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될 '무덤' 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 건축물의 아름다움에 반비례하여 제국이 망해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땐 채 슬픔에만 잠긴 술탄의 자리를 노리는 황자들이 나온 것도 더더욱 당연한 일이다. 이 권력다툼에서 승리한 이가 셋째 아들인 아우랑제브이다.

 왕조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는 동시에 쇠퇴의 길을 걷는 경우는 굉장히 많다. 이는 대부분 초극성기와 정체기가 동시에 일어난다. 다리우스 1세, 시황제, 한무제, 위 명제, 진무제, 술레이만1세, 영락제, 루이 14세, 건륭제 등 수많은 군주들이 자신의 과도한 정복전쟁이나 극심한 사치로 인해 제국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한번에 맛보았다. 아우랑제브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위의 군주들과는 다르게 결코 '사치하지 않았다' 는 점이다. 그는 나이 아흔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말안장에서 내려오지 않은 정복군주인 동시에 단식으로 고행을 하려다 몸이 크게 상할 정도로 이슬람의 교리에 충실한 신자였다. 이 밖에도 맨바닥에서 가죽 하나를 깔고 자거나 단검 외에는 옷의 장식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아우랑제브의 생활은 검소하다 못해 궁빈해 보일 정도라서, 그의 치새는 언뜻 보면 도덕적이고 절제되어 보인다. 하지만 군주가 제대로 다스렸는데 망하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두 번째 균열은 아우랑제브 제위 중후반기에 나타났다.


 초기에 아우랑제브는 비무슬림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나중에도 설명하겠지만 몇십 년 뒤의 그의 태도와 비교해보면 극명한 차이가 난다. 그는 선조인 악바르 대제처럼 자신도 힌두교도와의 화합을 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지배층인 라지푸트족은 오랜 무굴 제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고, 그들의 반란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1681년 아우랑제브는 드디어 라지푸트족을 제압한 후 더 이상 이전의 관용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시크교도, 불교신자, 힌두교도를 탄압하였다. 지즈야를 회복시켰다. 음악, 그림, 춤, 술을 금지하였다.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였다. 결국 이것은 불만을 커지게 하였고, 예술을 쇠퇴시켰으며, 반란을 증대시켜, 종국에는 제국의 쇠퇴에 일조하게 된다. 두 번째 균열이란 이것을 뜻한다.


 아우랑제브는 황자 시절 아버지 샤 자한의 명에 따라 사마르칸트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한 적이 있었다. 한때 티무르 제국의 심장이었던 사마르칸트는 그만큼 많은 것을 내포하였다. 이를 정복한다면 티무르의 정통 후계라는 것을 명실공히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큰 기대를 품고 실시한 정복전쟁은 우즈베크인들이 페르시아군을 끌어들이면서 결국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황제가 된 후 아우랑제브는 북방이 아닌 남방으로 머리를 돌렸다. 지금의 비디르, 콜콘다, 마이소르, 아마드나가르 지방 등 수많은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마침내 대칸 고원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때의 강역은 인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제정은 파탄나고, 반란은 불길처럼 아대륙을 뒤덮었다. 아우랑제브는 그의 선조들처럼 무슬림을 대표하는 위대한 정복군주가 되는 것이었던 듯하다. 아니면 이슬람교를 '불신자' 들에게 훌륭히 전파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바랬던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결국 그 자신에 의해 제국에는 세 번째 균열이 일어난다. 아우랑제브는 자신의 정책을 답습하지 말고 선조들의 관용을 본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1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방 국가들은 인도에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몇 세기 후의 청 제국에 대한 동경과도 비슷하다 하겠다. 그들은 무굴 제국이 엄청난 강대국이며, 대단한 부를 거머쥐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며, 황제들은 모두 나랏일에 힘을 쏟는 명군일 것이라 짐작하였다. 화려한 궁중 문화가 크게 쇠퇴한 아우랑제브의 궁전을 방문했던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지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제국이 힘을 잃고 난 뒤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이 인도를 잘못 봤음을 깨달았다.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아대륙은 열강들에 의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다.


 오랜 '균열' 에 의해 무굴 제국은 델리 주변만을 다스리는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남부에는 마라타, 촐라, 판디아, 벵골 등 소국들이 일어섰다. 더 이상 거대한 제국은 없다. 찬란한 번영도 없다. 이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인도 각국에 조금씩 손을 뻗기 시작하였다. 곳곳에 동인도 회사가 세워졌고 항구 여기저기에는 유럽인들의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비록 인도는 지속된 재정파탄과 분열로 힘을 쓰지 못하엿지만 어느 누구도 거대한 아대륙 전채를 지배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영국 세력과 프랑스 세력이 맏붙는 사건이 생긴다.


 벵골의 태수 웃다울라는 영국 상인들의 밀무역이 국가의 재정을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연유로 그는 켈커타 시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전부 추방했는데 이것이 영국의 심기를 건들여 영국은 군대를 파견해 벵골군을 공격하려 한다. 태수는 급한 나머지 프랑스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결국 이 전투는 프랑스와 영국의 충돌로 발전된다. 결과는 영국이 이겼고, 프랑스는 물러가고, 웃다울라는 죽었으며, 벵골이 영국의 괴뢰국이 됨으로서 전투는 끝이 난다. 역사학에서는 이를 플라시 전투라고 명명한다.


 더 이상의 장애물이 없는 영국은 서북의, 아직까지 남아있는-그러나 확고한 정통성을 지닌-무굴 제국에까지 영향을 행세하고자 한다. 무굴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는 현명하지만 무능했다. 그의 모습은 윌리엄의 '무굴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처럼 '득도한 듯한 가난한 승려' 그 자체였다.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황제와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제국을 영국은 입맛대로 조종하였다.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누구나 영국인에 대한 혐오가 자리잡고 있었고, 결국 이것이 세포이 봉기로 터진다. 인도에서는 이를 제 1차 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세포이 봉기의 과정은 누구나 잘 알 것이라 믿는다. 탄약총에 쇠기름과 돼지기름을 칠했다는 소문을 들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세포이 군인들은 영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곧장 진압된다. 사건이 끝나고 수습될무렵 불행하게도 바하두르 샤 2세가 세포이 봉기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만다. 그는 '반란, 반역, 살인 그리고 영국의 지배에 불복종한 혐의로' 재판에 기소되었고, 황제자리에서 물러난다. 무굴의 영광은 끝났다. 영국은 아대륙을 손에 넣고 영국령 인도 제국이라 칭하였다. 이제 82세가 된, 한때 황제였던 노인은 종신형이라는 영국의 재판에 따라 소달구지를 타고 미얀마 양곤으로 떠난다. 세포이 군대는 봉기 전 그에게 말했었다. "전군과 델리의 시민들은 폐하를 따르고 폐하를 위해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군을 물리칠 것입니다."

 


1862년11월 7일 오전5시 무굴의 마지막 황제는 숨을 거둔다. 그와 함께 무굴 제국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티무르의 후예가 만든 화려한 문명은 이제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바하두르 샤의 묘비석에는 그가 직접 써놓은 묘지문이 있다. 그 내용은 이렇게 끝난다.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나의 사랑하는 대지에서 땅 2야드밖에 가지지 못했으니.'









예쁜 양탄자. (사진이 너무커서 모바일에선 안보일듯ㅜㅜ)


페르시아 화풍의 영향을 받은 무굴제국 세밀화.









horseback.jpg에 무하마드 샤옆의 초상화의 주인은 무함마드 샤 2세. 프랑스군에게 유폐되어 불행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인간성은 좋아서 프랑스 기자가 찾아오자 굉장히 기뻐하며 '프랑스인들은 전부 당신같이 생겼느냐' 같은 질문도 던지고 무굴 제국 전통 복장을 입혀주기도 했지요. 정작 당사자는 우스꽝스럽다고 표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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