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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군주 옹정제
게시물ID : history_243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11
조회수 : 2337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5/12/01 16: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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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강희제는 말년에 태자 문제로 고심해야 했다. 35명이 되는 아들들 중에서 그는 "자신만한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여 통탄해했다. 원래 2황자 윤잉을 적장자 계승원칙(본래 청나라는 만주족의 전통에 따라 가장 출중한 아들을 뽑았지만 강희제는 한족의 전통을 따랐다.)에 따라 태자로 세웠으나 태자의 자리에 맞지 않는 방종한 생활을 하자 두 번이나 폐태자시킨다. 태자자리가 공석이 되자 황자들은 서로 눈독을 들인다. 그중 8황자 윤사가 가장 출중했지만 강희제는 그를 싫어했다. 황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덕비의 아들인 14황자를 사랑하였고, 모든 이들은 14황자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고 1722년, 황제가 붕어한 뒤 유조가 발표되었다. 대통은 4황자 윤진이 있는다고 적혀 있었다.


 옹친왕 윤진은 황태자 자리에 눈독을 들인 적도 없고 파벌을 만든 적도 없이 풍류를 즐기며 보냈다. 더욱이 그의 생모는 출신이 미천하였다. 아무도 4황자가 보위를 이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윤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조를 읽은 뒤, 그는 '실신하였다.'

 

아마 파벌을 만들지 않고 황태자 자리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황제로 지목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강희제는 아들들의 다툼에 질려있었고, 그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옹정제는 가히 신선한 존재였다. 행간에서는 윤진이 룽쿼더와 함께 유조를 위조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우리는 헛소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황제가 된 윤진은 다음해를 옹정 원년으로 하였다. 그는 제일 먼저 8황자를 손보았다. 그에게 친왕 작위를 주고 존중하는 등 겉으로는 우호적으로 나왔지만 윤사는 자신이 곧 옹정제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토로하였다. 옹정제는 이를 핑계삼아 친왕 작위를 취소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킨다. 그러고선 옥에 집어넣은 뒤 청나라 황실 계보에서 삭제시키고는 계명하라고 강요한다. 윤사는 자신의 운명을 초연히 받아들였다. 스스로 원해서 이름을 아기나(만주어로 '개')로 바꾸었다. 그러고선 자신의 아들 이름을 '보살보' 로 개명하였는데, 이는 '보살의 자비로움' 을 바란다는 뜻이였다. 보살이 누구겠는가? 황제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고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았음에도 생모가 노비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와 아버지의 미움은 꼬리 마냥 그를 따라다녔다. 윤사는 결국 옥중에서 죽는다.

 

옹정제의 살인행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9황자는 색사흑(돼지)로 개명하고는 그도 옥중에서 죽게 한다. 8황자와 9황자가 죽은 날짜는 고작 6일 차이다. 유일한 동복동생 14황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십수 년간 유배된 뒤 건륭제 때에 와서야 복권된다. 권력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옹정제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사실 소심했던 윤진에게 유일하게 친한 형제는 13황자 뿐이었다.

 

황위쟁탈전에 관한 이야기로만 길게 늘어놓고 있는다면 옹정제 입장에선 억울해 질 것이다. 그에게는 냉혹한 이면에 부드러움과 나약함이 있었다. 그리고 꼼꼼함이 있었다.

 

하루는 신하들끼리 마작을 하고 있었는데 한 패가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아침 옹정제는 그들을 불러 말했다. "잃어버린 패가 이것이지?" 황제의 손에 들린 패는 과연 그들이 잃어버린 것이었고, 신하들은 이에 질려버렸다.

이것은 단지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만큼 옹정제가 신하들을 세심하게 '감시'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안된다면 사람을 써서라도 철저히 신하들을 감시해 부정부패와 타락을 막아내려 하였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청 세종 옹정제는 청나라, 아니 중국 역사 전체에서도 비교할 만한 자가 적을 정도로 부지런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늦게까지 정무를 보았다. 그의 거실 기둥에는 '위군난' 에 대헤 쓰여 있다.

'천하가 다스려지는가 아닌가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 

 

윤진의 제위 기간 동안 그의 오른팔은 톈원징이었다. 그는 총독에 부임하면서 조세를 안 내는 자는 가난한 백성이 아닌 부유한 유력자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그 유력자들에게 강제징수 하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몇년 뒤 그가 다스리는 허난 성에서는 길가에 금덩어리가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았다. 톈원징의 나이 일흔이 되었을 때, 그는 사직을 청하였고 황제는 받아들인다. 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옹정제는 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리웨이는 벼슬을 돈 주고 산 사람이지만 일처리에는 매우 의욕적이었다. 그는 윈난에 있을 때 소금 암거래를 했던 여성(선씨)을 처벌하였다. 사실 그녀는 다른 성으로 도망친 상태라서 리웨이가 그녀를 죽였던 것은 법률 밖의 일이었지만 옹정제는 도리어 칭찬하였다.

"법률은 운용의 묘를 살렸을 때만 비로소 효력이 생긴다. 법률에만 의존해서는 오히려 불공평해질 우려가 있고, 법률을 초월했을 때야 비로소 공평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옹정제의 생각이었다.

 

 한족 문인들은 군주를 우습게 보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싶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황제를 비판하며 그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삼고 문집에 넣어 출판한다. 이를 영광으로 알았다. 옹정제는 문인들의 이런 기풍을 극렬하게 혐오하였고, 언젠가 한번 진세관이라는 학자가 보낸 글에는 고약한 답장을 써보냈다.

[너는 이런 상주문을 올린 뒤 이 문장을 문집에 넣어 세상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으려는 심산일 게다. 그럴 테면 어디 그렇게 해라. 단 짐으로부터 심하게 질책당한 이 답장도 문집에 함께 실어 출판하도록 하라.]

 

옹정제 시기는 강력한 독제군주 채제 아래서 모두가 제 할 일을 해나갔다. 황제와 그 신하들, 그리고 그 백성들은 부강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황제의 명성은 멀리 유럽에까지 퍼져, 스페인의 사상가 고에스는 '누구보다도 솔선해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한다' 며 옹정제를 극찬한다.

 

청조, 특히 강건성세 시기에는 문자옥이 자주 일어났다. 이민족의 통치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한족들의 반항 탓일 게다. 옹정제 시기의 대표적인 문자옥 사건을 뽑는다면 단연 여유량 사건일 것이다. 여유량은 순치제에서 강희제 시기를 걸쳐 산 사람이었기에 옹정제 치세 때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는 '만이(만주족)은 오랑캐이므로 중원을 다스릴 자격이 없다' 고 주장하였고, 그가 죽은 뒤 그의 저작을 읽은 쩡징은 이에 매료되어 '옹정제는 27개의 죄악(아버지를 죽인 일, 모친을 핍박해서 죽인 일, 형제를 죽인 일, 주색을 탐한 일 등을 말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근거없는 내용이 많았다.)을 저질렸다' 고 주장하고 다녔다. 이 일은 당연히 옹정제의 귀에 들어갔고, 여유량의 저작은 압수되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옹정제의 심복 오르타이는 쩡징을 문자그대로 "금수만도 못한 놈", "금수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놈" 이라고 욕하였다. 이에 반해 당사자였던 옹정제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만큼이나 태연자약했다. 그는 쩡징에게 '27 개의 죄악' 을 일일이 해명하였고, 쩡징은 진심으로 감복하고 말았다. 황제는 쩡징은 살려주었지만 여유량은 죽이기로 결심했다. 일단 죽었으므로 다시 한번 더 죽여야 했다. 결국 여유량은 부관참시당하고 그의 가족과 식솔들은 북방 변경에 유배되었다. 옹정제는 한족들의 민심을 다독이고 만주족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쓴 책을 출판한다. 이것이 유명한 대의각미록이다. 비록 아들이었던 건륭제 때 모종의 이유로 금서가 되긴 했지만 자존심 강한 한족들을 설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충의는 중국의 성인이 가르친 부동의 교훈이며 민족을 초월해서 가치를 지니는 도덕이다.'

 

옹정제는 모든 일을 자신의 손에서 끝내고 싶어하였고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였다. 이런 빡빡한 생활이 나중에는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 이는 결국 황제의 '국정 포기' 로 흘러갈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어쨌거나 옹정제는 13년간 최선을 다하였고, 그가 추구한 대로 관료사회는 거의 완벽하게 작동하였으며 부패는 근절되었다. 황자 시절 유독 소심하게만 보였던 그는 황제에 오른 뒤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혹자는 옹정제를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 라고 평한다. 나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건륭제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강희제를 본받아 법치가 아닌 인자함으로 다스렸고, 이로 인해 말년에는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옹정제의 13년 치세가 결코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의 치세가 없었다면 부정부패는 더더욱 심화되었을 것이고, 청 왕조는 서양 열강의 침입과 신해혁명 이전에 내부 모순으로 주저앉았을지 모르는 일이다. 옹정제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잠들 때까지 일만 하는 일과를 13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갔다. 백성들이 기근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는 상심하며 수라를 들지 않기도 하였다. 그는 냉혹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인정 많은 군주였다.

 




예전에 독후감으로 썻던 건데 여기에 한번 복사해서 올려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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