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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불행했던 광서제의 삶
게시물ID : history_243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침
추천 : 13
조회수 : 2760회
댓글수 : 36개
등록시간 : 2015/11/30 17: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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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유년시절의 입궁
1871년 생이고 황제가 된 때는 1875년이니 만 4살때 황제의 자리에 오름.
이때 자신의 부모님을 더 이상 못보게 됨.(아버지는 순친왕 애신각라 혁현, 어머니는 적복진 엽혁나라 완정)
종실인 영수공주도 '황제는 가련하다. 입궁한 뒤부터 친어머니도 못보고 자랐다. 우리는 그를 잘 도와주어야 한다.' 고 함
서태후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광서제는 서태후를 '파파父父-아버지' 라고 부르게 됨.
이후 황제로서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전황제 동치제의 스승이었던 옹동화가 광서제의 교육을 맡았는데 
어린애가 뭘 알겠나 맨날 울고 때를 쓰자 서태후는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아버지인 순친왕을 불러 자식을 감독하게함.
이때부터 광서제도 더 이상 때를 안쓰고 시키는대로 잘 했다는데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여전히 못봄

헛소문
청나라 관례인 항렬에 따라 황제가 되는 법도에도 맞지 않고 동치제의 아들도 아니고(물론 동치제는 아들이 없었지만) 황제가 되기에는 먼 종실이었던 
재첨(광서제의 이름)이 황제가 된 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굉장히 이상하게 보였음. 그래서 그런지 '사실 지금 황제는 서태후의 숨겨진 사생아이다' 라는 
소문이 만연하게 퍼짐

서태후의 엄격한 훈육
당시 태감 구연재는 서태후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간추려보자면 대략 내용이 이럼.
'중국 4억 인구중에 황제만큼 고통스러운 사람이 없다. 다섯살부터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 비록 순왕의 복진(광서제의 친어머니) 이라 할지라도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매일 태후에게 가서 문안인사를 드려야 하고, 한번 만나면 매섭게 질책했다. 위엄이 누적되면서 황제의 간담은 작아져 사자를 만나는 것처럼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황제의 식탁에는 대부분 썩거나 쉰 반찬이라서 이를 바꾸려고 해도 태후는 항상 검소한 덕을 요구하였으므로 황제는 배부른 적이 없었다.그 고독함과 어려움을 순왕의 복진이 말하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광서제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굉장히 마른 체구인데다 어린 시절에 태감들이 있는곳에 가서 몰래 빵을 훔쳐먹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듯. 

동태후의 죽음
잘 알다시피, 동태후와 서태후는 각각 함풍제의 정실, 후궁임. 광서제가 서태후와 죽은 함풍제의 양자가 되었으니 동태후도 족보로 보면 광서제의 어머니가 됨. 실제로도 동태후는 황제를 친아들같이 대해주었고 두 사람 사이도 좋았음. 그런데 광서제가 열한 살이 되던 해 동태후가 급사함. 
광서제는 '동태후의 관대 옆에서 울고 또 울었다' 고 기록되어있음.

정략결혼
서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남동생 예허나라 구이샹의 딸을 황제와 결혼시킴. 이 황후가 융유황후인데, 당연히 황제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혼인. 옹동화의 일기에 따르면 황제는 결혼식 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지럽다고 호소하며 먹은 것을 토했다' 고 함.
광서제는 신혼 첫날 밤 사촌누나이자 자신의 아내인 융유황후에게 '누님을 황후로서 존경합니다.' 라는 말을 전함. 그 이후로는 둘 사이가 좋지 않았음

청일전쟁의 패배
머 잘 알다시피 청vs일본, 청의 완패. 당시 청은 국지전을 예상하고 이홍장의 북양함대만 출전시켜 총력전을 준비한 일본에 짐. 
그 북양함대도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강한 함대였는데 암튼 짐.
소식을 듣고 황제와 태후는 통곡했다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봤듯이 광서제는 입궁한 뒤 어머니를 못보고 자람. 어머니인 엽혁나랍씨는 남편 순친왕과의 사이에서 여섯 자매를 두었는데 광서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렸을적 요절함. 그중 한명은 태어난지 하루만에 죽음. 이런 연유로 아들인 광서제를 굉장히 그리워하면서 황제가 입궁하기전 어렸을적 입었던 옷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함. 1896년 엽혁나라씨의 병이 위중해지자 서태후는 황제를 그녀에게 보냈는데, 자신의 아들을 보고도 아무말없이 그냥 바라만 보다가 죽음. 어머니의 죽음 이후 광서제는 11일간 조회를 열지 않았고, 후에 '순왕의 적복진 엽혁나랍씨는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 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짐(이 부분은 중국 위키백과에서 번역한 내용인데 혹시 이 내용이 틀린것이라면 댓글을 달아주기 바람)
(참고로 서태후가 부의(선통제)를 황제로 세우려고 하자 '내 아들을 죽여놓고 손자까지 앗아갈 셈이냐' 라고 울부짖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건 그냥 근거없는 야사)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 이른바 '무술육군자' 라고 불리는 청년들과 함께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면서 청을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 체제로 변환시키려고 함. 그러나 영록을 비롯한 보수파가 완강하게 버텼고, 급해진 강유위와 담사동은 당시 군부의 실세였던 원세계에게 서태후를 암살하자고 했는데
처음에는 동의해놓고 나중에 와서 '아 이건아닌듯' 하고 생각을 바꾼 원세계는 오히려 이 내용을 서태후에게 그대로 일러바침. 결국 담사동은 사형되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도망. 나중에 서태후는 황제를 불러내 '조상을 잊은 불초한 놈, 머저리 같은놈, 조종지법이 중요하나 강가란 놈의 법이 중요하나' 
라며 힐난.(신기한 것은 의화단의 난 이후 근대화를 하라는 요구에 따라 서태후는 '광서신정' 을 발표했는데, 이 내용이 변법자강운동 시기의 정책과 
매우 유사함.)이후 '니가 날 죽이려했으니 너도 죽어봐라' 라며 황제에게 독약을 내렸는데, 아랫사람들의 만류로 결국 마시지는 않음
이후 황족중 한명인 15살의 부준을 황제로 앉히겠다며 광서제를 퇴위시키려 했으나 유럽열강의 간섭으로 실패함

감금생활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광서제는 모든 실권을 잃은 뒤 이화원에 감금되었는데, 공식적인 상황에서만 자금성에 들어갈 수 있게 됨.
여름에는 주로 옥란당에서 생활했는데 이후 푸이의 스승이었던 레지날드 존스턴의 회고에 따르면 '옥란당 안에는 전부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고 함
문을 열면 밖의 풍경은커녕 벽만 보인다 이소리임. (서태후 싸이코패스ㅎㄷㄷ)

진비의 죽음
1900년에...아시다시피 의화단의 난이 일어남. 이때 광서제는 태후에게 '의화단을 믿고 서양에 대적해서는 절때 안되니 저놈들 어떻게좀 하고 
서양놈들 건드리지 마세여' 라고 건의했으나 서태후는 쌩깜. 그결과 유럽과 일본의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오고, 황족들은 전부 서안으로 피신가게됨. 이때 광서제는 자신은 북경에 남아있겠다고 했으나 결국 끌려감. 이때 서태후는 황제의 첩이었던 진비珍妃에게 '서양놈들한테 욕보일 수 
있으니 차라리 자결하라' 고 했지만 거부하자 우물에 던져 살해. 

독살
광서제는 1908년 38살의 나이로 사망함.
유년시절부터 몸이 안좋아서 항상 병을 달고다녔기 때문에 이때까지 역사학계에서는 자연사로 생각했었음
그런데 좀 석연찮은 점이 있다면 당시 어의였던 굴계정의 증언에 따르면 황제는 죽기 3일전 복통을 호소하며 침대에서 마구 굴렀다고 함.
그래서 확인차 2008년에 부검을 해보니 독약 성분인 비소가 어마무시하게 많이 나옴.
결국 독살인걸로...






광서제의 초상화. 사진 아닙니다.




光绪绘画作品





光绪皇帝御笔书法광서제가 쓴 글과 그림들










실제로 광서제는 신하들에게 '청나라의 신민들을 위해서라면 내 권력을 잃어도 무방하다' 고 말하고 다녔을 정도로 애민정신이 있었지요. 
자작시에서도 '서북은 쌓인 눈으로 밝은데 백성들은 눈보라에 떠는구나' 라는 구절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는 운이 안따른 양반인듯.

열심히 쓴건데 너무 길어서 스크롤 숙숙 내리신건 아니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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