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까지만 해도 중세유럽은 암흑과 무지가 지배하는 시대로 알려져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이런 통념을 뒤집는, 즉 유럽중세는 무지나 암흑과 전혀 거리가 먼, 찬란한 문화와 예술이 꽃피던 시대였다는 학설이 주류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두 학설 모두 반은 맞도 반은 틀린 게 아닌가 하네요.
(1) 로마는 476년에 멸망했는가?
중세는 분명 로마시대에 비해 분명 퇴보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열등한 야만인들이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 법을 집행하고 공공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중앙정부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봐야하겠지요.
실제로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인들, 가령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오도아케르나 그 오도아케르를 물리친 테오도릭 1세 모두 로마의 이름으로 통치하고자 했습니다. 이 둘은 모두 고트족(게르만 족의 일파)이었지만, 로마의 유산을 계승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정제(正帝)를 대신해서 통치한다고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였습니다.
테오도릭 1세가 건설한 제국의 최대판도
특히 서로마 제국의 판도를 거의 부활시킬 뻔했던 테오도릭 1세의 경우 그 자신이 8세부터 18세가 될때까지 10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질생활을 하면서 로마문화와 정신을 체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로마의 이름으로 통치를 한다고는 했지만, 로마시민, 원로원, 제국을 잇는 고속도로, 식수와 식량을 공급하는 네트워크로 대표되는 로마세계는 이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들 휘하에 있던 게르만인들 덕분이었고요. 그리고 이 게르만인들은 전혀 로마화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테오도릭 1세는 이들을 위한 법을 따로 적용해야 했습니다. 기존 로마인들은 로마법으로 다스리되, 게르만인들은 게르만법으로 다스렸던 것입니다.
아울러 전쟁수행에 큰 공을 세운 게르만인들에게 보상을 해줘야 했었고, 이는 당연히 이탈리아의 기존 귀족들의 특권을 일부 빼앗는 것을 의미했지요.
하지만 그는 기존 로마귀족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하지 않았고, 가능한 많은 로마귀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플라비우스 카시오도루스>라는 사람인데, 그는 테오도릭 밑에서 총리에 해당하는 직책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테오도릭의 영광을 찬미하는 역사서 <고트족의 역사>라는 저서를 저술하기도 했죠.
콘스탄티노플의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그의 배반(?)이 괘씸해보였는지, 나중에 테오도릭이 죽고 동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수복했을 때 카시오도루스는 이적혐의로 심문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카시오도루스는 자신은 명예로운 로마인처럼 행동한 죄밖에 없고, 당시 테오도릭의 치세는 지극히 로마적이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변호했습니다.
즉 서로마의 멸망 후 적어도 2세기 동안 <로마적인 것, ROMANITAS>은 꽤 큰 힘을 발휘하던 개념이었다는 것이죠. 어떤 먼 옛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 지금 당장 실존하는 권력체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로마의 유산>이 서유럽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프랑크족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에서 독자적인 게르만 왕국을 건설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수복한 동로마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죽자마자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오랜 숙적 페르시아가 제국의 동부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고, 심지어 619년에 이르면 제국에서 가장 풍요롭던 지방 이집트마저 페르시아 제국의 수중에 떨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이탈리아 반도는 고트족, 롬바르드족, 동로마제국 간의 각축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어떤 일관성 있는 중앙정부가 나타나지 못했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에 몸을 위탁하거나 또는 자치정부를 세워 스스로를 구제해야 했습니다.
상황이 그러할진데 서유럽에서 <로마적인 것>을 강제할 정부나 권력이 없었고, 그나마 로마적인 것을 명칭으로나마 간직한 것은 <가톨릭 교회>였습니다. 교회의 행정체계와 명칭 등은 모두 로마제국의 행정체계를 빌려온 것이었으며, 교회의 공용어 또한 제국의 언어, 즉 라틴어를 그대로 간직했습니다.
특히 당시 모든 종류의 중앙정부가 와해되고 곳곳에 왕을 자칭하는 소규모 왕국들이 탄생하면서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진 서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는 요순시대(?)와 같았던 로마세계와 현세 간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매개체였습니다.
(2) 로마 이후의 세계, 이슬람의 도전
<가톨릭 교회>가 <로마세계>를 대체하면서, 서유럽은 미약하게나마 다시 일종의 일체감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게르만 왕국들이 난립했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신앙을 공유하게 되었고, 심지어 서기 8세기까지 계속 게르만 전통 신앙을 믿었던 작센족 또한 샤를마뉴의 무자비한 정복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으로부터 전례없는 위협이 유럽을 찾아옵니다.
<지하드>를 외치는 전사들이 이교도들을 모두 이슬람의 집(움마)에 복속시키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슬람 세력은 서로 싸우느라 지쳐버린 동로마와 페르시아를 쉽게 물리치고, 이집트, 시리아, 북아프리카를 손쉽게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에 위치해 있던 고트족의 왕국도 어이없이 쉽게 무너져내리면서, 유럽은 콘스탄티노플, 피레네 산맥, 그리고 지중해 등으로 3중으로 포위당한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을 쉽게 정복한 이후, 프랑스까지 손을 뻗혔고, 한 때 프랑스 또한 정복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에 의해 패배하면서, 프랑스의 이슬람화는 저지당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옛 로마제국의 곡창이었던 시칠리아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당했고, 이탈리아 남부는 끊임없이 침략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한 때 로마 성벽 외곽에 있었던 성베드로 성당과 성바울 성당을 약탈했으며, 전성기 때는 로마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까지 점령했었습니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를 보호해야할 일차적인 책임은 여전히 로마제국의 정통인 동로마제국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이탈리아의 안보를 전혀 책임지지 못했고, 로마의 교황은 자연스럽게 북쪽의 게르만 왕국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게르만 왕국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빠서 콘스탄티노플과 마찬가지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죠.
그리고 상황이 호전되면 동로마는 안보도 제공해주지 못하면서 쓸데없이 로마의 일에 참견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타난 인물이 <샤를마뉴>였습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을 전례없는 수준으로 확장시켰고, 이탈리아의 롬바르드족을 물리쳤습니다. 서유럽을 사실상 통일할 정도로 거대한 제국을 이룩하자, 로마의 교황은 그와의 동맹을 추진하였고, 그를 <황제>로 선포합니다.
이는 동로마의 종주권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교황이야 말로 서유럽의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계략이었죠.
(3) 유럽의 탄생
프랑크족의 왕 샤를마뉴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동맹을 맺으면서 비로소 유럽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샤를마뉴는 교회에 많은 특권을 제공했고, 이는 중세시대 동안 교회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특히 봉건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에게 봉건귀족 못지 않은 권력을 쥐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이후 유럽사를 특징짓는 황제권과 교회권의 양분, 경쟁 그리고 대립은 이때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겠씁니다.
다른 한편 그 자신이 고전문화 애호가였던 샤를마뉴는 라틴고전을 부흥시켰고, 그의 치세 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알파벳 소문자(abcdefg....)가 발명되었습니다.
프랑크 제국의 강력한 창과 검 아래 전성기의 로마제국도 이루지 못한 엘베강 동쪽의 기독교화(다른 말로는 로마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기독교세계를 게르마니아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역사의 주무대를 이탈리아와 지중해에서부터 북쪽 프랑스와 독일로 이동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죠.
그리고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이후 유럽역사 1000년을 특징짓는 <신성로마제국>의 근거가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의 독특한 정치체계와 문화는 유럽 중세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죠.
로마법, 게르만법, 기독교 성직자, 봉건 영주, 자유 상업 도시, 그리고 기사들 이 모든 것이 혼재되어 있던 곳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이었습니다.
18세기에 이르면 볼테르의 말마따나 전혀 신성하지도, 로마적이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제국이지도 않았지만...
샤를마뉴의 후계자들은 분명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임을 자처했고, 로마의 후계자 (즉 세계의 통치자) 를 자처했으며 그리고 자기들은 반드시 <제국>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땅 위의 현실은 그러한 이상과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갔지만, 그러한 모순적인 것들이 중첩되고 혼재되어 있는 독특한 모습이 바로 중세시대를 관통하는 특징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