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역사] 기독교는 어떻게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나? 의 글의 관련 자료로 참고하세요.
책 <블랙 아테나>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급진적인 프리메이슨주의가 절정에 달하고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질서를 가장 날카롭게 위협한 시기는 프랑스 혁명기였다. 정치·군사적 위협과 더불어, 반성직자적이고 친혁명적인 샤를 프랑수아 뒤퓌의 지적 도전이 뒤따랐다. 헤로도토스를 따라 이집트 신화와 그리스 신화가 같다고 본 이 위대한 프랑스 학자는, 이집트 신화는 본질적으로 별자리의 움직임을 재구성한 것이며, 그리스도교는 이 웅대한 전승의 잘못 이해한 파편을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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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년과 기원후 150년 사이의 메시아 신앙과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다는 생각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앞서 언급한 로마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 완전히 설명할 수도 없다. 또 다른 요소는 양자리 시대에서 물고기자리 시대로 넘어가는 점성학적 변화였다. 춘분점세차를 언제 누가 발견했는가에 관한 논쟁을 벌이지 않더라도, 기원전 50년에 그것이 이미 폭넓게 알려져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기원전 50년과 기원후 150년 사이의 시기를 거치면서 춘분점이 양자리에서 물고기자리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점성학적 변화의 연쇄 안에서 비로소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네 번째 『목가』를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40년에 씌어진 이 작품은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 위대한 세기들의 행렬이 새롭게 시작되나니 ... 사랑스런 루키나Lucina여, 오로지 당신만이 한 아이의 탄생에 미소짓고 있도다.
그 아이의 통치하에 철 종족의 시대가 끝나고 황금 종족이 세계 도처에서 솟아오르리니! 아폴론이여, 이제 바로 당신이 왕이로다!
베르길리우스는 계속해서 그 아이의 아버지이자 콘술인 폴리오를 '영광스런 시대'를 불러오는 자로서 맞이한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될 것이고, 새로운 트로이 전쟁을 비롯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림을 예견하는 듯한 내용을 달가워하지 않는 근대의 성향 때문에, 대부분의 고전학자는 일원론적 접근법을 사용하여 이는 단지 친구의 아이가 태어난 일을 둘러싼 시적 착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이는 가정은, 베르길리우스가 시인으로서 서로 다른 차원의 의미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폴리오의 아이가 태어난 일과 베르길리우스와 폴리오의 후원자인 아우구스투스 치세에서 평화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서로 다른 의미가 중첩되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또한 새로운 젊은 신의 도래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분명히 천체 혹은 별의 시대 변화, 즉 새로이 등장하는 물고기자리 시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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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를 통해 이 시대가 천체의 운행을 극히 중요시했음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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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젊은 연인 안티노우스는 헤르모폴리스에 있는 지혜와 측량의 신 토트의 주성소主聖所에서 토트의 사제들과 오랜 시간 논의했다. 그 직후 안티노우스는 나일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집트의 주요 전승은 오시리스가 익사했다고 했다. 전체적인 사건은 신비에 둘러싸이도록 의도되었으며, 여전히 그렇게 남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치된 의견은, 그 사건이 일종의 재앙을 피하기 위한 자발적 희생이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하드리아누스는 즉각 안티노우스를 새로운 오시리스로 선언했으며, 그가 장려한 제례는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제국이 후원한 것 이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안티노우스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구세주를 의미했는지 여부에 관한 논의는 공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가 자신들의 새로운 오시리스인 예수를 이런 식으로 보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다른 많은 모습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나는 새로운 성상聖像, 즉 물고기의 성상을 거론하고자 한다. 이집트나 유대 종교의 전승에서는 물고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집트의 경우, 몇몇 물고기가 신들과 관련되었고, 일부 노모스에서는 특별한 종류의 물고기가 숭배되거나 금기로 여겨졌다. 더욱이 후기에는 물고기가 오시리스의 성기를 삼켰다는 전설이 생겨났으며, bwt(부트:물고기)라고 쒸어진 단어는 '혐오'를 뜻할 수도 있었다. 이렇듯 물고기가 이집트 종교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는 어떤 식으로도 생각할 수 없다.
의심스러운 경우인 필리스티아인의 신 다곤을 제외하면, 구약성서에서 물고기는 어떠한 종교적 함의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신약성서에서는 눈에 뛰게 두더러지는 역활을 담당한다. 핵심 사도들은 어부였으며, 고기잡이의 비유가 많이 나타난다. 두 마리 물고기와 다섯 덩이의 빵에 관한 기적도 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상징적인 최후의 만찬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나눠 주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제, 그리고 물고기가 최후의 만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생각은 초기 그리스도교 도상圖像의 표준을 이루었다. 화체설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모습도 오시리스의 경우처럼 그저 빵이나 곡식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한 마리의 물고기이거나 혹은 두 마리의 물고기였다. 뛰어난 초기 그리스도 사상가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기원후 200년경에 이렇게 서술했다. "작은 물고기들인 우리는, 우리 이크투스ΙΧΘΥΣ(물고기)의 형상을 따라 물에서 태어난다."
이러한 믿음은 물고기라는 상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도를 표현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고기의 상징은 종종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에수수Ιησούς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 테우Θεού 휘오스Υιός 소테르Σωτήρ)에서 각 단어의 첫 글자를 모은 ΙΧΘΥΣ(이크투스)에서 유래한다고 추정되곤 한다. 그러나 물고기의 상징은 그러한 철자의 단어보다 더욱 일찍이 나타나며, 따라서 그러한 단어 조합이 물고기의 상징을 설명해준다기보다는 그 반대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흥미롭게도, 그리스도를 물고기로 표현한 최초의 사례는 2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에서 나타난다. 대체로 볼 때, 예수를 둘러싼 숫양(어린 양)이라는 양자리 관련 상징 체계가 마찬가지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 물고기, 혹은 특히 12궁에서 나타나는 두 마리 물고기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도가 자타 모두에 의해 새로운 물고기자리 시대의 새로운 종교를 추종하는 자들로 여겨졌음을 나타냄에 틀림없다.
요점을 개괄하면 이렇다. 기원후 2세기에 나타난 양자리에서 물고기자리로의 변화와 시리우스 역법 주기와 365일 역법 주기의 완결 시점이 놀랍게 일치한다는 사실은, 이집트 종교에 가해진 장기간의 사회적·경제적·민족적 압박과 더불어 이집트 천문학의 심장부에 강력한 자기 파괴적 힘을 창출해냈다. 더욱이 이집트 종교는 심원한 주기적 의미를 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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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기성의 개념, 즉 탄생과 죽음에 뒤이은 부활이라는 개념은, 르네상스와 계몽 시대에 자칭 이집트 종교의 복원자들이 나타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집트 종교가 초기 그리스도교 아래에서 변형된 형태로 잔존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 저자들이 이집트인의 속성으로 생각한 일반인의 열정적인 신앙심과 사제들의 섬세한 철학 및 신학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더욱이 교회 조직과 교의의 차원에서 볼 때에도,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이집트 종교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