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31년, 예수 그리스도라고 알려진 남자가 죽은 해, 로마는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치세 17년째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많아야 100명이었지만 300년도 지나지 않아 제국 전역에서 가장 널리 확산된 종교가 되었습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유대교의 이단으로 시작한 종교가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제국의 국교가 되었을까요? 게다가 이들은 무력으로 개종을 위협한 것도 아니었고, 또는 세속권력의 비호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순수 포교활동으로만, 그리고 많은 경우 순교를 자처하면서 자신들의 세를 불렸습니다.
한 역사학자는 기독교의 교세확장을 다음과 같이 추정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총 인구를 6천만이라고 가정했을 때)
서기 41년 - 1000명 / 0.0017% 총인구대비 규모
서기 50년 - 1400명 / 0.023%
서기 100년 - 7530명 / 0.0126%
서기 150년 - 40,496명 / 0.07%
서기 200년 - 217,795명 / 0.36%
서기 250년 - 1,171,356 명 / 1.9%
서기 300년 - 6,299,832 명 / 10.5%
서기 350년 - 33,882,008 명 / 56.5%
물론, 이 수치는 실제 그러했다는 수치는 아니고 추정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에 정말 비약적인 팽창을 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역사학자들도 이를 두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라고 합니다.
예수는 메시아를 자처하여 제국로마로부터는 반란세력, 그리고 유대인 기득권세력으로부터는 신성모독자로 간주되어 처형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를 인간이 된 신으로 받들고, 그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제국으로부터 처형당한 범죄자이자 기존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신성모독자로 알려진 이를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더 확산시키려고 하는 것은 분명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소위 12제자라고 일컬어진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동포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했고, 일부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을 초월하여 세계 곳곳으로 진출했습니다.
그 팽창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크게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1) 디아스포라 유대인
(2) 헬레니즘과의 융화와 개방성
(3) 도시중심의 포교와 자선
(4) 운
(1) 디아스포라 유대인
기독교의 확산을 이해하려면 먼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해 알아봐야 합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란, 당시 지중해 세계 전역에 퍼져있었던 유대인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특출난 상업민족으로, 예루살렘의 파괴 이전에도 고전시대 지중해 전역에 널리 공동체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이라고 알려진 지역 외에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은 아테네, 코린트, 테살로니카, 에페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이집트), 로마, 그리고 카디즈(스페인)에 거주했었습니다.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공용어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널리 쓰이던 그리스어였습니다. 고전 그리스어는 아니고, 민중 그리스어, 또는 장사치들의 그리스어라고 불리던 코이네 그리스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최초의 성경은 히브리어가 아닌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여졌고,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제자들도 코이네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언어의 장벽 없이 널리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리스 무역항들을 따라서, 먼저 유대인 공동체를 상대로 유대인들이 믿던 종교를 진정으로 완성시켜줄 참 진리를 찾았다고 하면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사도 바울과 베드로가 활동했던 반경은 주로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는 도시들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로마 제국 당국도 기독교를 새로운 종교가 아닌, 유대교의 아종으로 보고 별 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유대교에는 없는 새로운 특징이 있었습니다.
바로 (2) 헬레니즘과의 융화와 개방성이 였습니다.
플라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성경 원전에 <로고스>라는 단어로 나타납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그리고 <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 지극히 그리스적인 발상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논리를 고전 그리스 철학과 접목시키려고 많이 노력했고, 그 후 많은 성직자들도 플라톤의 논리와 기독교를 접목시키고자 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이죠.
육신과 영혼의 이원론, 이데아와 물질, 기독교의 가르침을 그리스 고전의 언어로 소화시킨 것입니다.
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탈출구를 마련해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 세계와 유대세계의 경계인에 위치한 이들로, 정체성이 흔들리면서 혼란스러워 했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헬라인(그리스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기독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할 필요가 없으며 <먹는 것>에 대한 제약도 필요없다고 한 것은 큰 기폭제가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에서도 한 에피소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꿈에서 천사가 나타나 불결하다고 생각되는 고기를 먹으라고 하자, 베드로는 불결한 것은 먹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베드로에게 <나의 창조물을 불결하다고 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음식을 도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이는 베드로는 이 계시를 기독교가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로마인 백인대장을 찾아가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교리를 심화발전시킨 것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유대교에게 적용되는 많은 풍습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 또한 헬레니즘을 받아들이면서 정교화되었고, 이는 그리스인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그리스인들 본인 중에서도 놀고 먹고 마시는 신들의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기독교를 통해 자신들의 정신 세계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편 기독교는 (3) 도시 중심의 운동이었습니다. 한 학자에 따르면 기독교는 당대의 Urban Revolution(도시혁명)이었다고 합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농촌이나 시골이 아닌 도시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고, 그리스인들 또한 도시 중심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확산은 마치 역병이 유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발전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가난한 사회적 약자, 즉 노예나 사회의 하층민들 중심으로 퍼졌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도시의 신흥 부르주와(?)들을 중심으로 퍼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낮지도 않지만, 동시에 그렇게 높지도 않은 계층 사이로 기독교는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면서 도시민들 사이에서 일종의 패션, 유행을 일으켰다는 것이죠.
그 중에서는 권력층과도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에서 순교한 이그나티우스라는 주교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를 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는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갑니다. 오 형제, 자매들이여, 나의 길을 방해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뒤집어보면, 그를 구명해주기 위해 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도시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많은 자선활동을 했는데, 특히 복지체계가 갖추어지지 못한 고대세계에서 이는 엄청난 강점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과부, 노인, 병자들을 돌보았고, 이는 특히 가뭄이나, 기근, 역병이 돌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같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서 더 많은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로 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정말 빈자들만의 공동체였다면 이러한 자선활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겠죠.
일부 학자들은 도시의 중간계층(그리고 일부 상위계층)이 주도한 운동이었기 때문에, 이런 자선활동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폭발적인 운동이었기 때문에, 로마제국은 이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 탄압했습니다.
서기 300년에 이르면 이미 기독교가 제국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데 이들 대다수가 도시 거주민들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지닌 영향력을 단순 퍼센티지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결국 이미 도시 사회의 주류가 되어버린 기독교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술책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천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대 그리스반도와 터키반도가 가장 부유한 지역이기도 했지만,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로 그리스 계 도시들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를 이곳에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죠. (당시까지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는 기독교가 확고한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는 (4) 타이밍 (운) 이 좋았습니다.
기독교가 번창하기 시작할 무렵, 많은 종류의 일신교가 유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시스(ISIS, 이슬람 국가가 아니라.... 이집트의 여신 ISIS) 여신, 시빌라 여신, 그리고 미트라 태양신 등 다신교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일신교류가 전반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는 전통적인 다신교의 권위가 상당히 떨어졌다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시스 여신에 대한 신화는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하는데, 아마 기독교가 여기서도 일부 모티브를 차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로마인들은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상당히 로마화하여 묘사했었는데, 이러한 형상화가 결국 마리아까지 이어졌습니다.
로마인들이 묘사한 이시스 여신
실제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또한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에는 본인부터가 미트라교(태양을 숭배하는 일신교)를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일신교가 유행하고 있던 참에 기독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했던 것이고, 탄압과 순교에도 굴하지 않는 이들이 보여준 굳센 의지와 자선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고 결국 여러 비슷한 유행중에서도 기독교가 가장 확실한 경쟁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세시대와 근세까지 사람들은 기독교가 왜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나에 대한 물음에 단순히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DEUS VULT)라는 문장으로 대답했었는데
요즘 진행된 연구 해석을 보니 상당히 재미있고 참신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