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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임금의 피난길(1부)
게시물ID : history_242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4
조회수 : 2903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5/11/23 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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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아래의 "임진왜란때 선조가 도망가지 않았다면...."의 글을 읽고 떡밥을 물었습니다.
도망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생겼으리라는 것은 여러 의견들이 있겠으니 선조 임금이 어떻게 도망갔는지에 대한 피난여정의 글을 올려봅니다.
평소 써 둔 글이 있어서 앞 뒤 말 다듬어서 졸속으로 몇 자 적어 보겠습니다.


시작하며

임진왜란 후 선조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간 상황을 당시에 서술된 여러자료들을 모아 편집하고 약 2% 정도 각색하여 올려 봅니다.

당시 급박했던 상황과 지리멸렬 쪽박 차던 임금과 신하들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선조 임금에게 동정심이 생길 정도입니다.

(※.1 출전자료들은 인용 할 때 마다 그때그때 저자와 출전명을 ​기재 합니다. 후대 사람들의 기록들도 있지만 당시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병조 좌랑 박동량의 기록이나 내의원 부제조로 영변까지 호종한 정탁 등의 기록은 당시 상황에 대해 상당히 객관적인 자료들이라 할 만 합니다.)

(※.2 너무 길게 글을 쓰는 버릇이 있어 글 읽으시다 졸리시는 분이 많을듯 하여 부득이하게 글을 중간에 끊겠습니다. 이 주제는 약 3부 까지의 분량이 될 듯 합니다.)



선조 임금의 피난에 관한 글이므로 임진왜란 발발 직전과 초반 상황은 건너 가겠습니다.


□ 4월 28일.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신하들과 상의한다.

이날 오후에 신립이 패전하고 충주 방어선이 뚤렸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심각하게 한양을 버릴것을 고민한다. 대부분 신하들은 종묘사직을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고, 죽을 각오로  한양 사수를 외치면서도 일부 신하들은 가족들을 미리 강원도 등지로 피난 시킨다.


신하들의 한양 사수 의견을 들은 선조, "임금이 얼굴빛이 변하여 내전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  선​조실록 선조 25년 1592년. 4월 28일.

상촌집(象村集) 59권. 본국이 병화를 입은 기록[本國被兵志])

"29일 패보(敗報)가 이르자 30일에 선묘(宣廟, 선조)가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도 신립의 패전 소식은 4월 29일에 보고된 것으로 기록된다. 실록은 28일, 다른 자료는 29일로 기록된다. 

29일. 저녁에 전립(氈笠)을 쓴 세 사람이 말을 달려 숭인문(崇仁門)으로 들어왔다. 성내 사람들이 다투어 군중(軍中)의 소식을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순변사 군관의 하인인데 어제 순변사는 충주에서 패하여 죽고 모든 군사는 무너져 흩어졌다. 우리들은 탈출하여 홀로 와서 집안 사람에게 돌아와 보고하여 피난을 하려 하는 것이오.”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크게 놀라 지나는 곳마다 서로 말을 전하여 잠시 동안에 온 성중이 모두 진동하였다.

(저녁에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이 도성의 대문안으로 말을 달려 들어와도 그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도, 제지하는 자도 없다.)


이날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

선조는 세자 책봉을 협의하기 위해 대신들을 불러 들이다가 자신이 정식 조회때 입는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여 옷이나 갈아 입고 회의 하자고 하다가 신하들이 이 난리통에도 패션은 무슨... 잔소리를 들고 할 수 없이 그냥 평상 근무복을 입고 회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놈의 패션... 요즘 그녀의 패션 외교와 같은것인가?


광해군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는데 백관이 입조(入朝)하여 하례하는 동안 허둥지둥하여 신하들은 동ㆍ서반(東西班)도 구분하지 못하고 인장(印章)도 교서(敎書)도 없었으며, 궁료(宮僚, 세자를 수종하는 관리들)들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조선왕조에서 가장 초라하게 책봉된 세자인듯 하다.


 "이때 대신 이하 모두가 입시할 적마다 파천의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오직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만은 그저 울기만 하다가 나와서 승지 신잡에게 옛날에도 피난한 사례가 있다고 말했으므로 모두가 웅성거리면서 그 죄를 산해에게 돌렸다. 양사가 합계하여 파면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도성의 백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도성을 고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 선조실록  25년, 1592년4월 28일.

이로써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갈 것을 결심하다.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경성 도검찰사(京城都檢察使)로 삼아 한양 도성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한다.(남아 있으라는 이야기다.)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기록을 보면 임금이 한양을 사수할지 혹은, 잠시 북쪽으로 피난을 갈지 신하들끼리 서로 의견이 엇갈리다가  상주와 충주의 패전을 직접 목격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장계가 도착하게 되는데, 당시 궁궐에 등불 키는 군사들도 다들 도망 가버려서 선전관청(宣傳官廳)에서 횃불을 얻어 겨우 이일의 장계를 읽었다고 한다. 이일의 장계에는,

"內言賊今明日間 當入京城" "오늘 내일 중으로 왜적들이 한양에 들이 닥칠 것이다." 이 장계가 조정에 전해지자 앞서 논란을 벌이던 많은 신하들은 일심하여 "닥치고 피난!" 


선조 임금과 조정에서는 겉으로는 한양 사수를 외치면서 한편으로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을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최흥원(崔興源)을 황해, 경기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당일에 떠나도록 한다.

이원익은 안주 목사(安州牧使), 최홍원은 황해 감사로 재임 시절에 민심의 호응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임금이 북쪽으로 피난갈 경우 혹시나 백성들이 자기에게 테러나 반란 같은게 있을까 두려워하여 사전에 정비를 실시하는 것이다. 도망가는 모양이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장령 권협(權悏)만이 홀로 임금이 한양을 지키기를 청하지만 모든 이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왕따 당한다.

이와 반대로 난중잡록에서 이 장면은 대체적으로 선조 임금은 한양을 사수하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전한다.

당시 상황에 대한 난중잡록의 기록을 인용해 보면,

대신 유홍(兪泓)이 울며 간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있는데, 전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가벼이 움직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 흔들리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곤룡포로 눈물을 닦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소.” 하고는, 백성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곧 성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 볼 계획하에 애통한 교서를 내렸다.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경기의 남은 장정을 있는 대로 거느리고 한강 가에 진을 치게 하고, 병조와 비변사(備邊司)에게는 성을 지키는 기구를 독려해 마련하도록 하였다.

열흘 가까이 되자 백성들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지라, 급히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엄격히 지키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출입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귀천 남녀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성에 줄을 걸고 내려가 다 달아났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속이 뿔뿔이 헤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줄로 서로를 엮어 도망치기도 하였다.

서울 안의 불량한 무리들은 작당하여 고운 여인과 재물을 찾아다니다가 보기만 하면 곧 약탈하고 하였는데, 상대가 고관이라 해도 분별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이 길에 가득했고 부자(父子)와 부부가 서로 잃어버린 채 도망쳐갔다. 임금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적을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결론은 민심(民心) 수습의 실패로 인해 파천(播遷)을 결심하는 것으로 서술한다.

(난중잡록은 전라도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쓴 것이니 그가 직접 본 것은 아니다.)

 

당시 지방의 조선군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창원(昌原)에 잔류하고 있던 왜적 40여 기(騎)가 피란하는 사람들을 추격하면서 강물을 거슬러 건너와 의령(宜寧)의 신반(新反, 의령과 합천 경계)을 약탈하고 합천성까지 들이닥치니, 경상 우병사 조대곤(曹大坤)이 마침 성안에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닥쳐온 줄로만 생각하고 군기와 북을 버리고 후퇴하여 회산서원(晦山書院, 합천 근방)에 숨었다고 한다. (기병 40여 기에 놀라 성을 넘겨 주었다.) - 난중잡록



□ 4월 29일. 종실의 군(君)들이 통곡하다.

임금이 한양을 버린다는 소문을 듣고 해풍군(海豐君) 이기(李耆) 등이 대궐로 찾아와 통곡하며 한양 사수를 외친다.

선조 임금은 종친과 왕자들의 이같은 이야기에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고 일단 여론의 예봉을 피해 본다.

- 선조실록 25년 4월 29일.


왜적의 선발대가 경기도 용인현(龍仁縣) 까지 들어왔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귀영(金貴榮)ㆍ칠계군(漆溪君) 윤탁연(尹卓然)을 명하여 임해군(臨海君)과 함께 함경도로 가게 하고,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그의 아들 전 승지 황혁(黃赫), 동지중추부사 이기(李墍) 순화군(順和君)을 데리고 강원도로 가게 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현지 병력을 차출하게 하다.(각종 기록상 이 사건에 대한 날짜가 다르게 기록된 것이 많다.)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근왕병(勤王兵) 10여만 명을 징발하였다고 한다. - 난중잡록

경상 관찰사(慶尙觀察使) 김수(金睟)도 흩어진 영남의 패잔병들을 수습하며 경남 거창(居昌)에 머물러 있다.

 

유성룡을 포함한 대신들이 일의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거가(車駕)가 잠시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명나라에 군사를 청해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 하니 기다렸다는 듯 곧 파천(播遷) 결정되다.

선조 임금은 유배 되어 있던 전 호조 판서 윤두수(尹斗壽)를 복권 시키고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파천(播遷) 할 경우 자신의 경호 책임자로 임명하다.


임금이 한양을 버릴 준비를 하자 궁궐의 하급 호위군사들은 밤중에 전부 다 도망치고 만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1592년 음력 4월 29일 밤. 궁궐의 문(門)들이 제시간에 닫히지 않았고 시간을 알리는 북(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역사상 실수로 대궐문이 제 때 닫히지 않거나 열리지 않은 경우는 몇 번 있지만 이번 처럼 군사들이 다 도망가 버린 경우는 처음이다.)


29일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공문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다.

공문의 내용은 '경상 우수군은 왜적에게 완전히 괴멸 되고 경상 우수영(거제)이 왜구들에게 함락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경상 우수군의 괴멸 이후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전라 우수군과 함께 출정약속을 하고 출정보고 장계를 조정에 올린리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아직까지 경상도 수군의 피해가 어느정도로 심각한지 알수 없었다.


이순신의 전라 좌수군은 4월 30일 새벽에 출정 하기로 하였으나 이날 오후에 인접한 남해현이 왜구들에게 함락 되기 직전이라는 소문이 전해지고  또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전라 우수군과 합동으로 출동하라는 명이 내려지는 통에 잠시 출정이 보류 되었다. 

  

 

□ 4월 30일 새벽. 드디어 선조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출발하다.

새벽부터 비는 추적추적 오는 가운데 전날 닫지 않은 도성의 대문을 통해 임금과 왕비 및 세자 등이 한양을 버리고 출발한다.

선조 임금이 임금의 표신(標信, 임금의 명령을 받은 증명패)을 병조 판서 김응남에게 주어 파천(播遷)하는 일을 처리하게 한다. 

김응남은 목에 표신을 걸고 피난 길을 지휘하려 하였으나 누구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이제 임금의 명령 따위는 개나 줘라였다.


4월 29일 삼경(三更, 오후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이 되어 대가가 출발하려 하였지만 호위 장수나 호위군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병조 정랑(兵曹正郞, 정5품, 국방부 작전과장 정도?)  이홍로(李弘老)는 표신을 가지고 어가를 호위 할 장수들을 찾아 주위를 두루 돌아다녔으나 도망가지 않고 기다리던 장수는 오직 위장(衛將) 성수익(成壽益) 한 사람 뿐이었다고 한다. 일단 선조 임금은 왕비고 나발이고 다 놔두고 먼저 출발 한다. 정랑 이홍로동강난 초 한자루로 불을 밝혀 들고 임금의 길을 인도해 대궐을 빠져 나왔다고 한다.


당시 도승지(都承旨) 이항복(李恒福)이 임금의 파천 소식을 듣고 궁궐로 들어가 보니 궁중이 텅비어 사람이 없었고 하늘에 큰비가 오고 밤은 칠흑같았다고 한다. 중전(中殿)이 겨우 시녀(侍女) 10여 명과 함께 직접 걸어서 인화문(仁化門, 덕수궁 남쪽 중간 문)으로 힘겹게 나오는데 마침 이항복이 촛불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니 중전이 돌아보고 누구인가 물었고 시녀(侍女)가 도승지 이항복이라 대답하자 중전이 한참 동안 칭찬하고 칭찬하고 또 칭찬하였다고 한다. (도승지가 임금 보다 더 믿음직 하게 보였을 것 같다.) 


"마침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밤은 칠흙같이 어두웠으며 선조 임금은 단지 두서너 명의 젊은 내시와 함께 마루 방에 앉았고 주변에서는 무뢰한들이 궁궐로 난입하여 거리낌없이 궁궐의 보화를 약탈하였고 시녀들은 맨발에 옷(외출복)을 벗고, 혹은 눈물을 흘리고 혹은 통곡하면서 궁문을 흩어져 나오고 곡성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전한다.- 임진일록


왕비와 후궁들도 모두 옥교(屋轎,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마님들이 타는 가마)를 탔는데, 메는 인원은 혹은 7ㆍ8명, 혹은 5ㆍ6명 뿐이라 한다.

(평소보다 인원이 많이 줄어 볼품이 없다는 뜻이다.)

다만 신흠(欽)이 쓴 상촌집(象村集)에는 왕비 이하는 격식에 맞지 않는 방법인 전부 말을 타고 길을 떠났다고 전하는데 대부분의 기록들이 당시 상황을 직접 보고 서술하지 아니한듯 하여 가마를 탔다, 혹은 말을 탔다는 등 기록마다 상이하다.

도승지가 직접 촛불을 잡고 왕비를 모시고 걸어서 성밖으로 나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니 말이다. 


4경(四更,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에야 비로소 궁문을 나와 임금은 말을 탔고, 수행 관원은 질서도 대오도 없이 비를 맞고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임금의 행차(행차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는 돈화문(敦化門)을 나와 돈의문(敦義門)을 빠져 나갔다고 전해진다.

따르는 관원과 대신의 수는 아직까지는 그나마 100여명 정도. 그러나 조선의 왕과 왕실의 행차라고 하기에는 엄청나게 초라하다.


새벽부터 내린 비에 임금의 곤룡포(袞龍袍)도 다 젖어 버렸다. 수행하던 경기 감사 권징(權徵)이 뒤따라 와서 입고 있던 우의(雨衣)를 바쳤다. 

벽제관(碧蹄館)에 도착해서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밥반찬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왕비도 내팽겨 치고 달아나는 상황에서 찬거리를 챙길 여유가 있었으랴. 어쩔수 없이 임금의 피난 행차는 점심을 생략하고 장단(長湍)으로 이동 하였는데 장단 부사는 이미 도망치고 없고 고을은 텅비어 있었다고 한다. 일행이 모두 굶주린 채 잠시 쉬고는 곧 개성부(開城府)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일부 궁인들이 탄 말이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여 임금의 행차 뒷편에서 여인네들의 처절한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누구하나 뒤돌아 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출발하고 나니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불에 타다.

백성들 중 천한 자들이 노비 문서 등을 다 태워버리고 창고도 털고 불을 질러 버렸다고 전한다.

김시양(金時讓)이 쓴 자해필담(紫海筆談)에,

 "이날 적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서울의 백성들은 창고의 물품을 훔치고자 하여 먼저 궁궐을 불태워 버렸다."라고 기록 한다.

​"임금의 행차가 성을 나서니 난민들이 맨 먼저 장예(례)원(掌隸院, 노비 판결부서)과 형조(刑曹)를 불질렀다. 이 두 곳에는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문서(노비 증명서)가 있는 까닭이다. 또 내탕고(內帑庫, 왕실 개인금고)에 들어가 금과 비단 같은 것을 끌어냈으며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을 불질러 하나도 남겨두는 것이 없었다. 역대로 내려온 보화ㆍ귀중품과 문무루(文武樓)와 홍문관에 쌓아둔 서적, 승문원 일기가 모두 타버렸다. 또 임해군(臨海君)과 홍여순(洪汝諄)의 집을 불살랐다. 모두 왜적이 오기 전에 우리 백성들에 의해 불타버렸다".

- 유성룡의 서애집(西厓集)


당시 한양의 화재가 조선 백성들이 지른 불이라는 설과 입성한 왜구들의 소행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혀 있다.

 

아무튼 임금의 밥반찬도 챙기지 못한 상황인데 관공서 문서들도 거의거의거의 하나도 챙기지지 못했다.

이로인해 무수한 역사적인 자료와 더불어, 노비문서들도 다 타버렸고 나중에 실록을 기록할 사초 같은게 남아 있을리도 없다.​ 겨우겨우 나중에 여기저기 자료들을 긁어 모아 날짜부터 뒤죽박죽인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 만들어진다.

종묘 각실(各室)의 인보(印寶)와 의장(儀仗)은 모두 버렸으며, 문소전(文昭殿,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사당)의 위판(位版)은 지키던 관원이 땅에 파묻어 버리고 도망갔다. 이후 문소전의 제례(祭禮)는 마침내 없애고 거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왕실의 큰 제사를 지낼 때 제사를 지내는 격식이 까다로운데 그걸 대대로 기록한 책들이 하나도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를 정도였다. 나이든 신하들의 희미한 기억에만 의존하여 제사를 아주 검소하게 지내게 된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선조수정실록 4월 기사.

​ "역대의 보완(寶玩)과 문무루(文武樓)·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書籍), 춘추관의 각조 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史草),《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草稿).】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타버렸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그때 이전과 그때 이후로 역사가 단절된듯 하다.


원균과 임란 발발 직후 경상도 수군의 기록(記錄)

임진왜란에 대해서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조정으로 보낸 임진장초와 개인 일기인 난중일기라는 훌륭한 가치의 기록이 존재한다.

두 기록이 인물에 대한 평이나 사건을 해석하는 배경에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되겠지만 그 외 사건이 발생한 시간이나 정황, 등장인물 등의 사실에 대해서는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런데 경상 우수사 원균은 임진왜란 초반(4월 13일 부터 4월 말까지) 그가 직접 남긴, 경상 우수군이 언제 출전하였고 규모는 얼마였는지,  언제 어떻게 괴멸 되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관련 기록을 조사하다 보면 왜적이 침략하던 당시 전라 좌수군으로 보낸 몇 차례 공문 내용을 인용한 것만 있고 어느 순간 경상 우수군은 몇 척의 배와 장수들만 남겨졌다는 간접적인 기록이 있을뿐이다.

아마도 원균도 일지 같은 기록을 남겼고 조정으로 장계도 보냈을테지만 경상 우수영도 왜적에게 함락 되었고 그로 인해 배 1척과 함께 도망친 원균 입장에서 관아에 있던 기록들을 챙길 여력이 없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조정으로 보낸 장계도 마찬가지로 임금이 한양을 버릴때 위에 서술한 귀중한 자료들도 팽개칠 정도였으니 그런 기록들이 남아 있을리 만무하다고 하겠다.

참으로 아까운 기록들이다.

우스운 사실은 이순신 장군이 한참 왜적의 배를 나포하여 배 안을 수색해 보니 왜적들이 조선군에게서 탈취한 관청의 장부들이 수두룩하게 튀어나왔다고 한다.


농담(弄談, 개그)

어의(御醫) 양예수(楊禮壽)는 노경(늙어)에 다리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비록 권세있는 이들 집에서 진찰을 청해도 대개 가지 않는 일이 많았다. 이번에 창졸간에 말을 준비할 겨를이 없어 도보로 따랐다. 행차가 모래재에 이르러 이항복이 돌아보고 웃으며, “양 동지, 다리병에는 난리탕(亂離湯)이 그만이로구나.” 하니,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썩소를 날리며) 양예수에게 말을 주라 명하였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4월 30일 늦은밤. 임금이 임진강(臨津江)건너다.

비 때문에 강물은 불어나 있고 나룻배는 겨우 5, 6척 뿐이었다고 한다.

선조 임금은 먼저 배를 타고 출발 준비를 기다린다.

시간은 이미 이경(二更, 밤 9시~11시)이 되었으나 임금은 저녁 수라를 들지 못해 허기와 갈증을 달래기 위해 내시에게 술이나 가져오라 하니 술을 서울서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차를 가져오라 하니 차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갈증을 참고 묵묵히 앉아 있다.

내의원의 용운(龍雲)이란 의관이 숨겨왔던 사탕 반 덩어리를 끄집어 내어 강물에 타서 선조 임금에게 드렸다고 한다.


임금이 임진강을 나룻배를 이용하여 건너고 나서 뒤에 누가 따라오던지, 남았던지 이유불문 배를 모두 가라 앉혔다고 한다.

또 나룻터 근처의 민가에도 불을 지르거나 허물어 버리도록 하여 추적하던 왜적이 뗏목을 만들어서 따라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덕분에 임금을 따르던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 중 태반이 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전한다. (한강철교 폭파)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이 시신(侍臣, 시종하는 신하)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흙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燈燭)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人家)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村家)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 - 선조실록 25년 4월 30일의 기사.

그러나 이 불 길 덕분에 흩어졌던 신하들과 백성들 일부가 다시 모여 들수 있었다.


밤에 이동시에는 횃불 하나 키지 않고 도망 갔는데 혹시나 왜구 추적조에게 임금의 피난 방향이 들킬까 염려되어 그랬다고 한다.​

임진강을 건너고 나니 따르던 신하들과 호위군사가 60여명 정도로 줄어 들다.

임진강을 건너 서쪽 기슭에 도착한 선조 임금이 탄 배의 상황을 당시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어좌(御座)를 보니 오직 유서애(柳西厓, 유성룡)만이 들어와 임금 앞에 엎드려 있었고, 좌우에는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가 엎어져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상은 여전히 채찍을 들고 앉아 있었는데, 당시 궁색한 행색 중에 이 날이 제일 심하였다."

- 당시 병조 좌랑(兵曹佐郞)이던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사초(寄齋史草)

 

임진강을 건넌 후 5월 1일 새벽 1시쯤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한다.

파주 목사(坡州牧使)와 장단 부사(長湍府使, 전날 기록에는 장단 부사가 이미 도망쳤다고 되어 있다.)가 임금이 먹을 음식과 술을 미리 차려 두었으나 먼저 도착한 배고픈 호위 군사들이 그 음식을 거의 다 먹어치워버렸고 선조 임금은 전날 점심부터 계속 굶었다고 한다.

어쩔수 없이 선조 임금만이 그 군사들이 먹다 남은 차갑게 식은 밥을 먹었고 세자 이하의 모든 이들은 굶었다고 한다.


​당시까지 선조 임금을 호종한 신하들의 명단
​의정부 - 영의정 이산해(李山海)ㆍ좌의정 유성룡(柳成龍)ㆍ우의정 이양원(李陽元) 서울에 잔류 ㆍ좌찬성 최황(崔滉)ㆍ우찬성 정탁(鄭琢)ㆍ좌참찬 최흥원(崔興源) 도순찰사(都巡察使)로 황해도로 갔음 ㆍ사인 윤승훈(尹承勳) 나머지 사람은 모두 도망.
육조 - 이조 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순찰사(都巡察使) 평안도로 갔음ㆍ참판 정창연(鄭昌衍)ㆍ참의 이정암(李廷馣)ㆍ정랑 조정(趙挺)ㆍ정랑 유영경(柳永慶) 최흥원(崔興源)의 종사관으로 갔음 ㆍ정랑 정광적(鄭光績) 어사로 강원도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음 ㆍ좌랑 이호민(李好閔)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갔음 ㆍ좌랑 김시헌(金時獻) 나머지 사람은 모두 도망.
호조 판서 한준(韓準) 참판 이하의 사람은 기록 못했음.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 죽은 지 2일이 됨ㆍ참판 박응복(朴應福) 참의 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하였음 ㆍ좌랑 이경류(李慶流) 상주(尙州)전투에서 죽었음.
병조 판서 김응남(金應南)ㆍ참판 심충겸(沈忠謙)ㆍ참의 정사위(鄭士偉)ㆍ참지 황섬(黃暹)ㆍ정랑 이홍로(李弘老) 개성에서 뒤처졌음 ㆍ정랑 구성(具宬) 개성에서 파직됨 ㆍ정랑 송순(宋淳) 파주(坡州)에서 뒤처졌음 ㆍ정랑 유희서(柳熙緖)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으로 감 ㆍ좌랑 서성(徐渻) 파주에서 뒤로 처졌음 ㆍ좌랑 박동량(朴東亮)ㆍ이영(李覮) 영변에서 세자를 수행해 갔음ㆍ좌랑 최관(崔瓘) 평양에서 병으로 따르지 못함.
형조 판서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공조 참판 이덕형(李德馨) 적중에서 돌아오지 아니했음. 판서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한성부 - 한성 판윤 홍여순(洪汝淳) 좌윤 이하는 기록하지 못했음.
사헌부  - 대사헌 이헌국(李憲國)ㆍ집의 권협(權悏)ㆍ장령 정희번(鄭姬藩)과 이유중(李惟中)ㆍ지평 이경기(李慶祺) 박천(博川)에서 하직하지 않고 가버림 ㆍ지평 남근(南瑾) 반송정(盤松亭, 도성 돈의문 밖)에서 도망.(또는 처음부터 오지 아니함으로 기록)
​사간원 - 대사간 김찬(金瓚) 평양에 와서 상소하고 도망갔음 ㆍ사간 이국(李)ㆍ헌납 이정신(李廷臣) 영변에서 하직하지 않고 갔음 ㆍ정언 정사신(鄭士信) 반송정(盤松亭, 도성 돈의문 밖)에서 도망.(또는 처음부터 오지 아니함으로 기록) ㆍ정언 황붕(黃鵬) 평양에서 뒤처짐
홍문관 -  부제학 정창연(鄭昌衍)ㆍ교리 이유징(李幼徵)ㆍ교리 심대(沈垈)ㆍ수찬 박동현(朴東賢)ㆍ수찬 임몽정(任蒙正) 파천 하루전에 도망. ㆍ부수찬 윤섬(尹暹)과 교리 박지(朴箎) 순변사(巡邊使)이일(李鎰)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상주(尙州) 전투에서 죽었음
승정원 - 도승지 이항복(李恒福)ㆍ좌승지 이충원(李忠元)ㆍ우승지 이정형(李廷馨)ㆍ좌부승지 노직(盧稷) 평양(영변)에서 뒤로 처졌음. ㆍ우부승지 신잡(申磼)ㆍ동부승지 민여경(閔汝慶) 평양에서 뒤처졌음. ㆍ주서 박정현(朴鼎賢)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돌아갔음. ㆍ주서 임취정(任就正)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돌아갔음.
​예문관 - 봉교 기자헌(奇自獻) 평양까지 뒤쫓아 따라왔음. ㆍ대교 윤경립(尹敬立) 상소하고 아버지 임지로 갔음. ㆍ대교 조존세(趙存世) 안주에서 하직하지 않고 가버렸음. ㆍ검열 강수준(姜秀峻) 평양에서 상소하고 갔음. ㆍ검열 김의원(金義元) 나머지는 도망.
성균관 - 대사성 임국로(任國老) 평양에서 상소만 하고 허락 없이 도망. ㆍ직강 심우승(沈友勝)ㆍ박사 이효원(李效元)
세자종관(世子從官) - 보덕 심대(沈垈)ㆍ필선 심우정(沈友正)ㆍ문학 이상의(李尙毅)ㆍ사서 기록하지 못했음. ㆍ설서 이광정(李光庭)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은 모두 오지 않았으나 부솔(副率) 강인(姜絪)만이 왔음.
한산관(閑散官)으로 수행한 자
기성군(杞城君) 유홍(兪泓)ㆍ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ㆍ해원군(海原君) 윤두수(尹斗壽)ㆍ호군 이산보(李山甫)ㆍ유근(柳根)ㆍ홍진(洪進)ㆍ홍인상(洪麟祥)ㆍ민준(閔濬)ㆍ윤자신(尹自新)ㆍ황정욱(黃廷彧)ㆍ이정립(李廷立)ㆍ이관(李瓘)ㆍ성수익(成壽益) 등.
기타
사복첨정 박응인(朴應寅)ㆍ내승(內乘) 박동언(朴東彥)ㆍ내승 안황(安滉)
종부첨정 민선(閔善) 파주에서 뒤처졌음.
장악직장 이경전(李慶全) 평양에서 뒤처졌음.
사섬봉사 이신성(李愼誠) 파주에서 뒤처졌음.
봉상봉사 홍봉상(洪鳳祥)
어의(御醫) 허준(許浚)
내시 몇 사람과 호위 병사 몇 사람 

그 나머지 소관(小官)과 산질인(散秩人)은 파주(坡州)와 개성(開城)에서 자기 임의로 행동(도망)을 취하여 어디를 갔는지 기록하지 못한 자가 많다. 

 기재사초


(이어서 2부에는 5월의 기록을 올리겟습니다.)

(줄이고 줄여 쓴 것도 알맹이는 별로 없는 장문의 수면제가 되는듯 하네요.

추천이 많으면 좋겠습니다만 비공도 있고 댓글도 많은 글이 되기를 늘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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