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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초절정 악덕 관리자 이순신 대마왕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예전에 최악의 악덕기업주 세종 대마왕편을 관심 있게 봐주신 분들께 고마움의 표시로 시간을 또 쪼게 봤습니다.^^*
일단 장군의 잘 알려진 행적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장군이 어떤 방식으로 나라를 지켰으며 장병들을 통솔했는지 좀 삐딱한 시각으로, 식상하지 않게 접근합니다.
(※1. 혹시나 장군을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시어 장군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것을, 우스게 소리 한마디도 허용 하지 않는 분은 뒤로가기를 하시면 소모적인 논쟁거리는 발생 하지 않겠지요. 물론 그 어느 누구보다 저도 장군을 존경합니다만...)
(※2. 아이들에게 가끔 역사를 읽어줄때 단어들이 너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가급적 어려운 단어들은 쉽게 풀어 쓰도록 하고 그도저도 아닌 좀 거시기 한 단어나 문장은 좀 지저분 하지만 따로 보충 설명을 넣습니다.)
1591년 2월 경.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전라 좌수군의 사령관으로 장군이 임명됩니다.
장군의 정식 관직명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로 정3품 되시겠습니다.
(전라 좌도, 우도, 경상 좌도, 우도 - 한양을 기준으로 바라봤을때의 기준입니다. 남동해안이 경상 좌도, 서남해안이 전라 우도입니다.)
정3품이면 역사 드라마 보실 때 빨간색 홍포를 입고 다닐 수 있는 당상관입니다. 높은 벼슬이지요.
그러나 벼슬이 높다하여 마냥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1년 뒤 전라 좌수군, 더불어 향후 조선 수군 전체에게는 두 가지의 막중한 임무가 떨어집니다.
하나는 잘 아시다시피 수군으로써 망하던 조선을 왜구로 부터 구해야 한다는 국가적인 사명,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시 최고의 악덕 관리자로써 임금조차 말릴 수 없었던 장군의 휘하에서 버텨 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이 두번째 사안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그때 당시 이순신 장군은 물론 북쪽 변경 지방에서 같이 종군 했고 이순신 장군과 같이 싸웠으며 또 수군이나 육군에서 동료로, 부하로 근무하게 되는 역전의 장수들 조차도 앞으로의 일을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들어가며 - 1591년 전라 좌수군에는 장군의 어떤 흉악한 착취가 있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악덕 관리자 이순신 대마왕의 난중일기는 1592년 1월부터 시작됩니다. 난중일기에서 장군의 대부분의 흔적을 찾아보겠습니다.
글 내용은 주로 장군이 쓴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하고 선조실록이나 기타 기록들로 중간중간에 무료함을 채워봅니다.
□ 임진왜란 전 다른 장교들이나 사병들의 눈에 비친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는 아마 HBO 시리즈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이지중대의 첫 중대장인 소불 대위 같았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무엇이든 규정에 따라, 편법이나 정도를 벗어나는 일 없이, 어떻게 하면 부하들을 좀 더 굴릴까? 어떻게 뭐 좀 얼차려 줄만한 건수가 없을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이순신 대마왕.
그러나니 일단, 소불과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장군은 이미 북쪽 변경지방에서 오랑캐 때려잡던 실전 감각이 뛰어난 지휘관이고 또한, 개인의 부귀영화 보다는 오로지 나라를, 임금을 위해 한 목숨 거는 정통 무인이라는 점이겠지요.
얼차려 중독인 장군에게 한 건 제대로 걸립니다.
1592년 1월 16일. 새해를 맞이하여 전라 좌수군 휘하의 여러 진과 포구의 하급 장교들과 고을 아전 등이 신년 인사 및 앞으로 있을 연초 전투태세점검에 대비해 상급기관인 전라 좌수영을 찾습니다. 앞으로 점검 일정이나 계획 등에 대한 이야기도 논하고 또 새해를 맞이하였으니 상급자에게 인사도 하고 그러는거지요. 그런데 이때에도 뭐 한 건 건수가 없나 번뜩이는 대마왕의 눈초리.
아뿔사! 아전들의 인사고 나발이고 방답진에서 온 배가 낡고 정비가 제대로 안된 것이 포착됩니다.
이날 이것 때문에 방답진의 부하들과 아전들은 반갑게 인사 하러 왔다가 곤장을 처 맞았고 또 좀 좋지 않은 소문이 돌던 토병(土兵, 그 지역 출신의 말단 사병, 물론 양반임.) 박몽세(朴夢世)라는 자는 곤장을 무려 80대나 맞았다고 합니다. 인사하러 왔다가 매질을 당하는군요.
이게 군대가 아닌 일반 민간에서라면 곤장 80대는 거의 암살 수준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나 그때나 군대라는 게 까라면 까야하고 치면 맞아야 하는것 아니겠습니까... 그나마 다행인건 전시가 아니라서 말이죠. 전쟁 중이었다면 사형감 아니었을까...
□ 1592년 4월에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 됩니다.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오른 후 정확히 200년 만에 조선 땅에서 벌어진 처음 있는 국지적인 약탈의 범위를 벗어난 왜적의 대대적인 침략입니다. 4월 13~14일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고 조선은 변변찮은 저지선도 마련하지 못하고 4월 30일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도주를 시작합니다.
선조 임금이 얼마나 급하게 도주하였는지 임진강을 건널때 목이 말라 술한잔 마실려니 술은 어떻게 구했는데 술잔 조차도 없어서 뱃사공이 가지고 다니던 주발을 얻어 한잔 했을 정도였습니다.
□ 선조는 조선의 왕 중 한양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의주까지 피난 갔던 왕입니다.
한양을 버리고 간 임금 중 인조 때 발생한 이괄의 난에 인조는 충남 공주까지 피난 갔었고 또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 갔었습니다.
태종 2년, 조사의의 난 때 태종 임금이 황해도 금천까지 친정을 나가기도 했지만 당시 수도는 개경이라 그리 먼 곳은 아니었습니다.
덕분에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도 난리 통에 거의 전국을 다니며 백성들을 독려했으니 조선의 왕 중에 가장 조선 팔도를 많이 돌아 본 왕이 됩니다.
□ 임진왜란 직전 경상도 상주(尙州)에는 정식으로 등록된 궁수(弓手)가 3인 뿐이었다고 합니다.
□ 대부분의 기록에는 임진왜란 발발 이틀 전 기적 같은 타이밍으로 전라좌수군에서 거북선을 완성 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실제 거북선의 최초 출동은 1592년 5월 29일 사천 해전 때 부터입니다.
아마 완성후 이 배를 어떤 방식으로 전술운용을 해야 할지 계획을 좀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에 바로 전장에 투입하기는 어려웠을것으로 보이네요. 기록에 따르면 처음으로 거북선을 몰고 출전한 장수는 좌수영 군관인 돌격장 이언량으로 확인 됩니다. 이언량은 난리 중에 활발하게 활약하다가 이후 노량해전에서 아쉽게도 전사하고 선무원종공신에 수록됩니다.
□ 장군은 곤장을 좋아해
장군이 있던 병영 내에서는 상당히 자주 군법 위반자들에 대한 처벌이 있었습니다.
곤장 이야기를 좀 구체적으로 해 볼까요?
장군이 스스로 난중일기에 기록한 곤장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찾아보니...
1592년 1월 16일. 위에 말씀 드린 곤장 80대의 어쎄신 크리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사례를 열거해 봅니다.
(바쁘신 분이나 곤장이 비민주적이라 혐오증이 있으신 분들은 이 문단 아래의 요점 정도만 보셔도 됩니다.)
(장군의 시각과 3인칭 관찰자의 시각으로 서술하니 가끔 반말 삽입이 있겠습니다.)
1597년 2월 25일. 각 포구와 진영의 일제 정기점검 중이신 대마왕.
이곳저곳 들러 점검을 하는데 오늘은 사도진(蛇渡鎭)에서 점검 중이었다. 마침 그 곳의 방비가 많이 부실 했나보다.
해당 군관과 아전들에게 벌을 주고 진의 책임자인 사도진 첨사를 잡아 옥에 가둬 족치고 교수(敎授, 지방의 향교에 파견되어 유생들을 가르치던 종6품의 관직. 요즘 군대의 정훈 담당 장교나 7종 군수 장교 정도로 이해하면 됨.)는 쿨하게 아예 꼴 보기 싫다며 진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중대장은 영창에 갇히고 군수담당 장교가 사단장한테 멱살 잡혀 위병소 밖으로 내쳐지는 장면이다.
사도진 첨사, 첨절제사의 줄임말이다. 무려 관직이 이순신 장군 바로 아래 급의, 무관이라는 핸디캡만 없다면 한양에서 가마 타고 에헴! 하시며 방귀 꽤나 끼고 다닐만한 종3품이었다.
3월 2일. 이날은 중종 임금의 비 장경왕후 윤 씨의 제삿날이다. 공휴일이다. 공휴일? 따위는 왜적에게나 줘버려! 후훗^^
대마왕께서 절의 스님들이 놀고먹는 것에 불만을 품고 싹 다 끌고 나와 강제노역을 시켰다. 이틀 후, 공휴일에 노역을 한 스님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나 보다. 법당에서 탱화나 그리던 솜씨로 탱자탱자 한 것이 발견된 모양. 그냥 지나치면 대마왕이 아니지...
스님들 중 보스급을 잡아다 또 찰지게 곤장을 쳤다.
3월 23일. 심부름 보냈던 관직 미상의 소국진이란 자에게 곤장 80대를 쳤다. 아마 놀다가 늦게 온 모양이다.
1593년 6월 18일. 탐후선(정찰선)이 늦게 도착 한 벌로 선장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관할 경계선을 넘어 고기 잡던 어부와 도둑질을 했던 관청의 노비에게 찰지게 곤장을 쳤다.
1594년 2월 17일. 우수사의 군관 정홍수와 도훈도를 명령 불복종으로 곤장 90대. 지각 했거나 날짜를 어겼거나.
3월 1일. 검모포 만호에게 곤장 치고, 도훈도(종9품의 학교 선생님 혹은 정훈 담당 하급장교 정도로 보면 된다.)는 무려 처형해 버린다.
(일기의 원문에는' 都訓導行刑', 도훈도 행형, 형을 가했다고 나옵니다. 물론 이 때는 전쟁 중이니 즉결 처분 한 것으로 해석해 봅니다.)
4월 16일. 경상수사의 군관 고경운과 도훈도 및 변고에 대비하는 색리, 영리를 잡아다가, 지휘에 응하지 않고 적변도 빨리 보고하지 않은 죄로 또 벗겨 놓고 곤장을 쳤다.
이 때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이니 경상, 전라, 충청의 수군절도사들도 모두 장군의 아랫자리가 된다. 무슨말이냐 하면 아무나 막 굴리고 때려도 말릴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다.
8월 29일. 도둑질을 한 도둑 세 놈중에 장손이라는 자에게 곤장 100대를 치고 얼굴에 도둑 자를 새겨 버린다. 아마도 군량미를 절취하다 들킨 모양. 가차 없다. 역대 조선의 임금들도 도둑질에 대한 처벌로 법률에 정해진 방법인 얼굴이나 잘 보이는 신체 부위에 '도둑놈'이라고 문신을 새겨 넣는 일은 형벌이 너무 과하다 하여 상당히 드문 처벌 방법인데... 장군은 법. 대. 로. 한다.
1595년 1월 8일. 전령이 늦게 돌아왔다고 곤장을 쳤다.
1월 19일. 어디 나갔다 돌아온 장흥 부사, 낙안 군수, 발포 만호가 날짜를 어긴 죄를 곤장을 쳤다. 부사도 종3품 아닌가?
1월 22일. 며칠 전 여도의 배에서 잘못으로 불을 내어, 광양 · 순천 · 녹도의 배 네 척이 홀랑 타버린 대형 사건이 터졌었다. 잘못으로 불을 낸 여러 장수들과 아전들에게 곤장을 쳤다.
2월 1일. 보성 군수가 하루 늦게 도착한 것으로 곤장치고, 도망치던 왜놈 두 명을 잡아 자비란 없다. 목을 날려 버린다.
4월 29일. 하동 현감에게는 두 번이나 집합 날짜를 어긴 죄로 곤장 90대를 때렸고, 해남 현감에게는 곤장 10대를 때렸다.
5월 14일. 사도 첨사가 와서 보고하는데, "흥양 현감이 받아 간 전선이 암초에 걸려 뒤집어졌다"고 한다. 배도 뒤집어 지고 장군의 속도 뒤집어 졌다. 목숨과도 같은 전투용 함선이 암초에 걸려 자빠지다니... 선장 최벽과 배의 장수와 도훈도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5월 15일. 순천과 광양의 두 고을에서 이중으로 전투수당을 받은 광양 소속의 김두검을 불러 내어보니, 칼도 안 차고 활도 안 차고서 나왔다. 싸가지가 없다. 곤장 80대를 쳤다.
7월 19일. 당포 만호가 인사를 하러 오지 않는다. 이 자도 싸가지가 없다. 찾아서 잡아다 곤장을 쳤다.
1596년 2월 30일. 전라 우수영의 군관 및 도훈도에게 곤장 80대를 때렸다. 이유는 기분 나쁘거나 못생겼거나...
3월 1일. 저녁나절에 해남 현감 유형, 임치 첨사 홍견, 목포 만호 방수경에게 기일을 어긴 죄로 곤장을 쳤다.
보통 언제 본부에 모여 작전 회의 한다고 통보하는데 바람이 불거나 기타 사정으로 배가 출항 못하면 육지로 달려와야 한다.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에 늦었나 보다. 해남 현감은 새로 부임해 왔다고 겁만 주고 곤장은 치지는 않았다는 장군의 섬세한 배려심도 돋보인다.
(※ 해남 현감 유형 : 벼슬도 없는 선비였으나 전쟁 중에 치뤄진 과거를 통해 해남 현감에 부임하여 처음에는 장군에게 혼나기도 하고 그랬지만 이후 장군을 멘토로 삼아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부상 중인 몸으로 장군이 사망한 것에 뒤이어 수군을 지휘하기도 하였고 이후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당시부터 장군의 후계자가 될 운명이 정해진듯 한 엘리트 장수였다.)
3월 11일. 군관과 이방을 불러 군관에게는 20대, 이방에게는 50대를 쳤다. 이유는 모른다...
4월 14일. 충청 우후 원유남에게 곤장 40대를 쳤다. 당진포 만호도 같은 벌을 받았다. 늦게 왔나거나...
4월 22일. 노천기라는 수군이 술을 먹고 주책없이 굴다가 본영 진무 황인수, 성복 등에게서 욕을 먹었다고 했다. 군기위반으로 곤장 30대.
5월 11일. 비인 현감 신경징에게 늦게 왔다고 곤장 20대를 쳤다. 또 순천 격군과 감관 조명에게 곤장을 쳤다.
6월 20일. 평산포 만호에게 진작 진에 도착하지 않은 까닭을 문책하는데,
기일을 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늦었다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듣고는 곤장 30대.
1597년 6월 26일.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이 인사하러 왔다고(?) 곤장을 50대 때렸다. 인사 한다고 때린다...
못생겼거나 못생긴 주제에 애인이 있어나 보다.
8월 13일. 우후 이몽구가 전령을 받고 들어 왔는데,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실어 오지 않은 죄로 곤장 80대를 쳐서 보냈다.
이몽구는 본영 우후다. 이순신 장군의 작전참모 정도로 보면 되는데... 사단 작전참모가 연병장에서 두들겨 맞고 있다.
참모고 나발이고 없다.
8월 17일. 장흥의 군량 감독관과 아전이 군량을 맘대로 훔쳐 나누어 갔다. 돌았나?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몇 대나 쳤는지 모른다.
8월 19일. 경상 수사 배설이 임금의 교서를 받고도 절을 하지 않는다. 짜증나지만 이건 뭐 그냥 매너 문제이니 배설은 못때리고 배설의 아전들에게 곤장을 쳤다.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 군수품을 사적으로 사용하였다. 하필 배설 때문에 짜증난 상태다. 곤장 20대를 쳤다.
10월 13일. 선조 임금은 이순신 장군에게 관할내의 명령불복종자에 대해 전시임을 감안하여 선조치후보고 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다시 말하자면 이순신 장군이 관할하는 모든 관내의 장수와 사병, 일반인들에게 죄가 있다면 임금의 결재 없이 목 베어 놓고 사후에 결재를 받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아도 곤장만 치는 게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시는 장군께는... 흐흐흐, 적토마에 날개 달아준 모양새이다.
11월 2일. 전라 우수사의 배가 바람에 표류되어 암초에 걸려 깨졌단다. 우수사 배의 군관 당언량에게 곤장 80대를 쳤다.
12월 2일. 영암의 향병장 유장춘이 왜적을 토벌하면서 전, 후 결재가 없었다고 곤장 50대를 쳤다. 왜적 토벌해도 곤장 맞는다.
12월 4일. 저녁나절에 김윤명에게 곤장 마흔 대를 치고 장흥 교생 기업이 군량을 훔쳐 실어나가다가 적발되어 곤장 3대를 쳤다. 3대? 장난?
3대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번역이나 옮겨 적는 과정에서 '0'을 하나 빼먹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12월 5일. 해남의 독동이라는 자를 처형했다. 강도강간범이었다.
1598년 1월 4일. 무안 현감에게 곤장을 쳤다.
9월 23일. 서천만호 및 홍주대장, 한산대장 등에게 각각 곤장 7 대를 쳤다. 금갑도 만호, 제포 만호, 회령포 만호에게도 아울러 곤장 15 대 씩 때렸다.
장군의 곤장치기 기록.
최대인 100대 부터최저 3대(장난치시나?)까지의 곤장 횟수가 기록되었으며 1인 1회 평균 43.3대(확인된 숫자만 데이터로 활용)의 곤장을 처맞았다. 곤장을 맞은 사람들은 노비에서부터 종3품 부사와 첨절제사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맞을 만하면 무조건 뚜드려 패셨다.
곤장 앞에서는, 아니 군법 앞에서는 차별이란 없다.
□ 곤장 보다 더 큰 죄는 군법에 따라 사형입니다.
평상시라면 사형에 이르는 죄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난리통이라 즉결처분이 흔한 일이었다. 사형의 이유는 상습적인 군량미 도둑질, 강도, 부녀자 강간, 왜적에게 적극적인 협조, 탈영 등 등. 그 중에서도 탈영에 대해서는 이유 없이 주동자에게는 사형이었습니다.
사형의 방법은 약물주사나 뭐 그 따위 방법은 없고 그냥 바로 목을 베고 그 목을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도록 장대 끝에 메달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효시‘라고 합니다.
1592년 4월 29일. 전라좌수군이 임란 발발 이후 첫 출전 직전 탈영한 병사가 있었나 보다. 포망장(도망자 체포조)을 보내어 도망자 두 명을 찾아내어 우선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하여 군사들의 공포심을 진정시켰다고 한다.(이게 더 공포스럽겠는데...)
5월 3일. 다음날 출전하는 것에 겁을 먹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자기 집으로 달아났다.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높이 매달았다.
1593년 6월 8일. 옥과라는 고을의 징병 담당자가 아마도 뇌물을 받고 징집 대상자를 조작했나 보다. 그래서 결원이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도 매번 속이고 허위보고를 했다고 한다. 담당자를 사형에 처하여 목을 높이 메달아 보였다.
7월 13일. 순천 거북선의 격군으로서 경상도 사람 종 태수가 겁을 먹고 달아나다가 잡혀 사형에 처했다.
1594년 7월 26일. 녹도 만호가 도망병 여덟 명을 잡아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 세 명을 처형하고 그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8월 23일. 흥양 포작인 막동이란 자가 장흥의 군사 서른 명을 몰래 그의 배에 싣고 동반 탈영하다가 붙잡혀서 처형하여 효수했다.
9월 23일. 광주에 가두었던 창평현 아전 김의동을 사형하라고 카톡메세지를 보냈다.
1596년 8월 25일. 당포의 포작인이 놓아둔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들어 왔다. 적이 쳐들어 왔다."고 헛소문을 내었다.
이 새까들이...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였다.
1597년 10월 23일. 왜적에게 빌붙어서 앞잡이 노릇을 한 두 놈을 잡아 처형했다.
10월 30일. 저녁나절에 해남에서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 왜놈에게 사주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자 두 명과, 선비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을 아울러 목 베어 효시하였다. 저녁에 양밀이 도양장의 벌레 먹은 곡식을 멋대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일로 곤장 예순 대를 쳤다.
이순신 장군이 계시던 병영 안에서는 늘 곤장이 춤을 추고 칼날이 번뜩이며 군법 위반자의 곡소리가 들렸으리라.
그런데, 과연 이렇게 곤장을 치고 관우 부럽지 않게 목을 날렸던 장군에게 실제 전투에서 이 방법으로 통솔의 효과가 있었을까?
효과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여러분이 잘 아시고 영화로도 보았던 1597년 9월 16일에 벌어졌던 명량대첩이 있습니다.
당시는 원균의 칠천량해전의 대패로 인하여 조선 수군은 겨우 13척의 배로 왜적의 배 133척을 상대해야 하는 장면,
장군의 배가 홀로 왜구들과 접전을 벌이며 사투를 벌이다 뒤처진 아군 부하장수들을 부르는 장면 기억나시죠?
나는 침착하게 타이러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에게 쏴라."고 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이 생퀴들이...!!!)
나는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니 적들이 더 대어들 것 같아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이 깃발을 본 장수는 존내 튀어 오는거다는 뜻의 깃발)를 돛대에 올리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를 불러 이르되,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너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것 같으냐? 고 하니, 안위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후략)
해설 1. 왜적은 133척 이상 + 칠천량에서 대승을 거둔 하늘을 찌르는 듯 한 기세 + 명나라 장군들에게 일부 뇌물을 먹여 약효가 나타나길 기대하는 상태.
조선 수군은 13척(혹은 12척) + 사기저하 + 통제사 이순신과 전라 우수사 김억추 등과의 불화 + 대부분이 장군과 오랫동안 싸워본 경험이 없는, 손 발이 안맞는 장수들.
2. 그러나 안위나 김응함 입장에서 돌격하지 않으면 돌아가서 장군의 칼춤사위를 직접 겪을 것이고 돌격하자니 왜적에게 포위 섬멸 당할 것이 뻔 한 사실처럼 보였으리라.
그러니 이미 입력된 프로그램을 실행 하듯 장군의 말 한마디에 두 장수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적진 속으로 불나방이 달려들듣 돌진한다.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두 장수는 남아 있는 가족과 후손들에게 연금과 상품권이 약속된 "장렬한 전사"를 택한 듯하다.
3. 결론은 133척의 왜적선을 13척의 조선 수군이 떡실신을 시켰다는 내용.
이게 과연 곤장과 사형이라는 처벌만으로는 해석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훈련이든 전쟁이든 최일선에서 한상 먼저 나가 싸우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장군의 기질을 알고 있는 장수들이라면 한 목숨 바치는 것도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군의 평시, 전시에서의 통솔력을 보여주는 지극히 평범한 상황이 아닐까 한다.
□ 당시 전투 중에 죄인을 심문하고 가둬두는 감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죄를 지은 병사나 왜적을 생포 할 경우 가장 효과적인 감금 수단은 아이러니하게도 배 안에 가둬 두는 것.
□ 당시는 사진이나 동영상이 없던 시절.
왜적을 죽이고 그 전과를 보고 할 때 증거로 왜적의 목을 잘라 소금에 절여 임금이 있는 곳으로 보냈고 부피가 크다 하여 귀를 잘라 보내는 것이 정석이었습니다.
귀는 두 개 이므로 당시 룰은 왼쪽 귀를 잘라 보내야 증거로 채택 되었습니다. 제일 재수 없는 경우는 잡아 죽인 왜적이 과거의 전투에서 이미 사고로 왼쪽귀가 잘려 나가 없는 경우. 잘라 낼 귀가 없을 경우 귀 뿌리를 파내어서 바쳤다고 합니다.
이걸 한양으로 소금에 절여 보내면 임금이 사열도 하고 중국 장수들에게 보여 주기도 하던, 지금 시각으로 보면 좀 잔인한 장면이었습니다.
□ 활쏘기 덕후.
당시 조선의 장수들은 활 쏘는 게 취미 + 훈련 + 친목도모 + 내기 혹은 그 이상의 놀이도 아니고 업무도 아닌...
심심하면 쏘고, 다른 장수가 안부 인사하러 와도 같이 쏘고, 몸이 좀 찌뿌둥하면 쏘고, 아울러 장수들 끼리 내기 활쏘기를 해서 지는 쪽이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진탕 마시거나 벌주를 마시고 헤어지곤 했습니다.
참고로 1596년 6월. 활 좀 쏘았다는 달의 기록을 보면 장군은 한 달에 22일간 모두 275순 1,375발의 활을 직접 쏘셨습니다. 1일 평균 62.5발.
아마 하루라도 활을 쏘지 않으면 손발이 저리고 혈액순환이 되지 않으셨나 봅니다.
□ 내기활쏘기는 절대로 양보란 없었다.
1596년 1월 경상순찰사 서성이 장군의 진영에 왔다가 활쏘기 내기를 신청합니다.
수군통제사와 경상우도순찰사의 타이틀 매치.
결론은 장군이 순찰사를 근소한 점수 차이로 약을 바싹바싹 올리다가 이깁니다. 순찰사는 섭섭한 빛을 얼굴에 감추지 못했다고 전하내요.
이날 장군의 일기 중 이 활쏘기 이야기의 말미에 “可呵” 요즘 말로 각색하자면 “큭큭” 정도...^^
다음날 억울한 순찰사가 또 대전을 신청했는데 이 날은 전날보다 더 큰 점수 차이로 장군이 이겼다고 합니다. 타짜가 따로 없네요. 이 날 순찰사가 한 턱 거하게 쐈을듯 합니다.
□ 복수전
이 해 7월. 또 한번 순찰사가 장군에게 내기활쏘기를 신청합니다.
이번에는 순찰사가 활 잘 쏘는 군관들을(이라고 쓰고 타짜라고 읽습니다.) 대거 동원하여 단체전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순찰사 편이 떡실신 당하고 맙니다. 당연히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바닷바람까지 고려하며 실전으로 쏘아대던 조선 수군들이 순찰사를 호위하던 겉멋 든 군관들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있으랴,
이 날 장군의 일기에는 “終日極歡” “종일극환”. 하루 종일 기분이 엄청 좋으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 이순신장군 덕후 정조 임금
정조 임금은 장군의 노량해전 전사를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탁 치며 탄식 하시곤 하셨다 합니다. 밀덕이었나 보네요^^.
이후 장군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장군의 일기를 편집하여 정조19년에 14권 8책으로 된 구성된 이충무공전서를 무려 임금의 개인 돈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정리되어 기록된 장군의 일기가 지금의 '난중일기'로 불려 지게 됩니다.
□ 2005년 국내 모 대학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43.8%)에 이순신장군이 선정 되었습니다.
□ 명종 임금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의 수군은 평상시 지방에서 한양으로 쌀 배달(조운선)을 하다가 왜적이 침입하면 조운선에 무기를 실어 싸웠다고 하네요. 이 때 사용한 배가 맹선(猛船)이라고 부르는 배입니다. 다른 작은 배들도 있었겠지만 맹선이 주력 전투함으로 대, 중, 소의 여러 버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포왜란(1510년), 사량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을 거치며 맹선으로는 왜구에 대적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명종 10년 남도포 만호 정걸장군이 창안한 메인 배틀 쉽, 판옥선을 주력 전투함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판옥선의 세부적인 사양은 저도 잘 모르니 다음에 기술하기로 하고 단편적으로 판옥선이 얼마나 튼튼하고 믿음직한 전투함인가의 사례 하나만 서술합니다.
1598년 무술년 순천왜성 전투 당시 광양만으로 진입하여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이 야간 공격을 하던 중 물때가 지나 순식간에 배가 싸우던 자리가 갯벌로 바뀌어 버립니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당시 상황을 “다투어 죽을 것을 각오하고 혼전하는데, 밤 조수가 갑자기 밀려나 배들은 육지에 있었다. ”라고 기록하네요. 이 때 명나라 전투함 43척과 구원하러 갔던 조선 수군의 판옥선 3척도 갯벌에 갇혀 버립니다. 졸지에 갯벌위에 배 만 덩그러니 서 있는 상황.
왜구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 갯벌로 뛰어가 명나라 수군의 배 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자 놀란 명나라 군사들이 배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갯벌 밭을 이리저리 왜구들을 피해 도망 다니며 무참히 살육 당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판옥선은 육지에 올라앉자 자동으로 2층의 목책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벙커 비슷한 모양새가 되어 아침까지 왜구들의 공격을 버티다가 사상자는 좀 있었지만 밀물이 들어오자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거북선도 거북선이지만 판옥선도 조선을 구한 무기 중에 큰 자리를 차지하였다고 여겨지네요.
□ 당시 난중일기의 표현들.
“상당히 미안하다.”라는 뜻으로 일기나 편지에 사용하는 단어.
조금 미안할 경우 “未安, 미안”, 많이 미안할 경우 “未安未安, 미안미안”이라고 적습니다.
폭우가 쏟아진다는 표현 중에 “如注, 같을 여, 부을 주” 물을 쏟아 붙는 듯 하다는 뜻.
요즘의 “집중호우”, 혹은 “장대비” 같은 뜻일 것인데, 난중일기에 딱 한 번 나오는 표현 중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에 장군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如注如注”
□ 음력 3월 8일.
장군의 생신날입니다.
1592년 3월 8일.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지 1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이 날 종일 비가 왔고 생신날이라 공무는 보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 지방관의 경우 자기 생일, 자기 부모나 조부모의 생일이나 제삿날 등에는 공무를 보지 않는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장군께서는 상당히 마음 상하셨을꺼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그렇지 않나요? 생일날 아무도 알아 주지도 않고 전화도 한 통 없고...
뭐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하고는 이를 부드득 갈고 계셨으리라...
이후 대마왕이 어떤식으로 보복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개인적인 일이라 공무에 반영하여 사적인 감정을 쏟지는 않으셨을지도 모르지요.
다만 이후 1596년 병신년(丙申年)의 장군 생신날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3월 5일
(전략)... 회(薈) · 해(荄) · 면(葂) ·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양(金洋)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삼경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 · 한대 · 효대와 은진의 계집종이 왔다.
(아들과 조카들이 다 찾아오고 음식이나 잔심부름을 할 계집종들도 왔나봅니다.)
3월 6일
(이름을 알 수 없는 장수가) 노루 3마리를 사냥해 왔다.
3월 7일
녹도 만호가 또 노루 2마리를 사냥해 왔다.
장군께서는 오랫동안 간만에 머리를 새로 빗었다.
3월 8일
생신날 당일
아침에 안골포 만호 · 가리포 첨사가 각각으로 큰 사슴 한 마리씩을 보내 왔다. 가리포 첨사도 보내 왔다. 밥을 먹고 난 뒤에 나가 앉아 있으니, 우수사 · 경상 수사 · 좌수사· 가리포 첨사 · 방답 첨사 · 평산포 만호 · 여도 만호 · 우우후· 경상 우후 · 강진 현감 등이 와서 같이 종일 이야기 하며 진탕 취하여서 헤어졌다.
3월 9일
우우후 및 강진 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또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3월 11일
아들들과 조카들, 계집종들도 모두 돌아갔다.
원래 평범한 생일날은 이정도 해야 하는겁니다.
□ 농땡이 장교가 에이스로 등극하다.
1592년 3월 20일. 관할내의 정기순찰 실적이 저조한 관리들을 장군께서 엄하게 문책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사도진 첨사 김완은 담당 구역 정찰보고 자체가 많이 불성실 했나보다.
빡친 대마왕께서 첨사 김완을 어떻게 굴릴까 고민을 하셨겠지요.
하급 장교나 병사라면 그냥 벗겨 놓고 곤장 80대를 또 치면 되지만 그는 진영(鎭營) 한 군데의 책임자인 종3품 첨절제사 아닌가?
그리고 아직 전시도 아니라...
결국 장군의 눈에 미운털로 박힌 김완은 임진왜란 초기 전라 좌수군의 척후장으로써 가장 위험하고 힘든 보직인 최선봉에서 수색정찰 임무를 하게 되는데, 척후장이란 게 항상 본진과 떨어져서 적을 먼저 발견해야 하는 수색팀이고 본격 전투 전에 적에게 먼저 한번 찔러 보는 역활도 해야하고 또 야간에는 매복도 해야 하는 상당히 피곤하고 위험한 보직입니다.
덕분인지는 몰라도 김완은 전란 초기 7월 까지 적선 격파 2척과 왜구 머리 36급을 획득하는 탁월한 전과를 올리며 그해 8월에 1계급 특진을 하게 됩니다.
□ 분노의 노젓기(부제 - 조선 수군은 숟가락 살인마)
1592년 5월 7일.
이날은 임진왜란 최초로 조선 수군이 왜적을 대규모로 격파한 옥포 해전이 있었던 날.
물론 적선 최초 발견자는 당연하게도 위에 서술한 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입니다.
당시 거제 옥포만에서 왜적의 배 25여 척을 격파하고 조선인 포로들까지 구출하고(이날 아군 패해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등포로 물러났다.
정오 무렵부터 왜적과 접전을 하여 격파하기 시작하여 점심도 굶고 오후 늦게까지 뽕을 뽑으시는 이순신 대마왕.
왜적의 배를 태우고 부시고 물어뜯으며 신나게 박살을 내고 나서 오후 5시 쯤 결국 더 이상 격파 할 왜적의 배가 없어지고서야 악덕 관리자 이순신장군의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일거리 놔두고 퇴근은 없다. 오늘 잔업 할까?
굶주리고 지친 조선 수군은 옥포에서 북쪽으로 약 10여 리 떨어진 영등포만 앞바다에 정박하여 맛있는 저녁밥을 지어 먹을 준비를 합니다.
일부는 조각배를 타고 거제도에 상륙하여 밥 지을 장작을 구하고 일부는 부족한 식수도 받아 오는 등 분위기는 상당히 넉넉했겠지요.
첫 전투의 긴장 속에서 왜적을 찰지게 격파하고 고픈 배를 채우려고 맛있는 밥을 지으려는 찰나, 왜적의 배 5척이 근처를 지나간다는 첩보를 받습니다.(혹시 이 척후 보고자가 김완 아닐까?)
"식사 중지! 총원 전투 배치!"
조선 수군에게 청천벽력 같은 장군의 명령이 전해집니다.
처음으로 왜적의 대선단과 긴장 속에서 맞붙어 싸운 조선 수군은 이제 좀 정신을 차리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순간...
'밥 먹을땐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던데...'
조선 수군은 국자와 밥 주걱을 내던지고 이빨 꽉 깨물고 웅천의 합포 까지 달아나는 왜적의 배를 분노의 노질로 추격하자 왜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전부 도망치고 맙니다.
허탈해진 조선 수군은 빈 왜적의 배를 향해 공복의 허전함을 분노의 포격술로 승화하여 왜적의 배 5척 전부를 순식간에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야사에 의하면 일부 물에 빠졌던 왜구들 중 밥을 굶은 조선 수군들에게 죽을때 까지 숟가락으로 두들겨 맞아 익사가 아니라 둔기에 의한 타살자도 많았는...
이후 해는 벌써 기울고 한밤중에 창원의 남포까지 돌아온 조선 수군은 야간이라 등화관제 때문에 불을 피울수도 없어 왜적에 대한 증오를 반찬 삼아 생쌀을 잘근잘근 씹었다고 전해집니다. 과연 조선 수군들은 왜적에게만 욕했을까요...?
□ 또 한번의 조선 수군의 시련
견내량 대첩 바로 전날인 1592년 7월 7일.
전날부터 출동하여 남해안 이곳저곳을 누볐으나 왜적의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답니다.
장군 입장에서는 어서 빨리 왜적을 찾아 격파를 해야 하는 처지니 답답하기 그지 없을 듯 합니다.
이날 동풍도 크게 불어 배를 저어 나가기도 힘들어진 상태였는데 겨우겨우 수색을 마치고 당포 앞바다에 배를 정박하라는 명령과 함께 근처의 섬으로 가서 물을 긷고 나무를 해서 저녁밥을 지을 준비를 하는 조선 수군.
그런데, 섬에 숨어 있던 조선 사람 김천손이란 자가 조선 수군을 보고 바삐 달려옵니다. 장군을 찾은 그는 적선 70여 척이 견내량 쪽으로 이동하였다는 다급한 첩보를 전하고 마는데... 사스가 김천손인가?!!!
밥 짓던 조선 수군들은 또다시 깊은 좌절에 빠집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 음경 같은 왜구 색기들 때문에 밥도 못 먹는다!"
이중 일부는 벌써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는 다시 분노의 노 젓기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대마왕의 지시는 뜻밖에도 "오늘은 출동 안한다. 내일 아침에 일찍 출동! 밥 먹자^^. 아우 배고파... 오늘 반찬 뭐냐?^^"
그날 조선 수군들은 조금은 불안 하지만 맛있는 저녁밥을 천천히 지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전날 밥을 맛있게 먹은 덕분인지 조선 수군은 다음날 견내량에서 왜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격침. 12척 나포라는 사상 초유의 전과를 올립니다.
□ 전투식량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 수군은 출전하는 동안 뭘 먹고 버텼을까요?
저녁에 서이나 육지에 정박하는 동안에는 밥을 지어 먹었겠지만 하루 종일 싸우거나 야간에 급작스레 이동해야 할 경우 배 위에서는 밥을 지어먹기가 불가능 할 듯 합니다.
딱 부러지는 자료는 없지만 장군께서 일기에 여러차례 무우 씨를 뿌리고 무우를 키우는데 장교를 지정하는 등 크게 신경 쓰신 모습을 보면 아마도 전투중의 식량으로는 무우가 제격일듯 합니다. 수분도 많고 먹고나면 일단 단시간 동안은 배가 부르니 전투중에 먹는 비상식량으로는 그만일듯 하네요.
□ 투항한 왜적
영화 명량에 보면 왜적의 신분에서 투항하여 아군 편으로 활약을 크게 하는 비중 있는 인물인 '준사'라는 캐릭터가 있었지요.
물론 난중일기에도 그의 이름과 약간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영화고...
실제 대부분의 투항한 왜적들 중 대부분은 함경도의 국경 수비 임무 등으로 팔려나가고 남은 투항병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실제 이괄의 난 때 투항하여 북쪽 국경 수비대로 근무하던 왜인들이 선발대로 한양까지 순식간에 처들어 오기도 했습니다.)
장군의 일기에 이 투항한 왜구들의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월 5일
투항해온 왜놈들로 하여금 물건 나르는 일을 시켰다.
*월 13일
일찍 새로 지은 누각에 올라가 대청에 흙을 치올려 붙이는데 투항해 온 왜놈들에게 시켰다.
이렇게 허드렛일도 시키고...
*월 24일
투항 해 온 왜놈 등이 그의 또래 왜놈 하나를 죽이자고 청했다.(아마 이중 간첩이나 냄새가 난 모양이다.) 그래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왜놈들은 왜놈들끼리 죽이고 살리고 지지고 뽂고 그렇게 만들다.)
*월 23일
우후 이몽구가 군량 독촉하는 일로 나갔다가 견내량에서 왜놈을 사로잡았다. 왜적의 동태를 캐묻고, 또 무엇을 잘하는지 물었더니, 염초굽는 일과 총쏘기를 다 잘한다고 했다. (이 놈은 살려 두기로 한다.)
□ 정유재란 이후 막바지에 몰린 왜놈들을 쓸어버리도록 각 도에 명나라 장수들과 대군이 파견되어 조선군과 합동작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명나라 군사들 중 막되먹은 놈이 꼭 한 두놈씩 있으니 이들이 조선 백성은 물론 조선군들과의 마찰도 심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날 이순신 장군이 주둔지를 철수하는 모습을 갑자기 보이자 명나라 장수가 무슨일인가 궁금하여 무러 보았다고 합니다.
장군께서 "니네가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으니 우리는 너네들을 부모처럼 여기는데 부모들 하는 꼬라지가 양아치보다 더하니 우리는 철수 한다!" 하였답니다. 놀란 명나라 장수가 연신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고 재발방지 차원에사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지 장군에게 몰어봅니다.
장군께서 니네들 병사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사고치면 내가 처벌 할 권한을 달라!고 하자 명나라 장수가 흔쾌히 승낙했다고 합니다.
이 때부터 명나라 병사들도 처벌 권한이 생긴 이순신 장군을 두려워하고 장군을 "노야(老爺), 어르신"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만큼 장군의 명성이 명나라 장수에게도 알려져서 절대적인 신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쉽게 통할 이야기가 아니었겠지요.
□ 통수치기 대마왕
1594년 초. 조정에서 충청, 경상, 전라도에 수군을 강화하고 전투함을 많이 제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장군이 실제 관할하는 전라 좌도는 실적을 채웠고 이억기가 지휘하는 전라 우도는 약간 저조한 실적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충청 수군은 실적이 아주 저조한 모양. 이후 어느날 갑자기 충청 수사를 잡아가려고 선전관이 도착합니다.
장군은 충청수사 구사직과 술도 한 잔 나눠 마시고 아쉽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충청수사의 저조한 실적보고와 처벌을 바라는 공문을 보낸 사람은 바로 장군이었습니다.
(재미 있는 이야기 참 많은데 글 재주가 없어 글이 다 죽을 쑤듯 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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