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태국에서 시직된 아시아 금융위기와 우리나라의 IMF 구제금융 요청에 대해 자료를 수집해 보았다.
동아시아 경제가 높은 성장을 계속한 기간은 엔화 가치가 강세를 나타냈던 86~96년의 10년간이었다. 85년 9월 이른바 '플라자 합의'에 의해 엔 달러 환율은 달러당 2백40엔대에서 95년 4월에는 80엔대로 3분의 1 수준으로 급락했다. 그동안 일본은 '엔고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아시아에 진출했다. 임금 등 생산 코스트가 싼 아시아를 생산거점으로 삼기 위한 전략이었다. 동아시아는 일본기업의 직접투자 바람을 타고 '기적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당시 미국은 저금리와 달러 약세의 시기였다(출처 관련 그림 참조). 달러 자금은 수익률 낮은 미국 시장을 박차고 나와 고금리의 동아시아로 몰렸다. 과잉투자와 거품이 발생했다. 이러던 1995년 초 역플라자 합의로 달러가 강세, 엔화가 약세로 바뀌며 자금의 흐름이 역류하기 시작한다. 외국인들이 동아시아에 묻어뒀던 돈을 달러로 바꿔 이탈하는 과정에서 태국 외환위기가 터진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내 금융기관들은 싸게 빌렸다고 좋아하던 달러 자금의 상환을 독촉받았는데, 달러를 구할 수가 없었다.
1994년의 미국 금리인상 시기(13개월에 걸쳐 약 3% 인상), 1994년 1월 중국의 위안화 절하와 1995년 4월의 역플라자합의로 인한 달러 강세, 엔화 약세가(출처 관련 그림 참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이끈 주 요인인 국가경쟁력의 약화와 경상수지 적자의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털깎기'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국제 금융재벌들이 서민들의 이득을 뺏는 상황을 양털깎기에 비유한 말로 쑹훙빙(宋鴻兵)의 '화폐전쟁(貨幣戰爭)'에 등장해서 유명해졌다. 그에 따르면 국제 금융재벌들은 시중에 유동성(돈)을 실컷 풀어놓고 경제적 거품을 조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투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통화량을 갑자기 줄여 경제 불황과 재산 가치의 폭락을 유도하는데 우량 자산의 가격이 정상가의 10의 1, 심지어 100분의 1까지 하락하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나서서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사들이는 데 이를 두고 양털깍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금융위기가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으니 우리나라만 해도 2010년 가격으로 3천억 달러 이상의 국부유출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는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 세력을 '악의 축'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옛날에는 영토를 침략하여 약탈을 하였는데 이제는 여러가지의 세련된(?) 방법이 존재하는 것 같다.
IMF(미국이 지배 주주)는 한국에 구제금융 210억 달러를 주는 대가(구제금융 조건)로 ‘자본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외국인들이 대기업과 은행 주식을 마음껏 살 수 있도록 ‘외국인 보유 한도’를 폐지하라는 것. 이후 미국 금융기관들은 주가가 바닥까지 추락한 한국 대기업과 은행 주식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IMF 구제금융이 결정되기 직전,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희망은 일본이었다. 일본 달러를 빌릴 수 있다면, ‘구제금융 조건’을 강제받지 않는다. 몇 년 안에 벌어서 갚기만 하면 된다. 당시 한국의 최고위 경제 관료가 기자에게 술회한 바에 따르면,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을 직접 방문해 달러화 대출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와 만난 일본 관료는 고개를 저으며 로버트 루빈 당시 미국 재무장관의 서한을 보여줬다. ‘한국에 자금을 지원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의도적으로 도발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 ‘호기’를 백분 활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세계체계론적으로 미국의 탈냉전 후의 아시아 전략의 일환이라는 대목도 주의깊게 봐야할 듯하다. 한 예로 일본의 동아시아에서의 헤게모니를 미국이 파괴하는 과정이었다는 것도 있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에 확대되어 왔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틀로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지난 IMF 위기 이후, 특히 김대중 정권의 출범 이후이다. 이후 한국 사회는 크게 변했다.
관련있어 보이는 사건들을 간추려 보았다.
- 1994년 1월 중국의 위안화를 50%나 평가절하
- 1994년 미국 금리인상 시기 : 13개월에 걸쳐 약 3% 인상
- 1994년 12월 : 한국 경제기획원 폐지
- 1994년 12월 : 멕시코 금융위기
- 1995년 1월 :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 1995년 1월 : 일본 고베 대지진 -> 엔화 강세로 진행
- 1995년 4월 : 역플라자 합의로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로 전환
- 1996년 3월 : 중국과 대만의 갈등
- 1996년 12월 : 한국 OECD 가입
- 1997년 2월 : 중국 덩샤오핑 사망
- 1997년 7월 : 홍콩 주권 반환
- 1997년 7월 : 태국 IMF 구제금융
- 1997년 10월 : 인도네시아 IMF 구제금융
- 1997년 12월 : 한국 IMF 구제금융
- 1997년 12월 : 제1회 아세안+3 회의 개최
- 1998년 8월 : 러시아 모라토리엄 선언
- 1999년 1월 : EU의 단일 화폐인 유로가 유통되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