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해드리는 이야기는 1905년 어느 겨울의 이야기.
이날 겨울궁전 앞에는 20만명이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여자와 노인은 물론이요, 어린 아이들까지 섞여 있었다. 무기라고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를 불렀다. "하느님이시여, 차르를 구하소서!" 그들은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나머지 '자비로운 아버지 차르'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자비를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가퐁이 맨 앞에서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폐하 ...저희가 바라는 것은 고작 일하는 시간을 하루 여덟시간으로 줄이고 규정 시간 밖의 노동을 없애달라는 것, 품삯을 적어도 1루블만이라도 받게 해 달라는 것 뿐입니다. .... 마지막 구원을 바라는 저희 백성들을 제발 도와주십시오...
가퐁 신부는 노동자들의 호소를 듣고 '아버지 차르'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대열을 이끌었다. 길을 가던 구경꾼들도 황제의 초상을 보고 가슴에 십자를 그었다. 경찰은 교통정리를 해서 이 평화로운 행진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겨울궁전 앞 광장에서 그들을 맞아 준 것은 자비로운 차르가 아니라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을 겨눈 군대였다. 노동자들은 행진을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뒷 대열에 밀려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총소리가 광장을 뒤덮었다.
하얗게 언 눈 위로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흘렀다.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식을 듣고 분개한 학생들도 몰려왔다. 겨울궁전 안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2만명이나 진을 치고 있었다. 군중은 군대와 경찰을 향해 욕을 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군인들은 다시 총탄을 퍼부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5백명이 넘게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 ...
그런데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이 사태가 왜 일어났으며 사회체제가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빠져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죄 없는 백성이 수천 명이나 죽고 다친 그날 밤, 그는 이런 일기를 써놓았다.
슬픈 날이다. 노동자들이 겨울궁전에 들어오려고 했을 때, 질서가 파괴되는 중대한 사태가 일어났다. 군대가 여러곳에서 총을 쏘아야만 했다. 주님, 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출근길에 읽는데 얼음이 되며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중간중간 제가 임의로 중략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영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누군가의 마인드가 여기 기술되어 있어서요.
허허
역사책을 펼치기만 하면 졸던 저에게 요새 쉬는 시간에 세계사/근현대사 책읽기라는 고상한 취미가 생겼습니다.
아참.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위의 겨울날은 레닌을 지도자로 한 사회주의 국가가 시작하는 날이 됩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후에 일가족 몰살을 당하며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로 기억되게 되지요.
출처 |
오전 출근 길, 십 몇년째 간직만 하던 책을 읽던 나
<유시민의 거꾸로 세계사 38쪽~4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