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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형...여운형을 친일파로 조작한 반민특위2호 검거범
게시물ID : history_240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3
조회수 : 148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1/07 06:28:03
친일매국노들의 글을 가지고 진짜 독립군을 헐뜯는 일베나 수꼴들의 행태는 계속 진행중이라 역겹네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326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3-26&officeId=00032&pageNo=2&printNo=766&publishType=00020

1w.JPG

http://www.podbbang.com/ch/4362?e=21446139

이박사이이제이 95편 친일파 이종형 시간날때 들으시면 좋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sCyaVoQkq0
0:01 / 1:14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D%98%95

...........
이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에 위장 가입한 뒤 밀정으로 활동했다. 1930년 밀정 조직인 만주보민회와 같은 조직인 것으로 알려진 초공군(剿共軍) 사령부 조직에 가담하여 이 단체의 고문 겸 군재판관을 지냈다. 이종형에게는 군경 지휘권이 주어져 지린 성에서 독립운동가 수십명을 직접 체포하여 살해하거나 투옥시켰다. 그에게 피수된 독립운동가는 무려 250명이라 한다. 그 가운데 17명은 이종형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았다고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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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패망 후에는 처음에 건준에 가담하고자 건준위원장 여운형을 찾아가 요청했지만, 단박에 거절당했다.[3] 그리고는 극우 우익계열에 가담하여 철저히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에 반공주의를 내세우는 《대동신문》을 창간했다. 대동신문은 미군정을 비난하고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몰아붙혔는데, 대표적인 예가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에다가 1946년 2월 10일자에 여운형이 학병 권유를 했다고 기사를 대서특필로 보도해 지면을 다뤘고,[4][5] 이어 1946년 2월 17일과 2월 18일자 대동신문 신문에 이틀 연달아서 특집연재로 다뤄 이종형 자신이 친일 한시(漢時) 한편을 짓고, 그것이 여운형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소개까지 했다.[6] 


또한1946년 5월에는 여운형 암살 음모를 교시하거나 찬양할 정도로 극우적인 활동을 펴다가 미군정에 의해 정간 처분을 받았고, 이후 《대한일보》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되었다. 이 무렵 흔하던 정치인 테러 활동을 뒤에서 지원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기도 하다. 부정축재도 많이 저질렀는데, 1946년 9월 24일에 적산(敵産)불법처분과 공금횡령을 저지른 죄로 구속[7]되어 3년 징역에 40만원 벌금처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게 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수해구제금 10만원을 불법처분한 혐의도 드러나 검찰로부터 재취조를 받기까지 했다.[8] 1946년 11월 8일에 돌연 무죄 판결받고 석방하였다.[9]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당시 이종형은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을 앞세워 정면 반대하였고, "반민법은 망민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궐기대회를 여는 등 적극적인 반대 활동에 나섰다.

이종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1949년 1월 10일 자택에서 체포되었는데, 반민특위 특경대가 이종형의 자택을 급습하자 그는 “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잡으러 왔느냐”면서 육혈포를 품속에서 꺼내 위협하다가 형사들에 의해 쇠고랑이 채워졌다.[10]

그는 반민특위가 최초로 검거한 박흥식에 이어 반민법에 의해 두 번째로 체포된 인물이었다. 특조위 사무실에 잡혀와서도 “나는 애국자다. 나를 친일파로 몰아넣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풀려나는 날 한민당, 빨갱이, 회색분자를 모조리 토벌하겠다”고 날뛰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뒤에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것은 빨갱이를 잡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사방에 정적을 만든 탓”이라는 등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하였다.[11] 반민법정에서도 '자신은 만주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했을 뿐'이라고 증언했으며 스스로 '독립운동의 터를 닦은 애국자'라고 자처했다.[12] 그러나 반민특위 해산으로 곧 풀려나왔고, 고향인 정선에서 국민회 소속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2대 국회에 들어갔다.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5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약력[편집]

가족 및 사후[편집]

대한일보사를 함께 경영했던 부인 이취성은, 장로교 목회자이며 한글학자로도 유명한 강병주의 딸이다.[13] 본명은 강신상이나 이종형이 필명을 지어주었다. 이취성은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 숭실대학교 이사장과 총장을 지낸 목회자 강신명[14]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이취성은 100만원 상당의 사기죄 혐의로 1949년 2월 7일, 불구속 당해 문초를 받기도 했다.[15]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밀정 부문에 선정되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2대 총선 국회의원(강원 제7선거구) 2대 국민회  22.38% 5,357표 1위 국회의원당선.png

이종형을 연기한 배우[편집]

  1.  국립중앙도서관
  2. 이동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역비한국학연구총서 13)》,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p125
  3. 이동 <몽양 여운형 평전>, 정병준 지음. p73
  4. 이동 1946년 11월 10일자 동아일보
  5. 이동 1946.11.09 경향신문
  6. 이동 1946년 11월 10일 경향신문
  7. 이동 1977.06.15 경향신문

출처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3260032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3-26&officeId=00032&pageNo=2&printNo=766&publishType=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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