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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혁명을 꿈꿨던 알리 라메다(Ali Lameda)의 북한 체류기
아래 글은 앰네스티의 1979년 알리 라메다 인권보고서를 임의로 재구성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사실 루이제 린저도 이 보고서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녀는 앰네스티가 보고서를 공개하고 있지 않아서 볼 수 없었다며 불평을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온라인 상에서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http://www.amnesty.org/ar/library/asset/ASA24/002/1979/en/0045d95d-bdab-47e0-a08c-dc969d5db2ae/asa240021979en.pdf
세계혁명의 꿈과 새로운 일자리
알리 라메다는 1924년 생으로 모국인 베네수엘라에서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었으며 열성적인 베네주엘라 공산당원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혁명뿐만 아니라 국제주의자로서 세계혁명을 꿈꿨던 라메다는 1965년 베를린(아마도 동베를린)에서 처음 북한 관리와 만나게 됩니다. 라메다는 북한의 급격한 개혁과 발전에 자극을 받아 북한이 세계 공산혁명의 든든한 성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편 1960년대 들어 신생독립국의 UN 가입이 본격화되고 북한과 중국/소련의 갈등이 표면화되자 북한은 비동맹외교노선에 전력을 기울이게 됩니다.(결과적으로 UN에서 주한미군 철수 등의 이슈를 제기하는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제3세계를 비롯한 해외 프로파간다의 필요성이 커졌고 불어와 스페인어의 번역가가 필요했습니다.
라메다의 비전과 북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1966년 북한은 라메다를 공식으로 초청하기에 이릅니다.
평양에서 그는 북한 외무성 산하의 외국어 출판부 중 스페인어 부서(정보와 프로파간다 즉, 선전선동) 책임을 맡았습니다.
라메다의 평양에서의 삶은 매우 윤택하였습니다. 연인(평양 거주 외국인 여성으로 실명은 공개되지 않음)과 함께 평양 국제호텔에 딸린 아파트에 살 수 있었으며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기사가 딸린 차를 제공받았습니다. 그의 주된 일은 김일성 저작집을 스페인어로 번역하고 홍보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외국어 관련 일로 북한에 초청을 받아 활동하는 외국인들이 제법 있었기에 이들과는 친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60이 넘은 나이에 열정적 사회주의자였던 프랑스인 쟈크 세디요가 있었으며 그와는 매우 친해졌습니다.
언뜻 순조롭게 보이던 두 외국인 혁명가들의 평양 생활은 뜻하지 않은 정치적 격변 속에 정상궤도를 크게 이탈하게 됩니다. 우선 평양생활임에도 불구하고 라메다는 어떤 북한 주민과도 교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제주의자였던 라메다는 고립감 속에 주어진 일만 반복하고 살았으며, 북한인 대화상대방은 박훈철(?)(Park Hun Chol)이라는 그의 상관이 유일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자리를 잡은지 6개월 시점인 1967년 3월 북한은 1956년 연안파 숙청(앞에서 소개한 루이제 린저의 글에도 언급되는 사건입니다.) 이후 11년 만에 대규모 숙청이 벌어졌습니다.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그룹과 함께 자생적 공산주의 세력으로 중국과도 관계가 좋았던 갑산파에 대한 숙청(국방/경제 병진정책에 대한 노선차이에서 비롯된 권력다툼이 숙청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으로 박금철, 리효순, 김도만 등이 실각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도 소원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수하와 영향아래 있던 조직들에 대한 숙청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 라메다(오른쪽)의 모습(1975)
갑작스런 체포
1967년 9월 라메다는 긴박한 시국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상관인 박훈철이 대접하는 성대한 저녁만찬에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만찬이후 며칠도 안지나서 어떤 예고도 없이 9명의 사회안전부(?) 소속 기관원들이 그의 아파트에 들이 닥칩니다. 이들은 라메다를 공화국의 적이라고 규정하고는 체포했습니다. 독방에 감금된 라메다에게 심문관은 구체적 혐의를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죄를 자백하라며 압박했는데 심문 중 라메다는 어떤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의 상관인 박훈철도 숙청되어 감금되었으며 세디요도 체포 되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죄수를 압박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굶주림이었는데 라메다가 지급받은 식사량은 하루 300 그램에 불과했습니다. 라메다는 나중 앰네스티 보고서에 차라리 맞는게 낫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라메다에 가해지는 직접적 신체 위협은 별로 없었으나 한 간수가 라메다가 인사를 하지않았다며 걷어차고 때린 경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메다 이외의 북한죄수들은 구타를 당했는데, 감방에서 지내면서 라메다는 다른 수형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고통으로 비명을 외치는지 아니면 공포로 인한 비명인지 구별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수감생활 중 특히 힘들었던 부분은 옷을 갈아입을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감방이 더럽고 축축하다보니 얼마 후에는 수형자들의 옷은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라메다는 감금된지 8개월 정도 지났을 때, 고열로 정신을 잃었지만 어떤 치료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수형자들 중에는 각혈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적절한 치료는 받지 못했으며 가끔 의사가 오지만 해열제만 처방하는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어 담당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의사도 자신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수감자 상태에 대해 일일이 당국에 보고하는 것도 귀찮고 가지고 있는 약도 테라마이신과 먹는 기름(edible oil)이 전부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라메다가 추정하기에 그 수용시설에 수감된 인원은 1,000명 이상이었습니다.
그 수용시설에는 어떠한 형태의 사식이나 소포, 연락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재활이라는 명분으로 명시적으로 알려준 적도 없는 자기 죄에 대한 자아비판이 지속적으로 강요되었습니다.
수감생활은 항상 똑 같은데 16시간 동안 졸지 않고 앉아서 교도관과 철창을 바라봐야 했으며, 배식은 일일 3회 오전 7시, 오후 1시, 오후 7시로 지저분한 빵조각과 스프가 전부였습니다.
석방과 2차 체포
라메다는 수감생활 1년만에 갑자기 석방되었습니다. 아파트로 돌아가보니 동거녀는 아직 살고 있었지만 라메다의 몸상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무려 22kg이나 체중이 줄었습니다. 석방 후 2달이 지나면서 라메다는 연인을 설득하여 그녀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라메다는 출국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연인의 출국만 배웅을 하고 아파트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기관원들이 다시 들이 닥쳐 라메다를 두번째로 체포하였습니다. 라메다는 2차 체포과정이 1차보다 더 폭력적이었고 끔찍했다고 증언을 하였는데, 라메다가 왜 체포하는 거냐고 따지자 기관원들은 이유는 당신이 알 것이라고 하며 라메다가 약속을 어기고 비밀을 발설했으며 북한에 적대적 비난을 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라메다를 제국주의 세력의 첩자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라메다는 북한 당국이 그를 의도적으로 석방하고 나서 라메다의 숙소와 전화기에 도청장치를 설치하여 동거녀와 나눈 이야기를 엿들은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라메다의 문학작품과 원고를 부르주아적 나쁜 습관이라며 압수하여 가져갔습니다.
재판
라메다는 다시 심문을 받았는데 상황은 1차 체포 때 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이어진 공판에서 라메다는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기소되었으며 이는 일반 형사범에 비해 매우 위중한 혐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재판은 구체적 죄목을 피고인에게 알려주지 않았으며 피고인은 재판정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문화혁명, 크메르루즈 관련 증언에서도 항상 나오는 것이 증거제시 없는 강압적 자아비판입니다.) 따라서 재판에 어떤 증거도 제출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라메다도 자신을 방어할 권리도 없이 죄를 인정하도록 압박받았는데, 라메다는 줄곧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 없으며 단지 북한의 정부관리가 되기 위해 북한에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재판 중에 라메다가 변호사를 선임해달라고 하고 재판을 공개로 했으면 좋겠다고 요구했으나 그러한 요구는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비나을 받고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라메다를 사보타지(태업), 스파이, 내부 협력자 탐색의 혐의로 20년의 중노동형을 구형했으며, 재판부는 단 5분의 정회 후 라메다에게 2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짐단수용소의 경험
라메다는 소위 재활을 목적으로 집단수용소로 보내집니다. 집단수용소로 가는 길은 살을 애는 추위 속에 늑대울음이 들릴 정도 였는데, 라메다의 몸상태도 안좋아서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수용소의 감방은 한겨울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는데 난방이라고 해봐야 방을 관통하는 파이프가 한 밤에 5분정도 따뜻해지는 것이 전부였으며 추운 방에 맨발로 버티다 보니 발톱이 모두 빠졌습니다. 또한 고향 베네주엘라의 가족과 유럽의 지인들로부터 여러차례 소포와 편지가 보내졌으나 한 건도 받지는 못했습니다.
라메다가 수감된 캠프의 이름은 Suriwon(사리원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용소였는데 전체 수감자가 6천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다른 수형자들은 주로 기계를 망가뜨렸거나 집단의 규율을 어긴 사람들이었는데 라메다는 원칙적으로 다른 수형자와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사실 라메다는 수용소가 생긴 이래 최초의 외국인 수형자였습니다.
라메다가 수형생활 중 알게 된 사람에 따르면 당시(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 북한 전역에서 이런 집단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총 15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이번 수감생활은 라메다에게 매우 가혹했는데 6년이나 되는 기간도 그렇지만 강제노역의 할당량은 점점 증가하는 반면 음식할당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또한 수감자들은 교화의 한 수단으로 정기적인 사열을 위해 연습을 해야했습니다.
북한 수감자들은 보통 15년 형 중 12년이 지나면 풀려나곤 했는데 라메다는 20년 중 7년이 안되어 석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혜는 결코 북한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여인의 기구한 운명(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라메다는 수감생활 중 200명 정도의 여성 수감자 그룹을 마주친 적이 있었습니다.
여성 죄수들은 절도죄로 수감된 경우가 많았는데, 33살의 한 여성은 흡연문제로 모든 것을 잃고 수용소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상공부 공무원의 부인이었는데 흡연하는 것을 남편에게도 숨기고 화장실에서만 몰래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직장동료가 그녀에게 담배냄새가 나는 것을 수상히 여겨 직장 상부에 고발하였고 공산당은 그녀를 소환하여 제철소나 광산으로 하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녀는 2년을 남편과 헤어져 생산현장에서 중노동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거기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피다가 그만 다시 적발되었습니다. 공산당은 재차 그녀를 소환하여 집단수용소행을 명령하였습니다. 라메다는 북한에서 여성의 흡연은 죄로 분류되며 할머니들만 예외라고 증언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릅니다.)
석방: 차우세스쿠의 구명노력 그리고 앰네스티 인권보고서
라메다와 그의 동료 세디요가 구속되자 세계 곳곳에서 이들에 대한 구명운동이 일어 났습니다. 라메다의 고국인 베네수엘라 정부와 함께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도 라메다를 석방시키기 위해 북한 당국에 여러 요청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라메다는 1974년 6년만에 2차 수감생활에서 풀려났으며 귀국 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차우세스쿠는 라메다의 귀국길에도 그를 루마니아로 불러서 치하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차우세스쿠에 대한 이야기 중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 에피소드여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한편 앰네스티는 라메다를 북한의 양심수 문제로 설정하고 그의 석방을 위해 애썼으며 그가 석방되자 인터뷰를 통해 인권보고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아마도 라메다 보고서는 국제사회에 북한의 인권현황을 알린 최초의 보고서이지 않을까 합니다.
또 다른 국제주의자의 비극: 자크 세디요의 죽음
라메다와 동시에 체포된 외국인으로는 프랑스인 쟈크 세디요가 있습니다. 그는 1960년대 초 알제리에서 처음 북한 요원과 접촉했는데 라메다의 증언에 따르면 세디요는 열렬한 국제주의자로서 60이 넘어서 북한에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젊어서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공화국 군대의 대령까지 진급을 하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알제리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라메다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대외선전선동 활동에 동참하고자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여 평양에서 프랑스 부서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세디요는 우선 북한의 대외 프로파간다가 그리 효과적이지 못한 점을 깨닫게 됩니다. 14살에 불과한 소년이 공산당도 없던 나라의 공산주의 그룹 리더가 되어 혁명을 이끌고 일본군을 무찌른다는 설정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거의 먹혀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세디요는 이런 문제를 상부에 보고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세디요는 프랑스로 출장을 떠나 현지에서 서베이를 통해 북한의 기존 프로파간다의 현실을 직접 확인하고 개선점을 내오기도 하였으나 그 역시 1967년의 정치적 파도를 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북한 당국은 누가 그를 프랑스에 출장보냈냐고 따지며 그를 프랑스 제국주의자의 스파이로 단정지었습니다. 환갑을 넘긴 국제주의자로 일평생을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세디요는 모든 혐의를 부정하고 완강히 버텼으나 극악한 수형생활은 그의 생명을 조금씩 갉아먹었습니다. 1975년 세디요는 석방되었지만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사는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려는 마지막 희망은 악화된 건강으로 끝내 이루지 못하고 북한 땅에서 쓸쓸이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촘스키와 애쓰모글루
북한 관련 글은 우선 여기서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원래는 촘스키 교수와 애쓰모글루 교수의 북한이야기를 별도의 글로 추가하려고 하였으나 촘스키 교수의 북한 이야기는 사실 한국전쟁 시 미국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댐을 비롯한 관개시설의 75%가 파괴된 것에 대한 분노가 거의 전부입니다. 촘스키 교수가 보기에 이 행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받을 수 있는 전쟁범죄이며 따라서 영변핵위기 등 일련의 북한 핵위협에 대해 저런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북한 동정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경제번영의 상관성에 설득력있는 연구를 해온 애쓰모글루 교수는 이미 국내에도 번역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남북한의 사례를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애쓰모글루 교수가 보기에 남북한은 아주 좋은 발전모델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는데(로빈슨 교수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반대의 해석이었지만 말이죠) 공통된 인종, 문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음에도 북한은 경제재앙을 남한은 경제기적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채택 때문만은 아니며 남한에서는 경제적 삶을 지배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규칙인 경제제도가 국민의 저축과 투자, 혁신을 보상해준(물론 군부독재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반면, 북한은 그렇지 못한 것이 결정적 차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santa_croce/220345883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