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우민화 정책과 억압[편집]
당시 일제는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20년간의 한반도식민지배가 안정적 수준으로 확고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본토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면서 동아시아전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우민화하기 위해 고등교육 제한, 직업교육과
일본어·
일본사 교육 등을 실시하였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 금지, 조선인 학생에 대한 무시, 교육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조선 학생들을 억압하였다. 결국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과 무시 그리고 우민화정책을 당하면서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다. 광주소재 각 고등보통학교(중고통합과정)에는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학생조직이 생성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인 학생들에 의한
조선인 학생들의 차별, 무시 역시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하는 원인이 됐다.
국내 독립 운동 세력의 단일화[편집]
1926년 4월 순종의 사망으로 6.10만세운동이 전개된다. 1926년 연말이 다가오자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내에서는 일본에 의한 자치주의에 현혹되지 말고, 흩어진 민족의 역량을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흐름은 홍명희, 송진우 등의 여러 지도자들에게도 반영되었고 민흥회 등에 반영된다. 사회주의그룹에서도 정우회선언 등을 통해 분열적 종파주의로부터 좌우합작으로 나아갈 것이 결의된다. 그 결과 1927년 2월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를 회장으로 동아일보의 송진우를 비롯해 허헌, 김병로, 한용운 등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좌익-우익의 지도자들의 합작에 의해 민족단일당인 '
신간회'가 조직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터지게 되는 1929년의 연초에는 신간회의 지회가 144개, 회원은 3만9천여 명에 달해 각 지역의 청년, 노동, 농민운동을 지도해 갔다.
광주 지역에서도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었으며, 1927년 11월 전남청년연맹에서 광주청년동맹이 분리되어 결성되었다.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의 주요 임원들은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학생조직의 배후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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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위키 내용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잘 알려지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보니..
저도 최근에 이걸 알게 됐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