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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버렸던 세계적 천재 수학자 이임학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39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잠룡815
추천 : 3
조회수 : 172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10/31 13:07: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302151325&code=940100

[커버스토리] 세계적 천재 수학자 이임학을 기억하는 국가의 방식박은하 기자 [email protected]입력 : 2015-10-30 21:51:32타국서 ‘리군이론’으로 수학 역사 쓴 나…날 버린 조국, 이제 와서 ‘국민’이라 하네

1947년 서울 남대문시장을 지나던 25세 청년이 미군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미국 수학학회지 한 권을 발견한다. 경성제대 물리학과 수석 졸업생인 이 눈 밝은 청년은 당시 미국의 저명한 수학자 막스 초른이 “모르겠다”고 한 문제를 풀어 잡지사에 투고한다. 정부도 수립되지 않은 국가의 무명 청년이 보낸 편지는 2년 뒤 논문 형태로 출간돼 세계 수학계를 놀라게 했다. 청년의 이름은 이임학이었다.

잊혀진 천재수학자 이임학 (1922~2005)

1996년 10월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울펜손홀 앞에서 한국인 교수들과 기념촬영을 한 이임학 교수(가운데). 김동균 고려대 교수 제공


(중략)


 1947년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쓰레기더미에서 우연히 미국 수학회지 ‘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를 발견했다. 잡지에는 당시 세계적 수학자였던 막스 초른의 논문이 실려 있었다. 이임학은 초른의 논문에서 “모르겠다”고 밝힌 부분을 풀어내 잡지의 편집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임학이 보낸 편지는 1949년 미국 수학학회지에 공식 논문으로 실렸다. 이임학의 생애 첫 논문이었다. 또한 한국인 최초로 해외 저명학술지에 실린 논문이었다.

1950년 6월 이임학은 서울에서 전쟁을 맞았다.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바람에 피란갈 시기를 놓친 탓이었다. 이임학은 앞서 서울대를 사임한 뒤 김일성종합대학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방북 기간에 공산주의 북한사회에 반감을 느꼈다. 이때 이임학의 어머니와 누이동생도 서울로 이주했다. 서울에 남은 그의 가족은 전쟁 중에 북한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어머니가 “임학이는 의용군에 입대했다”고 둘러댔고, 그는 숨어 지냈다. 9월 서울 수복 후 서울은 살벌했다. 인민군 통치 기간에 부역한 사람들을 찾아낸다며 피란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시민들을 닦달하고 재판·처형하는 일이 연일 벌어졌다. 이임학은 1·4후퇴 때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거쳐 부산으로 피신했다. 


전쟁 중에도 미국공보원(USIS)에 가서 수학잡지를 살펴봤다. 해외에 나가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953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에 편지로 입학 허가를 받아낸 그는 마침내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2년 후 이임학은 한국 국적을 박탈당하고 만다. 비자를 연장받으려고 한국 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여권을 빼앗겼다. 이임학은 당시 “영사관 직원이 ‘당신은 한국에 돌아갈 거라고 생각되어 여권을 없애버렸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공부를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압박이었다. 이임학은 밴쿠버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고 캐나다 정부로부터 영주권과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북미에서 활동하며 군론(group theory)의 발전에 공헌했다. 1967년 그가 발견한 새로운 집합 2건은 ‘유한단순군의 분류’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름을 딴 ‘리군이론’이 만들어졌다. 


미국 수학 백과사전, 영국 수학사전, 일본 이와나미 수학사전에도 이름이 실렸다. 가장 권위 있는 수학자들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디외도네의 저서인 <순수 수학의 파노라마(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에도 역사적인 연구 업적가 21인으로 기록되었다.

이임학 박사의 대표 논문 A family of simple groups



이임학은 ‘세계적 수학자’가 됐지만 한동안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국가의 소환 명령에 불응하고 북한 방문 경험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 여권으로 학술교류 차원에서 북한을 방문했지만 남한정부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임학은 한국계 기자와의 첫 인터뷰에서 “조선말로 해 주세요. 그러면 생각이 더 잘 난다”고 말한 적 있다. 그에게 조국은 ‘조선’ 하나였다.


(생략)



이분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때 돌아오셨다면


해외에서 독일 올림픽 주제가를 만들정도로 활동하셨던 윤이상같은분들도  


간첩이라며 사형으로 죽일려던 시절이었으니


분명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듭니다.



이제와서 대한민국에서 (국적이 박탈되고,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고향 방문과 친척들과의 서신 교환도 제한받은 이야기는빼고)


그를 기린답시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며 호들갑떨지만 군부독재시절이었다면


분명히 간첩으로 죽이거나 죽일려고 했을거같다고 생각듭니다.


본인에게는 아쉬웠겠지만 


저시기에 대한민국에 안오고 해외에서 죽어서 오히려 다행인거같네요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302151325&code=9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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