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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나치청산은 일본과 달리 성공했다? - 독일도 다를 건 없었다
The photo of von Trotha's descendents walking with Herero officials at the apology in 2007. - imagingenocide.wordpress.com
'1904년 아프리카 식민지 나미비아에서 한 부족민(수만명)을 대량학살했던 독일군 사령관 로타 폰 트로타의 후손이 최근 희생자 후손들을 만나 사죄했다. 폰 트로타 일가 11명은 나미비아 중부에 있는 헤레로 부족장을 만나 “폰 트로타의 후손들은 100여년 전에 일어났던 끔찍한 인권유린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며 사죄한다”고 밝혔다. 이는 독일의 나미비아인 대량학살 이후 처음으로 발표된 공식 사과이다.' - 2007년 10월 7일자 BBC 방송의 내용 중
'나치 시대의 악명높은 특별재판소에서 근무한 258명의 재판관들과 검사들 중에서 95명이 전후 독일연방공화국의 사법부에서 다시 자리를 얻었다. 이는 전체 3분의 1이 넘는 숫자였다.' - 귀도 크놉(프랑크푸르트 대학과 암스테르담 대학,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사학, 정치학, 신문방송학을 공부하였다.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저널리즘 교수가 되었다. <벨트 암 존탁>지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지를 거쳐 독일 공영방송 ZDF에서 근무하였고, ZDF의 현대사 편집국장으로 재직하였다. ZDF에 근무하면서 주목받는 현대사 관련 시리즈물을 제작하였고, 야콥 카이저상 및 독일 방송상 등 다수의 방송 관련 상을 수상했다)이 저술한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의 내용 중
'제3제국(나치 독일) 시절의 범죄 때문에 피고석에 앉아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 가운데 법을 굴절시켰다고 비난받는 법률가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러나 불법의 12년 동안 법은 굴절된 정도가 아니라 발로 짓밟히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왜곡되었다.' - 서독의 신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1964년 2월 28일자 '법이 굴절되었다'의 내용 중
1985년 5월 8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서독의 비트부르크 공동묘지에 있는 악명높은 SS 친위대 묘지를 참배하는 모습(좌), 이 묘지에 안장된 일부 사람들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SS 친위대 영전에 꽃을 헌화하고 나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헬무트 콜 독일 수상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우)
우리는 흔히 현재 일본의 망언들과 태도를 보면서 독일과 비교하곤 한다. "독일은 저렇게 반성도 하고 사과를 하는데, 일본은 왜 저 모양이지? 독일은 나치에 대한 청산을 제대로 했고, 일본은 냉전이라는 시대의 특성으로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한 지적이다. 우리는 독일이 일본보다 전후에 제대로 전범들을 처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독일도 역시 마찬가지로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더군다나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서 전범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전후 독일에서는 유대인 학살이나 학살을 방조 또는 가담했던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들이 능력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처럼 서방의 암묵적인 묵인 또는 도움 아래 독일연방군에 대거 포진했었다. 또한 법조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역시 실력있는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들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대거 포진했었다.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의 일본과 독일의 역사인식을 비교하는 풍자만화의 모습
독일과 일본이 현재와 같이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그렇다면 대체 무엇인가? 또한 왜 독일이 전후에 제대로 전범들을 처벌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양심이 있는 국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진 것일까? 나는 이에 대해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화는 아마 우리나라와 동질감을 느끼고, 또 동병상련(예컨대 통일이나 민족성)을 느껴 독일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 그리고 일본에 대한 악감정과 편견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과 독일의 완전한 색채대비를 통해 선과 악의 구도를 만들어 이러한 심리적인 경향을 억지로 끼워맞춰 자신들 스스로 자위를 하는 것이다. 실상 나치 독일의 전후 청산들을 보면 오히려 일본 전후의 처리보다 더욱 관용적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일본의 경우에 오히려 맥아더의 경우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다는 이유만으로 청렴결백한 일본의 장군을 사형시키는 사례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대표적인 청산실패는 유대인 학살과 관련해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있었던 전범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모두가 아는 것과 달리 유대인 학살은 부각되지 않았고 단지 전쟁상태에 벌어진 안타까운 일로만 치부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기소된 나치전범들이 앉아 있는 피고석
서구열강의 사람들 자체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학살은 뒷전으로 물러나 나치의 악랄함만을 강조하는 데에만 사용되었고,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나치를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다뤄졌다. 그래서 주요 A급 전범에 대한 처벌만 강했지 그 이외의 하부조직에 대한 처벌은 상당히 미약했다.
예컨대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부서로는 내무부, 법무부, 재무부, 교통부 등의 정부조직들이 있는데, 재무부의 경우 유대인들의 이송이나 재산과 관련한 모든 필요한 문서들을 맡았던 크로시크는 10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2년만에 조기 석방되어 90세에 사망했다. 또한 교통부의 경우도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이 300만이 넘음에도 교통부와 제국철도청 관계자들의 경우 어느 누구도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간첸뮐러라는 하루에 5천명의 열차편을 제공한 사람도 관계자도 재판에는 회부되었으나 심장병으로 이유로 30만 마르크의 보석금만을 내고 바로 풀려났다.
나치 사법부 테러의 상징 롤란트 프라이슬러 판사가 재판에 앞서 나치식 경례를 하는 모습, 그는 과거 공산주의 전력이 있었던 자로 이러한 경력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나치 정권을 위해 봉사했다
그렇다면 법률가들은 어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과거에 나치 독일의 편에 서서 법의 잣대를 왜곡했던 판사들 가운데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수많은 나치 법률가들이 사법적 소추의 칼날을 교묘하게 피해갔으며, 이들의 행적을 잘 알면서도 법조계에서는 동료 의식 때문에 처벌을 주저했다.
유대인 학살에 관한 한, 법률가들의 법 지식은 정의를 구현하거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보다는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더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나치 시대의 악명높은 특별재판소에서 근무한 258명의 재판관들과 검사들 중에서 95명이 전후 독일연방공화국의 사법부에서 다시 자리를 얻었다. 이는 전체 3분의 1이 넘는 숫자였다.
1970년에는 롤란트 프라이슬러라는 나치 독일의 사법부 범죄의 상징인 판사가 독일의 언론에 등장하는데, 그의 미망인인 마리온 루세거가 연금을 수령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에 뮌헨의 연금국은 그녀에게 전쟁 희생자 연금과 더불어 매달 400마르크의 금액을 지급하도록 결정했는데, 이는 손해 배상 금액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는 프라이슬러가 빗발치는 폭탄 세례에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전후 독일에서 변호사나 고위직 관료로 일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프라이슬러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1944년 7월 15일, 히틀러 암살작전인 '발키리(Valkyrie)'가 실행되기 5일 전의 모습, 암살의 주역인 Claus von Stauffenberg 대령(왼쪽)과 히틀러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나치 독일의 악랄한 사법부 테러의 상징인 프라이슬러의 미망인과 달리 1944년 7월 20일 사건에 가담한 히틀러 암살작전인 발키리에 가담했다가 처형을 당한 이들의 미망인들은 독일연방공화국의 판결에 따라 희생자 연금을 받지 못했다. 프라이슬러에게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희생자 중의 한 사람인 마고트 디스텔은 푼돈인 920마르크를 일시불로 지급을 받았을 뿐이다.
또한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 안에 공장을 지었던 최초의 기업이자 수용소로부터 강제적 노동인력을 공급받아 I.G 파벤 기업은 아우슈비츠에서 'Buna'라고 불리던 독일제 합성고무의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데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수용소 수감자들을 동원하여 필요한 인력을 무제한 공급해주겠다는 SS 친위대의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의 약조로 더욱 번창하게 된다.
강제수용소들을 담당하는 SS 친위대와 I.G 파벤의 공조는 상당했다. I.G 파벤이 막사를 지으면 친위대는 나무로 된 침대를 조달했고, 친위대가 경비병을 배치하면 I.G 파벤은 생산 관리를 위해 공장경찰을 투입했다. I.G 파벤이 규정을 위반한 유대인 수감자들의 처벌을 요청하면 친위대는 즉각 처벌했고, 친위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표준 식단을 노예노동 담당자들에게 제공하며 I.G 파벤은 증식을 마련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옆에 건설하고 있는 I.G 파벤 공장
강제수용소와 기업의 최초의 유착이 성공적으로 성사되자 크루프 사, 헤르만 괴링 사, 지멘스 사 등도 이러한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노예노동과 관련되어 피소된 I.G 파벤의 인사들은 형량이 가벼웠다. 5명의 피고들 가운데 2명에게는 8년형, 1명에게는 7년형, 나머지 2명에게는 6년형이 선고되었을 뿐이다. 법조계, 기업, 정부기관만이 아니었다. 학계도 마찬가지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쌍둥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저질러 3,000명의 쌍둥이 중에서 180명의 쌍둥이만이 살아남았었다. 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의 천사'로 불리는 멩겔러가 자행한 짓이었다. 멩겔러는 뮌헨 대학에서 그의 지도 교수였던 몰리존의 추천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유전학 및 인종 우생학 제국 연구소에서 독일 쌍둥이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오트마 폰 페어슈어의 연구 조교가 된 후, 그의 권유로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요제프 멩겔레의 모습
그는 나치 독일에서 유전학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유행하는 것에 고무되었다. 그런 이유로 그가 멩겔러에게 "아우슈비츠는 수많은 인종, 인간, 모든 종류의 실험 대상을 다룰 수 있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연구 천국"이라며 강력하게 추천을 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로 인해 단 한 번도 책임을 추궁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952년에 오히려 독일인류학회 회장직을 맡기까지 했다. 페어슈어와 그의 조교인 멩겔러는 나치 독일에서 특별법을 실제로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항상 앞장을 섰다.
또한 1998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제42차 독일역사학대회를 뜨겁게 달군 ‘나치시대 역사가’에 관한 논쟁은, 피셔논쟁 이래 최고의 논쟁이었다는 평이 나돌 정도로 격렬했고 감정적이었으며, 또 그만큼 정치적이었다. 나치와 관련된 격렬한 논쟁을 이미 수차례 경험했던 독일 역사학계가 이처럼 떠들썩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른 사람이 다름 아닌 베르너 콘체와 테오도르 쉬더였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전후 독일 역사학계를 대표했던 베르너 콘체의 이론에 따라 만들어진 호전적인 포스터의 모습, 베르너 콘체와 테오도르 쉬더는 나치 독일의 동방진출에 대한 역사적 정당화를 하는 데에 일조했다
전후 독일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이 두 역사가가 바로 나치에 ‘부역한’, 문제의 역사가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구조사(Strukturgeschichte) 및 사회사(Sozialgeschichte)라는 새로운 학풍을 선도하면서 현재 독일 역사학계의 핵심적인 인물들을 길러낸 장본인이었다. 이들 이외에도 그동안 나치부역의 혐의로 인해 논쟁과 연루된 역사가나 학자들은 많았다.
법학자 슈미트와 철학가 하이데거와 같이 널리 알려진 경우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역시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가였던 오토 브룬너나 에르트만이 나치에 부역한 혐의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아헨공대의 독문학 교수이었던 쉬베르테가 원래는 나치당원이자 SS에 소속된 쉬나이더였음이 최근 밝혀져 커다란 충격을 주기도 했다.
독일 국방군의 모습, 독일의 국방군은 나치의 사조직이었던 악명높고 정예로 불리우는 SS 친위대의 대대적인 반인륜적인 학살과는 전혀 무관한 독립적인 군사조직이었다는 신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미국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SS 친위대만큼이나 독일 국방군도 역시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독일의 국방군은 나치당에 속한 군사조직 SS 친위대와는 별개로 깨끗하고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던 집단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알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독일이 통일이 된 이후에 독일과 미국이 만들어낸 신화였다는 것이 발혀졌다. 예컨대 독일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질서에서 동독과 서독이 서로 대치를 하자, 자신들이 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기존의 경력이 있는 군인들을 우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냉전의 상황에서 그들은 유대인 학살과 같은 반인륜적인 범죄에 가담했던 독일의 국방군을 학살이라고는 몰랐던 깨끗한 군사조직임을 부각시켜 선전하였다. 그럼으로써 국방군 소속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자신들의 냉전치하 질서의 수호자로 각색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1950년대 독일 사법 기관은 나치 시대 독일군의 범죄를 재판에 회부하려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국방군 장교들에 대한 재판 기록은 전무했다. 1952년부터 1959년까지 국방군 장병들에 대한 재판은 말할 것도 없고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유대인들의 모습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이 현재 일본에 못지 않게 상당히 미흡한 과거사 청산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일본의 상황이 극과 극처럼 다른 것일까? 이는 고려대학교 법학과 학사와 사학과 석사,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아 경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가 타계한 김승렬 교수가 잘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 학살이건 개별적 살인이건 비전투원에 대한 살인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지만, 홀로코스트만큼 주목받은 학살은 없었다. 왜일까? 살인방법의 효율성 때문이기도 하고 그 규모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피해자가 강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홀로코스트의 특이성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은 세계 제국인 미국의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을 증가시켜왔다." - 김승렬 교수가 번역한 <독일국방군>에 쓴 서문의 내용 중(p10~11)
즉, 독일이 학살한 피해자가 매우 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 아니 그 이전에도 유대인들이 끼친 세계적인 영향력은 매우 강했다. 하지만 일본이 학살한 베트남이나 한국, 중국과 같은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갈려 일본보다도 같은 민족을 적으로 여기며 서로 물고 뜯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고, 비로소 최근에야 영향력이 확보되고 강력해지고 있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일본에 의해 피해를 받은 국가들은 냉전의 상태에서 내전을 하기에 바빴기 때문에 일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압박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6.25 특수로 그 피해국가들과 공생을 하지 않아도 발전을 했다. 반면, 독일은 공생을 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의 뜻에서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장면. 정말 독일은 진심이었을까?
우리가 하나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독일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절대 사과를 하면서 죄를 잘 뉘우치는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의 위험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배웠고, 세뇌되었다. 그래서 전후에 독일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안전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진심이든 위선이든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한 것이었다.
그 근거로, 독일은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 국가인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대량학살과 만행에 대한 보상은 일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봐달라고 요청을 했다. 사과도 유대인에게 했듯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한 것이 아니라, 외무장관이 대신 했다. 그나마 그 이전에 최초로 용서를 구한 것이 수만명의 나미비아 부족들을 학살한 사령관의 후손이 100년만에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 것이었다. 집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행동은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독일은 내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도 과거 청산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상태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정부는 올해 초, 2차 세계대전 당시 ‘디스토모 대학살’ 등의 피해 유가족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하지만 독일은 이미 다 끝난 문제라며 맞서고 있다.
나치 독일의 친위대가 그리스에서 저지른 ‘디스토모 학살’, 이 학살로 수백명이 사망했지만, 이 학살에 연루된 친위대 출신들 중 처벌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고,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배상 판결도 없었다
나치 친위대가 ‘디스토모 학살’ 끔찍한 학살에 나선 것은 나치 독일군을 공격한 현지 빨치산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다. 2003년 독일 연방법원은 이른바 ‘디스토모 학살’을 “2차 대전 중 저질러진 비열한 전쟁범죄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배상 판결은 없었다. 당시 학살에 연루된 친위대 출신 독일인 가운데 처벌받은 이도 전혀 없었다.
또한 나치 독일군은 그리스에서 닥치는 대로 재화와 식량을 약탈했다. 그리스인 수백만 명이 물자 부족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사망자가 30만명을 웃돌았다. 나치 독일군은 그리스 중앙은행까지 밀고 들어가 강제로 대규모 '전쟁차관'까지 얻어냈다. 당시 강탈해간 '전쟁차관' 가운데 지금까지 상환된 것은 한 푼도 없다. 경제학자들은 독일 정부가 이를 현시점에서 상환할 경우 600억파운드(약 107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금액이 얼마나 대단한 금액이냐면, 이 금액을 독일이 그리스에게 모두 돌려줄 경우 유럽의 그리스 위기는 사라질 것으로 본다.
독일도 처음부터 과거사 극복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종전 직후 미국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됐던 ‘탈(脫)나치화’는 다수 독일인의 반발을 초래했고, 게다가 동서냉전이 시작되면서 용두사미식으로 중단되곤 했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부흥에 매달리던 1950년대 독일 사회는 과거사에 대해서는 ‘침묵의 공동체’였다.
이런 침묵을 깨뜨린 계기는 무엇일까. 루츠 씨는 “유대인 연합회를 필두로 하는 국제사회의 강력하고 끈질긴 압박과 독일 지식인 사회의 노력”이라고 대답했다. 특히 전후에 태어난 ‘1968혁명’ 세대가 부모들에게 ‘나치 시대’에 무얼 했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인들은 나치 테러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것.
독일인들은 또 유대인에 대한 참혹한 범죄를 낱낱이 드러낸 아우슈비츠 재판(1963∼1965년), 나치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논쟁(1965년) 등을 겪으면서 어두운 과거에 대한 태도를 조금씩 바꿨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인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총리가 집권하면서 과거사 청산 자세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게 됐다.
“독일이 언제나 스스로 과거사 반성을 한 것은 아닙니다. 수출 주도 국가 독일이 상대국에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상금을 지불하고, 사죄를 한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냉전시대에는 옛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지요. 당시엔 독일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독일이 적극적으로 사죄하지 않았다면, 독일이 유럽 통합의 주역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토요판 커버스토리]전범국→모범국 탈바꿈한 독일을 가다 : 뉴스 : 동아닷컴
독일이 소수 인종에게 보상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들이 얻는 것이 없거니와, 국제적인 영향력도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독일이 일본처럼 관대하고 자비롭고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들 입맛에 맞춰 있지도 않은 사실을 편향되게 보도하여 일본과 독일을 선과 악으로 묘사하는 이상적인 사고부터 뜯어 고치는 것이 어떨까?
<참고자료>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귀도 크놉(프랑크푸르트 대학과 암스테르담 대학, 그리고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사학, 정치학, 신문방송학을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벨트 암 존탁>지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차이퉁>지를 거쳐 현재 독일공영방송 ZDF에서 현대사 편집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저널리즘학 교수로 있다)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대학살>, 최호근(고려대학교 사학과와 같은 대학교 대학원을 마친 후,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막스 베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전임강사, 서울대학교 박사 후 과정, 부산교육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나치청산 ← 송충기(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보쿰 소재 루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을 거쳐 현재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독일국방군>, 볼프람 베테(독일 군사사연구소에서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사 연구를 했으며 역사적 평화연구그룹을 주도했던 역사가다. 현재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고 있다)
[단독]獨軍 후손 "100년전 조상의 학살 사죄합니다” ← 백소용 기자, 세계일보
전범 아이히만 사형선고 50년 ← 이정애 기자,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전범국→모범국 탈바꿈한 독일을 가다 : 뉴스 : 동아닷컴
http://news.donga.com/3/all/20130824/571978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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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fmkorea.com/2261179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