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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두건을 쓴 사람들, 삼국시대의 서막을 열다.
게시물ID : history_235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푸른미르
추천 : 1
조회수 : 77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10/07 12:25:15


황건적의 난은 본격적으로 후한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군벌들과 명사들이 대두되는, 삼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황건적의 난은 여러가지 복잡한 배경상황과 맞물려 일어났다. 좀 더 제대로 알려면 황건적의 난이 발생되게된 이유를 살펴보지않을 수 없는데 그러려면 그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지않으면 안된다.  후한 정부는 전한의 시대를 종식시킨 왕망의 신나라를 타도하고 세워진 정부였는데 일반사람들은 단순히 왕망을 역적, 광인 정도로 생각하고 폄하하지만 그도 황제가 되기전까진 인심을 고루 얻었던 유능했던 관료였다. 그랬던 그가 급속도로 몰락하게된 것은 사족과 호족의 지지를 얻지못하는 이상적이고도 급진적인 개혁과 정책을 펼쳤기때문이다. 후한의 광무제는 사족과 호족 계급의 이익을 복구해주는 노선이었기때문에 그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 다시 한제국을 재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로 인해 후한 정부는 존속 기간 내내 외척과 환관의 다툼으로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소설 등에서는 환관을 무조건 악의 축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그들은 모두 악인도 아니었고 단지 황제가 부리는 수족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갖게되는 것은 황권皇權이 강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또 외척은 결국 사족 중에서 유망한 가문이 뽑히는 것이기때문에 신권臣權의 대표자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후한 정부는 황권과 신권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정의와 공익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보통 혹은 대다수의 경우는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황제가 어린 나이에 등극하거나 오래 권력을 유지하지못한다는 것은 신권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환관이 정치배경에 나선다는 것은 반대로 황권이 강하거나 강해지고 있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일련의 권력 주도권 다툼속에 결국 무게의 추는 환관 측으로 기울었다. 바로 당고의 금이 그것이다. 당고의 금이란 관련자들을 영원히 관직에 오르지못하도록 하는 것인데 관직에 올라야만 신분상승을 하고 유지할 수 있는 사족 그룹에겐 엄청난 철퇴였다. 이것은 분명 환관의 승리이자 황권이 강화된 것이다. 그즈음에서 황제가 된 것이 바로 영제(유굉)이다. 그는 나름 총명하여 신하들의 권력을 분배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인의 출신성분이 이유때문인지는 모르나 지나치게 사재를 축재했다. 어쩌면 그가 관직을 돈으로 매매하게 된 것이 당고의 금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외척을 지지한 사족과 환관을 밀어준 황제의 권력 다툼속에 결국 유망했던 사족들이 정계에서 쫓겨나게되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재임하고 있던 관직은 모두 공석이 된다. 당시 관계官界에 진출하는 것은 기존 관료들의 추천으로 가능했는데 황제 입장에선 기존 방법으론 다시금 신권을 강하게하는 것이 분명했기때문에 주요신권세력을 일소한 상태에선 이를 꺼렸던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사족 입장에선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선 명성을 쌓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효행으로 이름을 날리고 의로써 이름을 날렸다. 후한 말에 명사들의 인물 평이 널리 유행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때문이다. 사실 황제, 환관, 신하중에 어떤 그룹이 더 공명정대한지는 알 길도 방법도 그들의 행보를 보기 전까진 알 방법이 없다. 대개는 자신 그룹의 이익을 위해 권력싸움을 한다. 황제 입장에선 그렇기에 어차피 똑같은 놈들이라면 돈으로 관직을 팔아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자 라고 생각했을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을 써준 사람을 따르기마련이니까. 뭐 황제의 생각이 어찌했던간에 알 길이 없으니 넘어가고 어쨌든 이러한 인재 임용은 후한의 멸망을 초래했다. 엄청난 금전을 내고 진출한 인사들은 본전 이상을 뽑기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수탈했다. 그런 실상이었기에 지방직이 중앙직보다 선호되고 가격도 높았다. 황제는 그렇게 취득한 금전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했으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리 만무하다. 바로 이러한 배경속에서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게되었다. 백성들 입장에선 막대한 세금, 온갖 부역, 군역이라는 엄청난 부담이 있던 상태였으니 자신들이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자라고 생각하는게 당연하다. 이미 전례로 비슷한 출신의 진승이 있었기에.   그런 상황에서 태평도는 딱이었다. 태평도는 우길(혹은 간길)이라는 사람이 창시한 종교였다. 우길은 100세가 넘게 산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어쩌면 우길은 인명이 아니라 교단 내 최고 수뇌자나 선구자를 일컫는 명칭일수도 있다 생각한다. 단군처럼.  아무튼 태평도는 기록이 많지않아 정확히 사정이 어땠는지는 알기 어렵다. 따라서 현재 나의 입장에선 추측(을 빙자한 소설)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다. 태평도를 창시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각은 내 생각에 전국적으로 포교하여 교세를 엄청나게 확장시킨 인물이 아닌가싶다. 장각은 단기간에 전국적으로 태평도 신자를 늘렸는데 그럴수 있던 이유로 이미 태평도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장릉(장도릉) - 장형 - 장로로 이어지는 장천사의 오두미도는 태평도에서 갈려진 일파로 생각한다. 같은 태평도 내에서 장각은 급진개혁주의자로 태평도를 이끌고 장릉은 추구하는 이상이 달라 자신과 맘이 맞는 무리를 이끌고 익주로 갔던게 아닌가 싶다. 장각의 태평도가 급진개혁주의였다면 장릉의 오두미도는 온건파 혹은 유지파였을 것이다. 또 둘다 같은 한자의 장씨인 것을 보면 어쩌면 최고 지도자들의 분열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두미도는 교세와 지지, 발언권 등에서 기존 태평도에 밀려 축소되고 이탈하여 새로 익주 쪽에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한다. 태평도나 오두미도나 기본 방침은 비슷했다. 가입하려면 정액의 재산을 기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단을 운영하고 같이 사용했기에 교단 내에서의 불만은 적었을거라 여겨진다. 기존 백성들 입장에서도 엄청난 부담을 지고 착취당하느니 태평도가 여러모로 좋을 수 밖에 없다. 물론 정부의 감시와 억압이 있었지만.   이런 사정에서 장각은 봉기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이미 정부가 엄청나게 부패하여 신뢰와 민심은 바닥이었고 엄청나게 교세가 확장된 상태였기에 지도자인 장씨 형제들이 이런 꿈을 꾼것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무력으로 봉기하여 군단을 형성했기에 자금과 군량이 필요했다. 근데 그것들을 생산할 여력이 없었기에 포교대상자가 아닌 사람들을 상대하여 약탈할 수 밖에 없었다.  후한 정부는 그들이 봉기하자 긴장했다. 자신들의 기반 자체와 존립이 위태해질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주도권싸움으로 얻은 '당고의 금'조차도 해제하여 황제와 신하들이 힘을 합쳐 황건적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황건적은 자신들의 기반을 위협하는 세력이었기에 반드시 없애야할 적에 불과했다. 황건적은 약탈로써 집단을 유지해야했기에 더이상의 교세 확장은 불가능했고 군대로써 이동해야했기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장기적으로 식량을 얻기 어려운 형편에 있을 수 밖에 없는데다 무기나 갑주도 당연히 정규군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런 황건적을 진압하고 명사인 원소, 비사족인 조조와 손견, 종실인 유비 등이 역사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출처 http://smh2829.blog.me/22036970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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