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부터 24년까지 이병도는 동아일보에 조선사개강이라는 코너를 연재하게됩니다. 한국사 전반을 다룬 이 코너에서 그는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 신화를 소개합니다. 이병도는 일본사학자들이 단군신화를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배제하는 것을 지적하고 자신은
'그중에 나타나는 사상은 매우 뿌리가 깊어 적어도 고대 북방민족의 전설의 일부를 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 필요성을 느끼는 한편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구체적인 역사상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아쉬워 합니다.
해방 이후 이병도는 해방 후 이병도는‘단군설화’에 대한 설화학적·민속학적 연구를 통해 단 군조선의 역사를 밝히려고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환웅천왕은 단군조선사회의 시조신인 동시에 나라 사람들의 생명·신체· 재산·선악·길흉을 맡았던 수호신이었을 것이다. 환웅이 하늘로부터 내려왔 다는 태백산은 신읍神邑·신시神市이고, 신단수는 환웅이 내려왔던 계단이며, 또 그가 머무는 곳의 상징으로 풀이된다. 훗날 삼한의 소도蘇塗와 그곳에 있 었던 큰 나무(솟대)가 각각 신시와 신단수에 해당할 것이다. 단군왕검은 천신 족인 환웅과 지신족인 곰 토템 족의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로 생각된다. 단군은 삼한의 제사장 천군에 비견되는 것으로 제사장을 뜻하고, 왕검은 정 치적 군장을 뜻할 것이다.'
이병도는 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고대 국가들이 조그만한 도시 혹은 부락에서 시작한 것 처럼 고조선 또한 이와 같이 시작되었다 보며 단군 조선을 고조선의 수도였던 아사달을 따 아사달 사회로 이름 지었습니다. 또한 단군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의 변화를 이병도는 지배 씨족의 교체로 보았으며 이 새로운 지배씨족에 밀린 사람들은 따로 나와 새로운 아사달 사회를 건국했다고 주장합니다. 단 그는 기자 동래설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지배씨족이 건설한 국가를 한씨 조선이라 합니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최남선이 식민주의사학의 단군신화 부정론을 비판 하고, 신화학·종교학·역사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것을 고찰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병도는 조선사 개강에서 기자동래설을 부인하면서 춘추전국시대 요동 일대에 이주한 한인漢人 중 기자의 후예를 자칭하는 자가 세력을 키워 평양에 도읍한 것이 기자조선일 것으로 보았으며 이를 기반으로 위만 조선 또한 같은 방향으로 이해하여 두 나라가 한인 국가라 서술 했습니다. 그런 데 그는 북방의 부여와 그 주변의 여러 국가·사회 그리고 삼한의 여러 나라 들을 서술한 후에 한인국가를 서술하는데, 이는 한국사의 첫 장을 중국인이 세웠 다는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조인성 교수는 추측합니다. 특히 이병도는 기자조선의 지배씨족은 사실 기자와 상관이 없는 토착사회의 씨족으로서 요동 방면에서 대두하였을 것으로 보았고 기자동래설은 왕실에서 그 가계를 빛내기 위하여 기자를 시조로 삼으면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그 성립 시기는 기자가 동래하였다는 은말 주초보다는 춘추시대 초일 것이 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는 기자조선, 그의 표현으로 한씨 조선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 조선의 연장으로써, 요동과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중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고대 국가의 기틀을 정비하고 주변 고대 국가들의 맹주로서 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이병도의 주장은 한족 식민정권이라 서술했던 일본 사학자들의 주장에 대비되는 것으로써 현재 한씨조선설 자체에 대한 학계의 호응은 크지 않 지만 기자동래설을 부인하고 기자조선이라는 것이 고조선 내부의 어떤 변동 을 반영한다고 본 큰 틀은 대체로 지지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이병도는 처음에는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을 조선인으로 주장합니다. 물론 그가 위만을 한인으로 본것은 사실이지만, 후에는 연나라 사람이지만 요동의 토인이라 하여 어느정도 조선인 계통일 가능성을 내비치는 등, 조선인 계통일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고 결국에는 위만이 조선인임을 주장합니다. 그는 요동이 연나라 땅이지만 원래에는 조선의 땅이었다는 점, 위만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었다는 기록, 준왕이 위만에게 군사 관련 업무를 맡긴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위에 오른 후 중국식 칭호가 아닌 조선이라는 칭호를 계속 유지했다는 점을 들어 위만의 조선인 설을 주장했습니다. 현재 학계에서는 위만의 국적을 따지기 보단 위만조선이 중국계 망명 집단과 고조선의 토착세력 집단의 결합이라고 해석하는 추세입니다.
이병도는 비록 조선사 편수회의 일원으로써 친일적 행동을 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옛날부터 조선이 타국의 식민지였다는 식민사학 연구의 왜곡을 비판하면서 고조선사를 실증적으로 밝히려고 했습니다. 비록 그의 노력은 한국 고대사의 문제인 자료의 부족과 시대적 한계상 부족함이 있을지 몰라도 고조선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밝히고 알리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인성 교수는 머리말에 아래와 같은 말로써 이병도가 식민사학의 대부로 알려지고 또 이를 기반으로 강단사학이 공격받는 사태에 대하여 한탄하며 현 국사학계가 가진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흔히‘재야사학자’들이라고 불리는 일부 인사들은 합리적인 근거가 없음에도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 혹은 그 이 전에 건국하였고, 이미 그 무렵부터 중국의 북부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광역 의 영토를 확보하였으며, 또 중국보다 우수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 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그간 학계의 연구 성과와는 전혀 다른 것인데, 이 들은 학계가 식민주의사학에 물들었다고 맹비난하였다. 또 학계의 연구 성과에 기초하여 서술된 국정 국사교과서의 고조선사 서술을 자신들의 주장대 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부 언론이 이들의 입장에 동조하였고, 이에 대 해 관심을 갖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현재도 이들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무 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고대사학계는 식민주의사학의 고조선사 왜곡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 사상을 정립하는 과제에 더하여 우리 사회 일각의 국수주의적 인식에 대응하 여 합리적 이해를 시민들과 공유해야 할 책임도 맡게 되었다'
출처 |
조인성, 이병도와 천관우의 고조선사 연구, 한국사 시민강좌, 2011 |